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마음인류학 에세이] 성스러워지는 야생의 사고
마음인류학 에세이(4) / 생각하다 / 2024.12.22. / 진진
성스러워지는 야생의 사고
우리는 매순간 무언가를 선택한다. 크고 작은 그 선택들로 인해 삶의 방향이 결정되고 희비가 엇갈린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후회가 없는 최선의 결정을 하기 위해,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기본이다. 이를 바탕으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인과를 따져 우리는 판단과 선택이라는 걸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 ‘과학’은 내게 꼭 필요한 태도이자 학문으로 생각되었다. 이미 증명된 객관적 학문인 과학은 절대적 진리이자 이를 거스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다.
극심한 폭염과 가뭄인한 피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구름씨를 뿌려 인공비를 내리게 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생각해낸다. 상공에서 구름씨를 뿌리면 비는 즉각적으로 만들어져 쏟아지고 가뭄으로 인한 문제는 해결된다. 이에 반해 과거 인류의 조상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무언가를 기워하며 제의를 지내거나 주술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 비의 원리에 입각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문명인의 입장에서, 주술이나 제의는 미개하게 여겨진다. 나 또한 『야생의 사고』를 읽을 때까지 제의와 비 사이에 어떤 명백한 인과가 없음에도 여기에 힘을 들이는 그들의 방법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원주민들의 생활방식이나 문화를 존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비와 연관도 없는 주술과 신화에 지금까지도 의존하고 있는 그들을 앞에서 그들에 대한 내 태도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인문세 마음인류학에서 함께 읽었던 『야생의 사고』의 레비–스트로스는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최고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과학’이라는 것도 우리 시대 인식의 틀에 불과한 것이며, 미개하다고 치부하는 원주민들의 사고 또한 근대의 과학 못지않게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사물과 존재를 포괄하여 자리매김하는 그들의 사고가 신성하다고까지 말한다. 납득되지 않는 이 과제를,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야생의 사고의 ‘생각한다’를 통해 풀어가보려고 한다.
내가 생각한다는 착각
생각은 ‘내가’ 한다. 내 마음(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생각한다’는 나만 아는 지극히 사적인 부분이기에 ‘나의’ 것이라는 데 별 의심을 가져보지 못했다. 너무도 당연해서 연구해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조차 못해봤던 이야기다. 그런데, 마음인류학 세미나에서 읽었던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내’ 생각이란 애초에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나의 생각이란 사회로부터 제약을 받으며,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조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고 한다. 바꾸어 말해 ‘내’가 하는 ‘내’ 생각이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의 구조’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체계’가 하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걸 할 때에도 도구라는 게 필요한데, 사고체계란 생각할 때 사용하는 이 도구이다. 생각을 할 때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구성된 이 사고틀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는 이를 도구상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고체계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고체계란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기 위해, 세상에 한정되어 있는 여러 재료들을 이렇게 저렇게 조립하여 체계화시킨 도구셋트 같은 것이다. 이 사고의 도구셋트는 사회마다 고유한 형식이 있으며, 어느 정도 안정화되어 있다. 또한 사회마다 다른 이 사고체계는 절대 중립적이지도 않다. 사고체계란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는 그 사회만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옳다고도 할 수 없다.
나는 비를 내리게 하는 방법으로 비의 원리를 이용한 구름씨를 뿌리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이런 내 생각도 내가 속한 사회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고 보니 과학을 우상처럼 여기고 과학기술만이 지구와 인류를 구할 것처럼 달려드는 우리의 모습과 내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문명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과학이라는 틀로 세계를 본다. 우주가 유지되고 움직이는 방식은 과학으로 모두 증명되고 설명될 수 있으며, 우리가 당면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과학적 사고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절대적이라고 믿는 우리의 방법 또한 이 사회의 하나의 틀에 불과한 것이다.
객관적이라는 착각
과학이란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는 사고의 틀, 도구상자로 이상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사고체계는 그 틀 안에서 세계를 보게 한다는 점에서 객관적 사고란 없다. 과학 또한 현대의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일 뿐이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그는 우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고 믿는 과학적 사고체계가 세계를 부분적으로 사고하게 하며, 우리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던 주술과 제의의 토테미즘적 사고체계가 되레 세계를 우주적 차원에서 사고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야생의 사고』에서 그는 현대과학과 토테미즘을 사고체계의 두 양식으로 비교하며 설명한다. 과학적 사고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내 분류체계를 만들고자 한다. 과학의 분류체계는 개별의 사물들을 완전히 추상화시켜 개념으로 묶어내, 역사적인 시공간을 넘어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식물과 동물, 인간과 곰과 새와 같이 많은 존재들은 이러한 분류체계 속에 나눠지고 이는 시공간을 넘어서 적용될 수 있다. 이때 과학적 사고가 바라보는 세계는 정적인 모습으로 세계는 이 분류 안에서 고정되며, 인간은 그 바깥에서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는 자로 존재하게 된다.
야생의 사고는 사회의 오랜 관찰과 경험을 통해 도출된 사고체계로 그 사회에 내재한 시공간을 포함하고 있다. 야생의 분류체계는 치밀한 관찰을 통해 현실의 사물들을 축소해 기호화시키며, 이 기호를 통해 같은 것에는 차이를 입히고 다른 것에는 같은 성질을 입힌다. 실제로 그것이 같으냐 다르냐는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기호화는 아주 구체적인 것부터 보편적인 것까지 양극을 포괄하며, 인간도 나도 그 부분으로서 포함된다. 예를 들어, 오세지족은 동물이나 사물을 세 가지의 부류로 나누는데, 이들은 하늘(해, 별, 학, 밤, 성단星團 등)과 물(섭조개, 거북, 골풀의 일종인 Typha latifolia, 안개, 물고기 등)과 땅(백곰과 흑곰, 퓨마, 고슴도치, 사슴, 독수리 등)에 연관되어 있다. 그들의 분류체계에서 독수리는 번개와 연관이 있고, 번개는 불, 불은 석탄, 석탄은 땅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독수리는 ‘석탄의 지배자’의 하나로 육지의 동물이 된다. 그들은 기호화된 사고체계를 통해 불연속하는 세계를 연결하고, 자신은 그 전체의 그 부분으로 세계의 질서에 개입해 들어간다. 이때 야생의 사고가 바라보는 세계는 동적인 모습으로 계속해서 변화하며 나는 변화하는 그 세계의 부분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존재하게 된다.
우주에 어떻게 힘을 미칠 것인가
여기에서 다시 비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푸에블로 인디언 왈피족은 비가 필요한 때가 되면 제의를 지낸다. 그들에게 비를 부르는 번개는 뱀과 그 모습이 닮아 있기에 둘은 같은 기호로 묶여진다. 비를 부르는 제의에서 뱀은 그들만의 어떤 형식을 거쳐 신성화되어 비를 부르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들의 방식처럼 생각하게 되면 우주 만물과 자신의 자리를 우주적 차원에서 조정하게 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성스러워진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