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마음인류학 에세이](최종)_ 소유하다
<2024 인문세 학술제 에세이>
2024.12.23. 최수정
소유하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사회와 문화를 만든다. 마르셀 모스의 『몸 테크닉』에 의하면 문화는 인간의 총체적 신체와 같다. 한 사회의 행동 제약과 규칙뿐만 아니라 개인적이라고 생각했던 감정과 표정도 사회제도의 영향을 받는다. 하나의 문화에 속한 우리는 문화의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문화에 따라 사물을 각기 다른 양식으로 파악한다. 문화의 관점에 따라 사물과의 상관관계가 변하고 그에 따라 사고체계의 관념이 바뀌고 가치관도 달라진다.
내가 ‘소유’의 의미를 떠올릴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속한 사회의 사고체계에 따라 소유의 의미를 떠올린다. 나의 사회적 가치관에 따른 소유 개념은 개인적인 관계에서 물건을 갖는 것, 지배하는 일이다. 나는 그 이상의 의미는 떠올리지 못한다. 내가 ‘소유하다’는 개념으로 사고할 수 있는 범주는 이 사회의 경제 환경에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의하는 소유는 지극히 추상적이고 물질적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의미를 단순화하고 숨은 의미를 손쉽게 생략해 버린다.
그렇지만 정말 내가 무엇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할까? ‘나의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말 나에게 완전히 속하는 것일까? 어떤 사물을 내가 소유한다고 할 때는 사물을 갖는 주체라는 ‘나’가 있고, 나와 분리된 사물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분리가 전제된 관계에서 일어나는 거리감이 어느 한쪽의 지배적 소유를 가능하게 한다.
나의 이런 소유 개념과 다른 개념을 쓰는 사회공동체가 있다.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에 등장하는 트로브리안드인이다. 이들은 소유를 개인적, 물질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소유는 언제나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다. 한시적 소유는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를 만들며 돌고 돈다. 내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돌려주기 위해 경쟁을 하기도 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소유에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고체계가 작동한다. 한시적 소유로 소유에 의한 만족감은 누리되, 지속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는 절제가 담긴 것 같은 이들의 낯선 소유 감각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관계 속에 있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의 ‘쿨라’는 멜라네시아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부족 간에 광범위하게 행해지는 교환 체계이다. 그것은 커다란 권역 내에서 교역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많은 섬들의 공동체 사이에서 행해지는데, 이 교역의 고리는 외부세계에 개방되지 않는 닫혀 있는 고리다. 이 안에서 바이구아(vaygu′a, 보물)라 불리는 두 종류에 한정된 물건, 팔찌(므와리mwali)와 조개목걸이(소우라바soulava)가 각자 다른 방향의 원을 그리며 돌아다닌다. 팔찌(므와리mwali)는 서에서 동으로, 조개목걸이(소우라바soulava)는 동에서 서로 순환한다. ‘쿨라’의 뜻은 ‘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의 원에 휘말려서 그 원의 주변을 따라 규칙적인 운동을 계속한다. ‘쿨라’의 원 안에서 여러 섬은 ‘거대한 의례 교환의 원’으로 결합된다. 소유자가 바뀌며 원을 그리며 돌고 도는 그것이 한곳에 머무르는 일은 없다. 그리고 누구도 선물이 그리는 원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선물의 이동을 통제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나에게 돌아온다.
‘쿨라’는 지리적인 넓이의 측면에서, 또는 그 구성요소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극도로 거대하고 복잡한 제도다. ‘쿨라’는 수많은 부족들과 다양한 활동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상호 관여하도록 작용하여 결국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들은 쿨라에 대해 명료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고, 더 나아가서 그것의 사회적 기능과 함의도 모른다. 그들이 ‘쿨라’의 안에 있어, 밖에서 그것의 전체적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쿨라’는 이미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이나 인격의 일부가 됐다.
따라서 ‘쿨라’가 이동할 때 트로브리안드인의 어떤 것이 함께 이동한다. ‘쿨라’에 의해 동일하지만 방향이 반대인 두 가지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지고 상호 연결된다. 그래서 양방향으로 상호 의존 관계로 묶어 유대를 강화한다. 멈추지 않고 ‘쿨라’가 돌 때 원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강한 유대감으로 묶인다.
트로브리안드인들은 농작물이 잘되어 풍요가 넘치는 해에 ‘쿨라’원정을 떠난다. 먹을 것이 걱정 없게 됐을 때 그들이 부리는 사치는 축제를 벌여 친구를 초대하고, 멀리 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들에게 친구는 불확실한 삶의 보증 같은 것이다. 멀리 있는 친구는 언제 어느 때 맞닥뜨릴지 모를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예측 불가능한 변화의 순간은 선물을 주는 행위에 의해 보호받는다. 또한 이들은 개인의 탄생, 혼인, 죽음의 경우에도 쿨라 원정을 떠나는데 이것은 관계 변화에 대처하고, 결연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다. ‘쿨라’를 통해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사회적 관계의 연결과 재생을 반복하고 기억한다.
주기 위한 소유
‘쿨라’를 순환하는 바이구아(vaygu′a, 보물)는 자기 대신 멀리 바다 건너 보내는 인간의 대체물이자 신성물이다. 이 이중의 대체물에서 사람과 물건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인격을 가진 것처럼 공손하게 이름이 불린다. 또 언제, 누가 그것을 지녔는지, 어떻게 소유자가 바뀌고 변화했는지가 중요하다. 정말로 훌륭한 쿨라 물건은, 고유의 이름을 가지며, 그것을 둘러싼 원주민의 전설에는 일종의 역사와 내용이 담긴 이야기가 존재한다. 바이구아(vaygu′a, 보물)는 이처럼 단지 ‘소유하지 않기 위해 소유되는’ 신성한 상징물이다.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은 소유를 탐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그것을 나눠주면서 관대함의 느낌을 향유하기 위해서다. 만물이 자연의 풍요로움과 관대함에 신비로운 경외감을 드러내듯이, 풍요를 나눠주는 자신의 관대함에 남들이 감탄하는 모습에서 위신과 명예를 느낀다.
트로브리안드인들은 매우 복잡한 사회적·전통적 성격의 동기에 이끌려 일을 한다. 밭 작업을 인내와 목적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열심히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고, 잉여분은 다른 사람을 준다. 그 잉여에는 자연에 되돌려 주는 잉여도 포함되어 있다. 잉여를 생산하는 노동에는 많은 부분이 실용적인 생산보다 ‘심미적인 측면에 투입된다.’ 밭농사를 짓는데 실용적인 생산보다 밭을 꾸미는데 시간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다. 하지만 진정 그들이 신경 쓰는 시선은 자연이다. 수확물을 자연에 돌려주기 위해서 밭에서 그대로 썩히는 것을 보면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자연의 실체를 의식하고 있다. 풍성한 밭작물은 자연이 준 선물이고 그것에 대한 답례로 땅을 더욱 예쁘게 꾸며 자연을 기쁘게 한다.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자연처럼 많은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을 관대한 자로 여긴다. 그래서 관대한 그 사람에게 위세와 명예를 부여한다.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선물’이라는 형식을 반복하며 자연의 질서를 기억한다. 선물을 받기 위해 떠나는 ‘쿨라’ 여행은 타자를 향하는 여행이지만 그 또한 단단히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나와 네가 자기 자리에서 서로를 붙들고 있어야 서로를 살릴 수 있다는 감각을 기억하기 위한 의례 절차다. 팔찌와 조개 목걸이 중 하나를 받았으면 다른 것을 줘야 하기 때문에 주고받는 관계는 처음부터 서로를 향해 있다.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는 선이 만들어내는 의무감이 더 단단히 서로를 붙들게 만든다.
공동 관계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은 ‘사물’을 사물로 보지 않는다. 바이구아에 자신들의 영혼을 실어 자기 대신 친구에게 보낼 때, 그 팔찌와 목걸이에는 자기의 모든 사회적 관계(친족 관계, 권력 관계)를 함께 실어 넣는다. ‘쿨라’ 물품을 가능한 멀리 보내고 오랫동안 순환시키며 물건이 더욱더 긴 수명과 가치를 지니기를 바란다. 그로 인해 나의 사회적 명성이 점점 위대해지기를 기원한다.
인간은 살기 위해 사회를 생산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회를 재생산함으로써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물건 속에서 소유자와 함께 존재하는 것은 사회가 품고 있는 힘의 전체다. 물건을 움직이는 것, 이전 경로를 따라가게 하는 것, 떠났다가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은, 연대와 의존이 결합된 사회적 관계를 지속하려는 트로브리안드인들의 의지다.
‘쿨라’의 원 안에서 돌고 도는 선물에 실려 이동하는 것은 물질의 범주를 넘어 사회적, 심리적인 모든 것을 포함한다. 바이구아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사회적인 것이다. 트로브리안드는 특별한 사회 구조에 의해 작동한다. 사회적 관계를 작동시키는 특별한 사고체계가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인간의 자연화’를 말할 때 자연과 우주는 인간과 그 사회의 연장이었다.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 사회를 포괄하고 우주 전체와 연결된다. 인간은 자신 속에 사회와 우주 전체를 일정한 방식으로 담고 있다. 트로브리안드인들은 그들이 순환하는 자연의 한 구성원임을 사고하는 체계로 ‘쿨라’를 이용한다. 그들은 ‘쿨라’를 반복하며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우리가 자연에게 주는 답례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떠올린다. 바이구아의 순환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선물 교환 윤리를 상기한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트로브리안드인들은 나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실어서 보내는 물건을 나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는다. 내가 바이구아를 소유하고 있는지, 바이구아가 나를 소유하고 있는지, 그 사이에 끼어든 수많은 관계들이 나를 소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공동 관계로 서로 묶여서 의존하고 있는 하나의 존재다. 이런 사고체계 안에서 어떤 것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자연의 모든 존재가 빠져나올 수 없는 원 안의 주고받는 관계에 휘말려 서로를 단단히 붙들어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