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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마음 인류학 에세이] 모방, 소유하다

작성자
최수정
작성일
2024-12-16 17:45
조회
79

<2024 인문세 학술제 에세이>

2024.12.16. 최수정

 

모방, 소유하다

 

타인을 관찰하고 흉내를 내고 모방하는 능력(감각적인 연결)이 풍부한 문화의 원동력이다. 관찰과 모방은 어떤 누군가가 주기로 마음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누군가를 모방하고 싶은 자의 의지에 달려있다. 내가 따라하고 싶은 점을 그가 가지고 있을 때 나는 그의 허락과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도 그를 모방할 수 있다. 모방은 모방하는 자가 매혹된 상대방에게서 일방적으로 훔쳐온다.

모방의 이와 같은 일방성은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트로브리안드인들이 선물을 줄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선물을 요구하기 위해 쿨라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의 쿨라 여행은 누군가를 모방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었다. 이는 쿨라 원정을 떠난 사람들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임시로 정착한 섬에서 자신들의 평상시 행위 모델을 바꾸는 모습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몇 주 혹은 심지어 몇 달씩 그들의 파트너, 친구 혹은 친척 집에서 주의 깊게 그 지방의 관습을 지키며 산다. 그들의 일을 도와주고 고기잡이도 따라 나선다. 특히 고기잡이 작업 형식은 자신들이 살던 곳과 다르고 색다른 경험이 된다. 그 섬에 있는 동안 그들은 섬 주민들을 모방하며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훈련을 한다.

트로브리안드 작은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기적으로 섬 바깥을 여행할 명분이 되는 쿨라가 없다면 그들은 울타리에 갇힌 동물처럼 고립될 것이다. 오랜 시간 외부와 차단되어 그들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자신들만의 문화에 갇힌다면 절멸했을지도 모른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삶을 기술하던 말리노브스키가 그들이 얼마나 바다 건너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지 묘사한 글이 있다. 그 안도와 위안에는 자신과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줄 선물, ‘모방할 만한 타자성을 갖고 있다는 데서 온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이 도착하는 지점마다 자신들의 행위 모델을 바꾸고새로운 가치에 적응한다. 타자를 모방함으로써 소유하려고 하는 그들의 사고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소유개념과 너무도 다르다.

 

야생의 사고, 감각의 구체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사회와 문화를 만든다. 마르셀 모스의 몸 테크닉에 의하면 문화는 인간의 총체적 신체와 같았다. 한 사회의 행동 제약과 규칙들뿐만 아니라 개인적이라고 생각했던 감정들과 표정들도 사회제도에 의해 규정되었다. 하나의 문화에 속한 우리는 문화의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각 문화에 따라 존재하는 사물을 각기 다른 양식으로 파악한다. 지배적 문화의 관점에 따라 사물과의 상관관계가 변하고 그에 따라 개인의 주관성도 확립된다. 그에 따라 사고체계의 관념이 바뀌고 규정된 관념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진다.

내가 소유의 의미를 떠올릴 때도 나의 사회적 가치관에 따라 소유의 사전적 의미를 떠올린다. 소유란 개인적인 관계에서 물건을 갖는 것, 지배하는 일이다. 나는 그 이상의 의미는 알지 못한다. 내가 소유하다는 개념으로 사고할 수 있는 범주는 기껏해야 추상적 물질적 소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의미를 단순화하고 숨은 의미를 손쉽게 생략해 버리고 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내가 단어의 개념만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사고체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의 표현대로 야생의 사고구체의 사고. 그것은 감각적 직관에 매우 가깝게 지각이나 상상력의 차원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구체적이었는지 야생의 사고를 하던 사람들이 식물을 향기로 분리하던 감각 기준이 지금의 화학이 분류하는 기준과 일치했다(65)는 예는 놀라웠다.

레비스트로스가 인간의 자연화를 말할 때는 인간의 감각적 직관이 인간 안에서 발생한다기보다 인간 바깥의 자연으로부터 온다는 의미다. 나를 만드는 것이 바깥에서 온다고 사고할 때 필연적으로 나는 나 바깥의 자연과 연결되었음을 생각한다.

신화와 의례는 이 연결에 대한 감각계의 이론적인 조직화와 탐색”(69)을 발견하게 해준 관찰과 사고의 양식을 잔존형태로 오늘날까지 보존해 온 것이다. 신화와 의례로 인간은 가장 힘든 과제, 즉 감각에 직접 수용된 바를 체계화하는 과제에 도전했다.”(64)

신화적 사고의 특징은 그 구성이 잡다하며’(우연의 산물) 광범위하고 그러면서도 한정된 재료’(폐쇄적 체계)로 스스로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신화적 사고는 주어진 재료를 활용해야 한다.

토테미즘

구체적 사고를 하는 야생의 사고는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감각 체계에 넣는다. 그럴 때 모든 성스러운 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야생의 사고, 62) 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이 제자리가 우주의 아름다운 질서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의 차이를 모방하고, 선물로 주고받으며 서로를 붙들고 있는 자리다. 모든 존재는 자기 자리에서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할 때 성스럽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토테미즘은 토템이라는 상징을 가지고 인간을 무엇을 하는 양식, 태도에 대한 설명이다. 토템이란 자연의 개체를 종 차원에서 일반화해서 인간 집단에 그 성격을 부여한다. 이 안에서 부족의 행동 양식뿐만 아니라 감성, 정서가 모두 결정된다. 그리고 하나의 토템부족이 된 인간은 자연 안에서 그 부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서로 다른 부족의 역할이 겹치지 않게 음식 금기부터 정한다. 어떤 것을 먹고 먹지 않고 하면서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의 부분 질서를 책임진다. 이들은 세계에 질서를 유지하는 관계가 존재한다는 자각하고 있다. 각자가 맡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이 세계 질서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종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관계의 기술이다.

 

주기 위한 소유, 자연을 모방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은 소유를 탐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그것을 나눠주면서 관대함의 느낌을 향유하기 위해서다. 만물이 자연의 풍요로움과 관대함에 신비로운 경외감을 드러내듯이, 풍요를 나눠주는 자신의 관대함에 남들이 감탄하는 모습에서 위신과 명예를 느낀다.

트로브리안드린들은 밭 작업을 인내와 목적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열심히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고, 잉여분은 다른 사람을 준다. 그 잉여에는 자연에 되돌려 주는 잉여도 포함되어 있다. 잉여를 생산하는 노동에는 많은 부분이 실용적인 생산보다 심미적인 측면에 투입된다.’ 밭농사를 짓는데 실용적인 생산보다 밭을 꾸미는데 시간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수확물을 자연에 돌려주기 위해서 밭에서 그대로 썩히는 것을 보면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자연의 실체를 의식하고 있다. 열심히 일해서 많은 수확량을 생산해 그것을 다시 자연에 되돌려 주고 자기 힘을 들여 예쁘게 꾸며 자연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다.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자연을 순수한 증여를 모방해 자연처럼 많은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자연의 대리자로 여긴다. 그래서 관대한 그 사람에게 위세와 명예를 부여한다.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계를 모방한다. ‘선물이라는 형식을 반복하며 세계의 질서를 기억하고 유지하려는 지혜를 발휘한다. 이 질서에서 탈락해 고립될 때 따라오는 위험을 생각한다. 선물을 받기 위해 떠나는 쿨라 여행은 타자를 모방해서 소유함으로써 단단히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서로에게 의무와 같은 역할을 부여하기 위한 여행이다.

쿨라의 순환 안에서 팔찌(음왈리mwali)와 조개목걸이(술라바soulava)는 서로를 끌어당긴다.팔찌와 조개목걸이 중 하나를 받았으면 다른 것을 줘야 하기 때문에 주고받는 관계는 처음부터 서로를 향해 있다.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는 선이 더 단단히 서로를 붙들게 만드는 그물망의 방식으로 묶여있다.정기적 쿨라를 통해 바다 너머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에게 받은 선물로부터 내 삶이 꾸려진다고 생각하며 사는 일은, 모든 것이 나로부터 이루어진다는 나의 사고 체계와 확연히 다르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인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야생의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소유하다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생기 넘치는 의미가 있다.

 

풍경과 하나

토템은 지역적 한계가 있다. 신화는 공간의 조직화에도 사용된다. 야생이 사고 분류체계가 지역성과 지리에까지 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공간까지 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며 인격을 부여한다. 예를 들면 지세 변화는 저마다 의례의 문구와 하나로 대응하고, 자연의 모습은 원주민에 있어서는 신화의 구조이며 또 의례의 순서를 의미한다. 오래된 이야기를 품은 경관은 신화를 대변하고 영속되어 역사가 된다. 자연적 조건은 의미와 가치, 친밀감 등 인격을 갖춘 존재가 되어 사회의 범위를 넓힌다. 인류의 범위에 산과 강을 넣어 인간적 삶을 자연 전체로 확장한다. 이러한 토템적 분류법의 본질적 기능의 하나는 집단의 폐쇄성을 타개하고 무한에 가까운 인류관을 촉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공간은 이름이 부여된 장소들의 사회이다. 장소나 개인이나 모두 고유명사에 의해서 이름 지어지며 또한 지명이 인명과 서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252)

사회적 관계의 전 체계는 우주체계와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또 신체에도 투영될 수 있다. 나는 타인에 의해 주관화된 객관적 존재이므로 관계명을 지을 때, 다른 씨족의 호의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을 가난한 자라고 한다.(258)

야생의 사고는 인간의 자연화가 바탕이 된 일종의 주술이다. 주술은 자연과 내가 감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조작체계다. 주술은 고대인들이 자신에게 좋은 방향으로 사고하기 위해 사고체계를 구성하는 조작술이다. 야생의 사고는 상호 변환의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통합적 사고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자기가 좋은 것이 우주가 좋은 것이 될 수 있게 생각한다. 현대인의 사고처럼 인간만 좋은 방식으로 사고체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때, 나도 좋고 자연도 좋다. 야생의 사고를 통해 고대인들은 자연의 한가운데에서 만물과 연결된 감각을 느낀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리에서 누가 누구를 모방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충만한 상태를 느낀다. 만물이 자기의 일부고, 자기가 만물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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