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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마음 인류학 에세이] 항해하다

작성자
조재영
작성일
2024-12-22 17:58
조회
105

멈추지 않는 항해로 우주 활동에 동참하다

 

 

현대인이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날 경우 그 항해의 목적은 선명한 몇 가지로 축약된다. 물품을 해외로 수출해 돈을 벌거나, 힐링을 위한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 등이다. 나름 모두 유익한(?) 것들로, 그 항해의 목적과 이유가 납득이 된다.

그런데 여기 납득되지 않는 모호한 이유로 험한 항해를 하는 이들이 있다.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에서 쿨라 원정대는 물건을 사거나 팔아 이윤을 남기기 위해, 혹은 낯선 타지로 가서 정착하기 위해 항해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저 타인에게 조개 목걸이를 선물하기 위해 항해를 한다. 굳이 말하자면 선물을 교환하고 싶은 욕망, 이것이 이 항해 목적의 전부이다.

쿨라(Kula)’는 뉴기니 해안과 그 주변 섬에 사는 파푸아넬라네시아인들 사이에서 일정한 교역 루트를 따라 특정한 형식 아래 교역 행위이다. 일상 장식으로 사용되지 않는 두 개 의 순수 장식용 물건을 끝없이 되풀이해서 교환하는 것이다. 심지어 필요에 의해 행하지도 않는 이 교환 행위에 부족들을 엄청난 정열을 보인다. 특히 두 개의 교환 장식품, 팔찌 므와리(mwali)와 목걸이 소우라바(soulava)는 일상 장식품과 분명히 구분된다. 그리고 그 장식품은 장식하기 위해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장식조차도 목적이나 필요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이것은 크기가 매우 작고 착용하기에도 불편하다.

궁금하다. 도대체 모든 불필요와 불편을 감수하고서 왜 이토록 이 두 개의 장식품에 정열을 보이는가? 무용해 보이는 이 물건을 주고, 또 받기 위해 그 멀고 험한 길을 떠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쿨라, ‘관계 맺기라는 욕망

 

쿨라의 또 다른 유별한 특징은, 그 본질을 이루고 있는, 교환 행위 그 자체의 성격이다. 절반은 상업적이고, 나머지 절반은 의례적인 교환인 쿨라는,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깊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가운데, 쿨라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의할 것은 그것이 보통의 소유가 아니라 특수한 유형의 소유로서, 두 가지 종류의 물품을 번갈아가며, 짧은 기간 동안만, 소유하는 것이다. 소유의 상태는 영구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완전한 것이 못되지만, 물품을 계속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빈도로 보면 소유의 기회는 높아지며, 그런 점에서 누적적 소유라 부를 수 있다. (670)

 

팔찌와 목걸이 교환은 매우 엄격한 제환과 규칙 아래서 행해지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 쿨라에 참가하는 남자는 정해진 몇 사람하고만 교환하며 이 상대들하고의 관계가 평생에 걸쳐 지속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동체 내 이 남자들의 지위 차이가 드러난다. 어떤 평민 남성은 교환 상대가 단지 몇 명에 지나지 않는 반면 추장이나 지위가 높은 노인의 경우 많으면 몇 백 명까지, 교환 상대의 범위가 크다. 쿨라가 타자들과의 관계 맺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관계라는 게 예나 지금이나 만만치 않다. 쿨라는 서로에게 많은 의무를 지우고 선물과 봉사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수확물이 있을 때면 더 좋은 것을 골라 상대에게 제공해야한다. 지위가 높을 수록 이 같은 수고를 기꺼이, 그리고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두 개의 장식품은 역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두 개를 같은 사람이 받는 일이 없고, 멈추어서는 안 되기에 장식품이 누군가에게 들어왔다 하더라도 1-2년의 보관이면 충분할 뿐 그 누군가도 물건을 영구히 소유할 수 없다. 쓰임도 없는 물건을 단지 1-2년 보관할 뿐인 일에 그 많은 수고를 한다고? 이 일시적 소유의 의미가 무엇일까?

저자는 쿨라를 이 소유로 인해 그가 그 물건을 과시하고, 그것의 입수 경위를 이야기하고, 그 이후에 누구에게 줄 작정인가를 말하는 기회를 준다고 말한다. 물건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들어왔고, 또 내가 그 물건을 어떤 사람에게 줄 것인지, 관계의 흐름을 함께 보여준다. 그리고 그 흐름을 계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일종의 ()’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 관계와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그 사람의 명성을 얻게 한다. 부족민에게 명성과 영광은 그들이 어떤 관계에 얼마만큼 엮어 들어가 있는지에 달린 것이다. 영구히 소유할 수도, 이윤을 남길 수도 없는 물건을 오직 관계를 증식시키기 위해 맺어간다. 그렇다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고도로 체계화된 지식이 꼭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생리적, 경제적, 실용적 목적을 넘어 지적 욕구그 자체를 충족시키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류는 언제나 우주와 세계에 대한 지적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세상을 면밀히 관찰하며 자신들의 언어를 통해 고도화된 지식 체계를 만들어 낸다. 이 지적 욕구는 혼돈처럼 보이는 우주에 어떤 원초적 질서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욕구이다. 각자 사용하는 언어, 또 그 언어와 함께 만든 개념은 달라도 우주에 원초적 질서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동일하다.

우주 활동에 관여한다는 것은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생산해내는 활동에 인간도 그 일부로 함께 참여한다는 것이다. 타자와 맺는 관계에 대한 욕구는 우주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이기도 하다. 관계를 통해 가치를 증식시킨다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냄으로써만, 오직 그때에만 우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관계를 맺지 못하면 어떤 가치도 증식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주에 참여한다는 것이 그저 마음 속 의지를 낸다고 되는 일만은 아니다. 우주적 존재라면 가치를 창조해야하는 의무가 부여되는 셈이다.

 

주술로 우주에 관여하다

여기서 인간의 주술성이 들어간다.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는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에서 이 항해자들의 쿨라에 주술이 극도로 중요하며, 차지하는 비중 역시 매우 높았다고 말한다. 그는 원주민들이 근본적 중요성을 가진 문제에 직면할 때면 주술의 도움을 받는 것을 발견했다. ‘주술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고, 주술은 인간에게 자연력을 지배하는 힘을 부여하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위험에 대응하도록 해주는 무기와 갑옷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521)고 했다.

 

주술은 항상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주술은 인간에게 지극히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것에 내재하는 요소로 간주되어 왔다. 주술사가 사물에 대해 그의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사용되는 말(=주문) 또는 과정(=의식)은 그것들(=인간에게 중요한 모든 것)과 항상 함께 있었다. 주술의 형식과 그것의 주제는 함께 태어난 것이다.(527)

 

주술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우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또 인간이 그것을 막아보겠다는, 인간의 힘과 의지가 그 운행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 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해서 인간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지금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들 항해자들 역시 우주 운행에 있어 인간을 중심에 두기도 하지만 이 중심을 회항하고 열려 있는 중심이라는 점에서 현대의 인간 중심주의와는 구별된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연의 힘을 사로잡은 다음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힘이 자연에 대한 자기주장을 하는 것이다.(534)우주로부터 기운과 영향을 인간이 받아 그 기운과 영향을 다시 자연과 우주에게로 돌려보내는, 일종의 통로이자 매개자로서 인간을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현대와 다르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은 타자와 선물 교환을 하며 가치를 증식하고, 그 경험을 통해 스토리를 계속 만들어 가고 받은 선물을 일시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또 다시 그것을 길 위로 돌려보내며 또 다시 바다 위,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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