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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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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인류학 에세이] 이해하다 (최종)

작성자
유나
작성일
2024-12-22 22:56
조회
52

마음인류학 에세이 / 2024.12.22 /손유나

이해하다

사람은 자신과 다른 이념, 문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갖춰야 할까? 이해는 사물의 본질과 내용을 파악, 분별 해석하는 고도의 두뇌활동이므로 이성과 논리, 합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와 다른 것을 맞닥뜨리고 이해하려고 할 때, 내가 마주한 것은 차가운 이성의 활성화가 아니라 당혹, 놀람, 분노, 혐오와 같은 온몸을 뒤트는 듯한 감정이었다.

수렵·채집 경제를 바탕으로 소위 원시 문화를 먼 거리에서 조망할 때는 온화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대칭적이고 평등한 사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원시 문화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지구 어딘가에서 어떤 부족이 임신은 특정 햇빛이 여성의 뱃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믿어도 나는 평온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시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원시 문화의 신화와 주술이 본질적으로 근대 과학과 다르지 않음을 피력한다. 한 일례로 시베리아 벌판에서 순록 유목으로 살아가는 야쿠트족을 언급하는데 이들은 치통이 있을 때마다 딱따구리 부리와 접촉한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이 치료법에도 과학이 작동하고 있다. 쉽사리 수긍이 가지 않았지만 인류학의 대가가 한 말이니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나의 가식이 벗겨지고 본심이 드러났다.

내가 야생의 사고에 대해 평온했던 이유는 원시 문화권 사람을 나와 다른 사람들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동물의 행동에 가치평가를 하지 않는 것과 같은 태도였다. 하지만 주술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와 동일한 사고 체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전제하자, 원시 문화를 바라보는 마음이 완전히 달라졌다. 원시인들은 사물의 원리와 작동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의료행위는 덜 발달했다. 이미 한물가 버렸다고 생각한 진보관이 내 깊숙한 곳에서 얼굴을 들었다.

 

이해하기는 나를 향한다

사람이 주술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사실이 놀라운 건 아니다. 행운의 네잎클로버, 4층이 없는 병원, 수험생 자녀를 위한 기도, 사주와 타로점. 주술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세상은 불확실하기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안해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몸담은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 자연의 질서에 개입하여 원하는 결과를 끌어내려 애써왔는데 그 노력의 한 형태가 주술이다. 주술은 어떤 문화에서는 사회를 지탱하는 축이자 공동체의 본질로서 자리 잡고, 어떤 문화에서는 미신, 사이비 종교, 심리술로 치부된다. 혹여 한 개인이 주술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해도 사적인 영역에서만 허용될 뿐이다. 나는 이성 대 감정이라는 대립 구도처럼 주술 대 과학구조가 성립하고, 어느 측면에 우세하느냐에 따라 문화의 양상이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주술 역시 과학이며, 주술이 근대 과학을 포함한다고 설명한다. 과학의 목적은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으로 야생의 사고와 과학 둘 다 자연의 질서를 찾아 구조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만 주술은 근대 과학보다 포괄하는 범위가 더 넓다. 인간, 동물, 사물, 태양과 달, , 바람 등 지구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 함께 인과의 고리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햇볕을 쬐어 임신한다는 생물학적 차원을 뛰어넘는 인과가 성립한다. 반면 근대 과학은 물리학에 바탕을 두고, 자연을 여러 개의 차원을 구분하여 그 중 일부에만 인과를 성립시킨다.

이 대목에서 한참을 생각하면서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견고한 믿음을 발견했다. ‘과학은 무조건 옳다.’라는 믿음이다. 근대 과학은 실험, 수식 등을 통해 검증하고,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기존의 지식을 폐기한다. 이 모습을 보며 과학은 언제나 절대적 진리를 표방하고, 오류는 결코 과학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여 주술이 과학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강력한 의문은 실용성과 실효성을 담보할 수 없는 주술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였다. 딱따구리 부리는 치통과 관련성이 없다. 치통은 사람이 몸으로 겪는 고통으로, 증상이 완화되는지 악화하는지는 경험적으로 명확히 알 수 있을 터인데 왜 딱따구리와 치통이라는 연결성을 폐기하지 않을까? 답을 찾아 곰곰이 생각하는 와중에 실용적 효용을 가지지 않는 것은 쓸모가 없다고 굳게 믿는 내 모습이 낯설게 눈에 들어왔다. 이처럼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나와 내가 속한 사회가 어떤 관점을 지니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먼저 알게끔 했다.

 

이해하기는 격렬한 소화다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프로이트, 엘리아데, 스피노자 등 그들이 펼쳐낸 지성 세계를 산책하듯 둘러보았다. 이해는 일종의 영토 확장이었다. 지식은 책장 속의 책처럼 차곡차곡 쌓였으나 그뿐이었다. 사상가의 철학에 질문을 던지거나 내 생각과 연결하려 굳이 애쓰지는 않았기에 지식은 영토에 경계선이 그어진 것처럼 섞이지 않은 채로 잠잠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야생의 사고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지 않고는 도저히 걸음을 뗄 수가 없는 낯섦이었다. 원시인의 정신세계, 주술의 원리, 미신에 관한 뇌과학자의 입장을 서술한 책을 찾아보고, 현대인에게 숨겨진 주술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일례를 떠올리기 위해 기억을 헤집었다.

이해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화학작용에 수반되는 불꽃반응처럼 격렬한 감정이 일었다. 옛날 사람들이 지식이 불충분해서 저지른 오류로서의 주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주술과 근대 과학이 동등한 위상을 가진 과학이라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되지도 않는 것을 믿어서 나를 이런 고통에 빠뜨리는가.

한참을 한 곳에서 맴돌다 보니 답답함, 짜증, 분노가 일었다. 그때 위로가 되었던 것이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저자인 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의 일화였다. 말리노프스키는 트로브리안드 섬에서 현지 조사를 하며 일기를 썼는데, 이 일기에는 그가 느꼈던 고충과 원주민에 대한 경멸, 혐오, 적개심이 날것 그대로 실려있다. 그래서 그가 이중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말리노프스키가 토해낸 감정에서 그가 얼마나 트로브리안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와 다른 것이 가까이 다가올 때 일어나는 온갖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인내하는 일이 이해하기에 수반되는 필수과정인듯하다.

이 씨름 끝에 얻은 성과가 있다. 오류가 어떻게 과학일 수 있느냐고 한참 생각하다가 비교적 현대에 밝혀진 과학의 오류가 생각났다. 1989년 퀴리 부부가 발견한 라듐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 특징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라듐 화장품, 라듐 초콜릿 등 라듐 제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30년이 되어서야 방사능의 위험성이 인정되고 라듐 제품이 금지되었다. 과학사에서 어떤 사실이 오류라고 밝혀지는 데는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다. 나는 나와 같은 시간대의 과학만을 보고 과학이 절대적인 진리를 표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학의 무오류성에 대한 믿음이 시야의 좁음에서 왔음을 알자마자 과학이 자연의 원리와 질서를 파악하려는 노력 그 자체라는 말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렇다. 야생의 사고와 근대 과학은 질서를 파악하고 구조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 과정에서 올바른 배열을 만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지금까지 인식하지 않았던 고로 의문을 품지도 않았던 과학의 절대 진리성이란 골조가 허물어지자, 내 인식의 틀에 맞는 것이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고집하던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해하기는 잠복한 것의 시작이다.

애나 칭은 세계 끝의 버섯에서 불확정성은 역사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시작이 잠복해 있는 교점이다.”(450)라고 말한다. 더불어 확장성을 언급하는데, 확장성이란 단일 작물 농업처럼 내부적인 틀에 어떤 변화도 없이 규모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고, 변화와 마주침을 통해서만 중단된다. 나에게 야생의 사고는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수용할 수 없었던, 확장성이 중단되는 지점이었다. 이곳에서 온갖 새로운 것들이 싹을 틔울 수 있을 터이다.

앞서 밝혔던 주술의 실용성에 대해 방향을 틀어 질문을 던진다. 인간에게 실용성은 절대적인 가치일까? 어느 시점에서 바라본 실용성일까? 근대 과학은 효과 좋은 마약성 진통제 같다. 적절하게 쓰면 매우 도움이 되지만, 파국적인 결말을 갖고 올 가능성도 크다. 근대 과학은 더운 여름날에 냉기를 느끼게 해주었고, 이제는 공기의 입자에 관여하여 인공 강우를 내릴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동시에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생태계를 교란해 우리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높은 확률로 파국을 수반하는 즉효성 기술과 효과는 덜 하지만 지속 가능한 주술 중에서 선택하라 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것을 선택할까? 기후변화로 인한 고통까지 포함한다면 과학이 정말 실용적이라고 평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답은 다르겠지만 주술을 지나서 근대 과학으로 향하는 진보는 이제 필연적인 경로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하다.

주술이든 근대 과학이든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다른 낯선 것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내 인식의 틀에서 불가해하다고 뱉어내지 않고 끌어안아 소화하면 서로 연결되는 어느 층위, 어느 지점을 찾게 될 것이다. 애나 칭이 숲에서 송이버섯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이리라. 나는 다시 나의 이해가 끝나는 지점에 서 있다. 최근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 뒤에 도사, 법사, 보살이 있었음이 밝혀지자 비합리적 미신에 의존한 주술 정권이라고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동시에 이번 정권의 몰락을 미리 예언한 무당, 점술사, 사주 명리학 전문가들이 올린 영상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건 또 무슨 모순되는 상황인가? 골치 아프면서도 호기심이 동한다. 이 궁금증에 다시 한번 부딪혀본다면 무엇을 발견할지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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