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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마음 인류학 에세이]산책하다(최종)

작성자
강평
작성일
2024-12-23 22:18
조회
82

제다실(3)/강평/241221

 

산책하다

 

운칠기삼

나는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다.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의 사고가 근대의 산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나도 그 인간의 예외가 아님을 최근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는 멀리 있지 않았다. 나의 능력,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 때와 운이 있음을 모르는 것, 지금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런 사고이다. 얼마 전 건강검진 결과 당뇨, , 고지혈, 동맥 경화 모두 경계 수치가 나왔다. 건강뿐만 아니라 회사 생활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내가 쓴 보고서의 제출처인 금융기관으로부터 부적정 사유서 제출요청 공문이 왔다. 나는 20년 회사 생활에서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깜짝 놀랐다. 서면 질의에 대해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성실하게 답했다.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했는데, 추가 조사와 의견 제출이 진행 중이다. 누군가 작정하고 덤벼드는 타이밍이라면 방어는 힘에 부친다. 거의 한 달을 이 사건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허둥대다가 사고가 났다. 계단을 오르다 발이 꼬이며 무릎을 모서리에 찧어 부상을 입었다. 심리적 압박만으로 사고가 났다. 무릎 아픈 것보다 이만한 일로 휘청이는 나의 나약함이 더 아팠다. 지금껏 잘난 맛으로 살았다. 뜻대로 안 되는 일이 한꺼번에 밀려들고 있다.

이번에도 불안정해진 건강, 커리어의 안정을 되찾으려 바삐 움직였다. 이번만 넘어가면 안정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처럼 정상, 안정을 목표로 나아갔다. 하지만 웬일인지 해결되기는커녕 새로운 난제가 추가되고 있었다. 어쩌면 노력하면 안정될 수 있다는 목적지 설정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이번 인류학 시즌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을 읽었다. 애나 칭은 실업, 기후 같은 불안정이 체계의 예외가 아니라 조건이라면 어떨까? 질문한다. 나는 이 문장을 건강, 커리어의 문제가 일시적인 불안정이 아니라 항상적이라면 어떨까로 바꾸어 나에게 적용해 본다. 안정되고 고정되어야,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도 있다. 불안정한 세계는 타자들이 서로 의존하면서 만들어가는 중이기에 목적론이 없는 세계이다. 그런데 목적론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상징적으로, 물리적으로 넘어지고 나니 세상이 좀 달리 보인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나의 노력이 아니라 운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이번 무릎 부상 사건이 난 와중에 가뜩이나 바쁜데라는 말이 자동으로 새어 나왔다. 목적지만 바라보고 몸과 마음을 바쁘게 쓰다가 사고가 났는데, 쌓인 일을 못 하게 되었다는 푸념을 하게 된 셈이다. 쌓인 일이 말끔히 해결하는 날이 과연 있을까. 나는 지금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고, 관성적으로 사고하고 있었다. 애나 칭이 말한 산책을 생각해본다. 세계 끝의 버섯프롤로그는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찾는다.”로 시작한다. 그가 말하는 산책이란 특정 목적지 없이 모든 감각을 열고, 발걸음을 떼어 천천히 걷는 것이다. 불안정하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타자들이 만들어내는 세계, 무엇이 펼쳐질지 모를 세계를 주시하면서 말이다. 산책은 관성적인 사고를 멈추고 천천히 생각해 보는 일이다.

 

해서 뭐하냐는 말

산책은 해서 뭐하냐는 목적주의 반대편에 있다. 산책은 오감을 열고 무엇을 만나게 될지 정하지 않고, 목적 없이 길을 나서는 것이다. 독서 동아리를 아직도 나가느냐 나에게 묻는 직장 동료들이 많다. 나는 그냥이라고 답한다. 말은 그냥이라고 했지만 나는 공부를 하면서 실용이라는 목적에 익숙한 내 안의 사고와 자주 충돌했던 것 같다. 요새 번다한 일까지 겪게 되며 나는 새삼 묻는다. 나는 독서 동아리를 해서 뭘 하려고 가뜩이나 바쁘다면서 더 바쁘게 살까? 그간 나는 원시 부족, 고대 유물을 보며 나의 시선이 얼마나 갇혀 있는지 살펴보고, 내가 주로 갇힌 곳이 실용과 목적임을 느끼는 글을 썼다. 매번 사건의 배경,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매번 나는 놀랐던 것 같다. 마치 처음 마주하는 것처럼. 그 별것 아닌 일을 글로 풀어보느라 나름 괴롭기도, 즐겁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이쯤 시간이 지났으니 더 많이 알고,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더 많이’, ‘더 나은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한 사고이다. 전형적인 진보론적, 계몽주의적 사고이다.

내가 글로 써본 별것 아닌 일이란 익숙했던 생각에 왜?, 정말?이라고 질문하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이나 현대 원시부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조금 살펴보았다. 다른 시공간을 상상해 보고 감정이입을 해본다지만 결국 나의 시선으로만 볼 수밖에 없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또 시공간 여행을 하고 돌아와 내 시선의 한계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처음 공부할 때는 해서 뭐하냐는 질문에 답을 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해서 뭐하냐질문하는 세계는 목표를 향해 가느라 과정을 수단화할 우려, 결과에 따라 과정 전체를 무화시킬 우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니 이 세계의 더 큰 문제는 많은 경우 시작 자체를 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더 많이 아는 나, 더 나은 나가 된다든가, 책을 쓴다든가 하는 목표가 있었다면, 수행해야 할 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한 걸음도 떼지 못했을 것이다. 목적은 때론 시작할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시작도 하지 못하도록 사람을 질리게 한다. ‘더 나은 나를 떠올리는 것은 나의 방식이 그냥하고 있다는 공부와 충돌하고 있는 현장이다. 충돌은 익숙한 것에 질문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나의 직장 동료들이 독서 동아리를 왜 하냐고 다음번에 묻는다면 답할 것 같다. 사실 잘 모르는데, 뭐가 있나 궁금해서라고. 왜 하냐고 질문하는 사람은 고정된 목적지가 있는 세계를 사는 사람이다. 목적지 없이 산책을 나서는 사람은 왜 하냐는 질문을 왜 할까 생각해 보는 사람이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를 산다. 나는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가, 두 세계를 오가는 것일까.

 

익숙한 시선, 보이지 않는 장면

세미나 때면 나는 자주 책에 그런 장면이 있었나? 그런 의미였나? 묻는다. 그 장면, 의미가 나에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다. 사전 지식, 투입된 시간, 집중력의 부족, 그리고 시선의 한계 등이다. 나는 특히 줄거리, 주인공만 따라가는 시선의 한계로, 디테일을 다 놓치고는 한다. 중요한 것은 줄거리나 주인공이 아니라 디테일에 있는데도 말이다. 디테일은 고정된 배경, 휑한 여백을 채워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줄거리만 파악할 요량이라면 네이버 검색만으로 충분하다. 사소한 것은 없다. 사소하다고 여기는 나의 시선이 있을 뿐이다.

오선민 선생님의 신간 미야자키 하야오와 일상의 애니미즘을 읽고 내가 보지 못한 장면과 해석에, 여러 번 놀랐다. 예를 들어 <마녀 배달부 키키>는 내 기억에 키키가 언덕에 누워 라디오를 듣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선민 선생님은 그 언덕에 바람이 부는데 그때 만물이 어떻게 의존하는지 사운드를 말씀하신다. 사운드? 나도 이 영화는 여러 번, 집중해서 보느라고 봤다. 하지만 사운드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책을 읽고 키키의 언덕 장면부터 문제 풀이처럼 다시 봤다. 선생님의 설명대로 과연 하늘의 구름이 이동하고, 호수에는 잔물결이 만들어지고, 키키 주위의 꽃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흔들렸다. 풀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벌레 날갯짓 소리까지, 있었다. 내가 지나쳐버린 장면에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서로 의존하고 있었다. 서로의 움직임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변모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시작으로 키키는 우연히 기차를 타게 되고, 바다 마을에 가게 되고, 누군가를 만나고, 그 만남이 주인공을 변모시키는 유동적인 모습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오선민 선생님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영화를 더 많이 재생했더라도, 아마 내 눈에는 언덕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는 주인공 키키 외 다른 존재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으리라. 나의 눈에는 키키의 모험, 고군분투만 부각되고 나머지는 배경이었다. 횟수가 문제가 아니다. 나는 목적지에 이미 가 있는 시선, 디테일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선민 선생님의 신간이 나오고 얼마 뒤이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오선민 선생님의 동화 인류학적 해석 특강이 있었다. 특강을 듣고 나는 소설의 여러 장면을 책을 펼쳐 다시 읽어보았다. 이번에도 많은 장면을 지나쳐버리고 주인공, 줄거리 위주로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를 듣고 나서 마지막 연작 나무 불꽃의 화자인 인혜의 아들 지우가 비로소 보였다. 지우는 인혜 삶의 조건이자 인혜의 애정과 책임에 대한 자세를 보여주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내가 혼자 책을 읽었을 때 인혜는 고군분투하는 인물이었다. 많이 아픈 동생 영혜, 경악할 만한 남편, 돌봐야 할 아들, 꾸려가야 할 화장품 가게 모두 인혜의 버거운 미션처럼 느껴졌다. 1부 끝에 영혜가 자해할 때 아이들이 그 장면을 보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던 것도, 북새통이 된 장면에서 내가 놓쳐버린 장면이었다. 나는 만연한 가정 폭력이 익숙한 세계, 그래서 가정폭력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세계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선민 선생님의 해석이 정답은 아니다. 또 누구나 생각만 하면 선생님처럼 분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런 해석을 통해 나는 그간 갇힌 해석을 하고 있었다는 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오선민 선생님의 해석뿐만 아니라 세미나나 특강에 모인 사람들의 의견과 느낌을 듣다 보면, 우리가 정말 같은 영화, 책을 본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들을 때는 많은 선생님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해 내지 못했다. 작품 속 디테일을 놓쳤듯 현실 세계에서도 역시 주인공, 줄거리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정답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책을, 선생님의 해석을 정답처럼, 목적지처럼 생각했다는 것을, 이제야 뒤늦게 알게 되었다.

 

돌연한 출발

인류학 공부를 하면서 정답 찾기와 다른이야기, ‘다른시선 나누기를 같이 했던 것 같다. 정말 얼마나 내가 모르고 살았는가, 매번 거기서 거기인 생각을 하고, 멀리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 언저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생각했다. 별것 아닌 일, 별것 아닌 글을 통해서였다. 그러고 보면 별것 아닌 것이야말로 소중하다. 목적 없는 출발을 생각하다가 카프카의 단편 중 <돌연한 출발>을 찾아봤다. 작중 화자 는 멀리서 트럼펫 소리가 들리지만 하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다만 여기를 떠나는 것, 그것이 목적지라고 한다. ‘는 목적지도 모르고 예비 양식도 없이 여행을 떠난다. 두려우면, 연연해하면 떠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항상 출발은 준비된 출발이 아니라 돌연한 출발이다. 목적지에 무엇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 아니라 트럼펫 소리가 들리면, 떠나는 것 자체가 목적지가 되어 떠나는 것이다.

내가 최근 겪고 있는 일은 특별하지 않다. 정도의 차만 있을 뿐, 중년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고충 중 하나이다. 나는 이전과는 다른 풍랑 앞에 있는 느낌이다. 풍랑 자체의 크기가 아니라, 그런 느낌이 문제적이다. 이런 두려움은 내가 얼마나 무언가를 강하게 붙잡고 있는지, 무엇에 연연해하는지 보여준다. 내가 연연해하는 것에 과감하게 질문을 해봐야겠다. 나는 일상을 이어갈 것이다. 그 일상은 불안정하게 쿨렁이고, 나는 자주 관성적 사고와 충돌할 것이다. 어떤 만남이 이루어질지 궁금하다. 산책을 떠나야겠다. 트럼펫 소리가 들린다. 화요일은 인류학 공부를 하는 시간이다. 친구들을 만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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