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마음 인류학 에세이] 연결하다, 알아차림의 기술
연결하다, 알아차림의 기술
시대의 키워드를 알아차리다
이번 시즌 마음의 인류학에서는 무문자 사회의 사람들이 자연과 연결되기 위해 집단의 편향된 사고체계에 의한 모순을 조정하는 ‘토테미즘’ 방식을 배웠다. TV 프로그램에서도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가거나,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한 커플 연결 프로그램들이 성행하는 것을 보니 ‘연결하다’는 지금도 시대의 중요한 키워드인 것 같다. 부족, 대가족이 해체되어 핵가족과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 1인 가구가 성행하는 등 집단의 형태가 바뀌었는데도 ‘연결하다’는 왜 시대를 불문한 주요 키워드인 걸까? 시대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어쩌면 우리에게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어떤 공통의 내재적 사고가 무의식중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혼자가 좋아’라거나 ‘무리가 낫지’라는 판단은 모두 존재를 개체적으로 파악하기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했을 때 성립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독립된 개체로 인식하는 지금의 우리는 만물의 관계성을 감각하기 어렵고, 무감해진 까닭에 그 필요를 인지하지 못한다. 무감해진 우리는 어떻게 세상과 연결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감각을 키우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에 레비–스트로스는 효율을 높이기 위한 문명인의 사고와는 다른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의 사고’인 야생의 사고에 집중하자고 제안한다. 효율성을 기준으로 작동하는 현대 과학이 지배하는 기술산업사회는 소외와 착취로 유지되고 있으므로 그 기준에 적합하지 못하면 바로 배제시키는 방식이 상식이 되었다. 이분법에 길들여진 우리가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무감해진 까닭이다. 그렇다면 야생의 사고는 무엇이 다를까? 야생의 사고를 기반으로 한 토테미즘(신화적 사고, 주술, 구체의 과학)도 이항대립을 분석 도구로 삼지만, 사태를 하나의 인과론으로 파악하는 현대 과학과 차이를 가진다. 다만 토테미즘은 과학과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하는 사고체계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했던 원시사회 사람들은 그들에게 직접 쓸모가 없는 부분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며 경험적, 감각적 직관을 활용해 철저하게 관찰했다. 그들에게 자연은 인간만큼 중요하고 친숙한 협력 수단이자 사고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무문자 사회 사람들은 이처럼 자연과 문화의 상보성을 고려해 자연적으로 다르지만, 문화적으로 같다고 간주하고 종적인 차원에선 같지만, 상징적으로 다르게 만들며 자연과 문화 사이의 대립을 초월하는 관계의 기술을 발휘하며 살아왔다. 그들에게 연결하기란 이질적인 대상에 관심을 기울일 때 드러나는 연관성과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는 알아차리기 기술이다. 사태를 다각도로 파악해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해볼 수 있는 토테미즘은 자신을 단독적 개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연결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줄 것 같다. 단순히 같은 것끼리 묶거나 다른 것과 이어주는 연결과 달리 자연현상을 기호 형태로 받아들여 다채로운 관계의 지평을 넓히는 무문자 사회의 사고체계를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토테미즘, 각양각색의 원소로 된 혼합물
우리가 원시적이라고 일컫는 무문자 사회의 분류체계 또한 질서에 대한 요구에 기초를 두고 있다. 과학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야생의 사고가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것에도 불구하고 이해될 수 있는 이유는 모두 이러한 공통성이 있기 때문이다. 철저한 관찰, 관계나 연관성 있는 것끼리 분류하는 조직화에 대한 요청은 무질서를 없애기 위한 공통적 욕구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다만 주술이 감각적 직관에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반해 과학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차이점을 가진다. 주술에 의한 결정론적 진리는 감각적 직관으로 포착된 것이 포함되기 때문에 사태의 인과를 일대일로 대응하는 과학에 비해 포괄적이다.
무문자 사회 사람들의 이러한 분류체계는 자연과의 필연적 관계를 세우기 위한 구분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다. 토템은 동물, 식물 등 특정한 대상의 상징을 기호화하는 것으로, 개체를 종 차원에서 일반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호화는 언뜻 보기에 서로 무관한 메시지들, 즉 인간들 사이의 관계인 문화나 사회, 인간과 자연 각각의 문제로 간주되는 현상의 메시지들 사이에 변환이 가능해지게 한다. 기호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받아들인 메시지를 다시 다른 코드로 변환하거나 스스로의 체계로 재구성할 수 있는 토테미즘의 유연함은 인간의 본위의 잣대로 자연을 해석하는 ‘자연의 의인화’ 방식에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이 간과되기 때문이다. 토테미즘은 인간의 행동을 자연계의 인과성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자연을 보며 인간의 행위를 해석하는 ‘인간의 자연화’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토테미즘이 성행했던 사회에서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원인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은 필연적 관계의 응측된 표현이자 인과의 그물인 복합체로 인식된다. 이에 레비–스트로스는 토테미즘을 ‘각양각색의 원소로 된 혼합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집합체로 존재하는 사고의 틀은 집합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며 구조적으로 재배치되며 변화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건의 구성 요소들은 파괴할 수 없는 부속품으로 배치가 조정되어 목적도 되고 수단으로 쓰이게 되므로 소외가 일어나지 않는다.
토테미즘의 무한한 확장 능력
토테미즘은 이항 대립의 논리 체계로 종을 분류하고 통합하며 보편화와 특수화의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토템적 분류법은 보편성과 특수성, 추상과 구체를 서로 연결해주는 동시에 분류하고자 하는 속성의 극한까지 갈 수 있는 무한한 확장 능력을 가진다. 토테미즘은 한쪽에서는 분류가 불가능해서 오직 명명(命名)만이 가능한 특수성과 개별화의 방향으로, 다른 쪽에서는 부족의 경계를 뛰어넘어 보편성과 추상의 방향으로 확장된다. 이는 개인의 신분 규정과 집단의 확장까지 가능케 하므로 같은 토템을 가진 사람은 부족이 다르더라도 서로 친척 사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레비–스토로스에 의하면 이러한 분류가 정지하는 것은 장애가 생기거나 분류 기능이 마비되어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갈 곳까지 간 연후에 정지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좌절을 모르는 야생의 사고와 토테미즘의 무한한 확장 능력과 포괄범위에 그저 입이 벌어진다.
토테미즘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 확장되는 것일까?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토테미즘은 부족의 영토와 지리, 생물적 개별화에도 대응하며 신체 해부학적 면에도 투영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란다족에는 신들이 처음에는 손발도 없이 모두 하나로 합쳐져 있었는데, ‘망갈쿤제르쿤쟈’ 신이 신들을 모두 떼어내어 하나하나의 형태로 만들어주었다는 신화가 있다. 또한 문명의 여러 기술과 육지의 네 집단과 물의 네 집단 2개의 집단으로 나뉘는 체계를 가르쳐주었고, 집단마다 영토를 갖게 했다는 신화가 있다. 각 씨족의 아이들이 토템의 변별적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독특한 머리 형태를 한다든지, 머리색이 옅은 아이는 토템 조상의 환생이라고 여기는 등 어린이의 신체적 차이도 토템적 양식으로 설명된다. 이처럼 무문자 사회에서 토테미즘은 논리 체계일 뿐만 아니라 씨족의 친족관계와 외혼제 등의 사회적 관계 및 선과 악, 질서와 혼란 같은 사회적, 도덕적 기초가 되고, 심리, 기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토테미즘은 집단 내 관계뿐만 아니라 지리와 문화, 언어의 상이성을 뛰어넘어 타 문화와 언어집단 사이에도 연결되어 있다. 무문자 사회 사람들은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어 통시적으로도 연결된다. 그들은 현대의 단선적 시간관에 비해 순환적이며 비시간적인 시간관을 갖는다. 그들에게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만, 서로를 반영한다는 점에서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란다족은 각 개인이 출생 전에 제비뽑듯 선택되어 현세에 환생한다고 생각하고, 원주민에게 영토 전체는 단순히 흥미로운 경관이 아니라 그들 조상이 만들어낸 것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추링가churinga’의 도움을 받는다. 추링가는 양끝이 뾰족하거나 둥근 타원형의 돌이나 나무로 된 물체로 무시간적 체계에 통시성의 빈곤화를 보충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는 장치다. 추링가는 특정 조상의 육체를 나타내며, 대대로 조상의 환생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부여된다. 추링가는 일어난 사건의 화신인 고문서와 같이 과거를 물적 존재로 현재화하여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며 과거와 현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게 해준다. 이처럼 과거를 시간을 초월한 모델로 생각하며 현재 삶의 해석 도구로 삼는다는 것은 지금의 자신을 존재하게 한 조상들의 공적을 잊지 않으면서도 최초의 조상이 현대의 인간과는 다른 속성을 지녔음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야생의 사고는 이처럼 형식의 유사성을 통해 역사를 분류체계에 끼워맞추는 것을 가능하게 해서 시공간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통일된 체계를 구축했다.
사려 깊은 태도의 필요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자에게 이질성을 이해하기 위해 타 문화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의도를 이해하며, 문화를 하나의 의미의 총체로 보는 사려 깊은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우연적 목표와 조건에 따라 구조화된 사고체계와 관점에 따라 세상을 파악하기 때문에 절대적 옮음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종적으로 다르지만 문화적으로 같다고 여기고, 종적으로 같지만 상징을 만들어 차등을 두는 토테미즘과 ‘시각의 상호성’을 이분법에 의한 대립을 넘어설 수 있는 모델로 생각했다. 야생의 사고는 그 범위가 한 집단의 영토보다 훨씬 넓게 미치며 극히 미세한 부분에 걸쳐 관여하기 때문에,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해석할 때 나타내는 원주민의 예리함을 이해하기 위한 특별한 감수성이 요구된다. 또한 인간과 세계가 서로의 거울이 된다는 시각의 상호성만이 야생의 사고의 속성과 능력을 가르쳐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각의 상호성과 감수성, 야생의 사고가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인 까닭에 수련이 필요하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자취에서 짐승이 지나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예리함은 우리에게도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바퀴의 회전이나 엔진 속도의 변화, 상대 운전자의 눈빛을 통해 그 의도를 알아채고 추월하거나 상대방의 차를 피하는 등의 신속한 판단을 내리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러한 판단력은 지각이 예민해지고 ‘길들여지지 않은’ 잠재력이 연마되어 우리의 활용 수단과 용기가 증대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다만 이러한 판단력은 다른 운전자와의 일련의 대화 가운데 자기 의도와 같을 상대의 의도는 아직 의미가 부여되지 않아 기호로 나타나기 때문에 호기심과 긴장감이 유발되고 이해와 해독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연결하기란 이러한 긴장과 호기심으로부터 촉발되며 서로의 의도가 연관되어 있을거라고 여겨지는 순간들의 알아차리기 기술이자 행위다. 우리는 시각의 상호성을 통해 상호적이고 비대립적인 만물의 다종의 얽힘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알아차림은 다시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고 살아야 할지를 숙고하게 되고, 이러한 숙고의 자세는 인식의 변화와 함께 다채로운 행위 양식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