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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마음 인류학 에세이] 성스러워지는 야생의 사고(최종)

작성자
진진
작성일
2024-12-23 23:01
조회
109

마음 인류학 에세이(최종) / 생각하다 / 2024.12.23. / 진진

 

성스러워지는 야생의 사고

 

우리는 매순간 무언가를 선택한다. 크고 작은 그 선택들로 인해 삶의 방향이 결정되고 희비가 엇갈린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후회가 없는 최선의 결정을 하기 위해,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기본이다. 이를 바탕으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인과를 따져 판단과 선택을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 과학은 내게 꼭 필요한 태도이자 학문으로 생각되었다. 이미 증명된 객관적 학문인 과학은 절대적 진리로, 이를 거스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다.

극심한 폭염과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구름씨를 뿌려 인공비를 내리게 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상공에서 구름씨를 뿌리면 비는 즉각적으로 만들어져 쏟아지고 가뭄으로 인한 문제는 해결된다. 이에 반해 과거 인류의 조상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지금도 무언가를 기원하며 제의를 지내거나 주술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과학적 원리에 입각해 접근하는 문명인의 입장에서, 주술이나 제의는 미개하게 여겨진다. 나 또한 야생의 사고(레비스트로스 지음, 안정남 옮김, 한길사)를 읽을 때까지, 제의와 비 사이에 어떤 명백한 인과가 없음에도 여기에 힘을 들이는 그들의 방법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비와 연관도 없는 주술에 지금까지도 의존하는 그들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며 경시했다.

마음 인류학에서 함께 읽었던 야생의 사고의 레비스트로스는 사회마다 고유한 사고 체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과학도 우리 시대 인식의 틀에 불과하다고 한다. 반면 우리가 미개하다고 무시하는 원주민들의 사고가 근대의 과학 못지않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사물과 존재를 포괄하여 자리매김하는 그들의 사고가 사려 깊다고까지 말한다. 나는 납득되지 않는 이 과제를, 야생의 사고의 생각한다를 통해 풀어가 보려고 한다.

 

내가 생각한다는 착각

생각은 내가한다. 내 마음(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생각한다는 나만 아는 지극히 사적인 부분이기에 나의것이라는 데 별 의심을 가져보지 못했다. 너무도 당연해서 연구해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조차 안 해봤다. 그런데, 마음 인류학 세미나에서 읽었던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생각이란 애초에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나의 생각이란 사회로부터 제약을 받으며,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바꾸어 말해 가 하는 생각이 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의 구조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 체계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할 때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고 도구를 사용한다. 이때 사용하는 도구가 사고 체계다. 생각을 할 때, 이런저런 조합으로 구성된 이 사고의 틀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는 이를 도구 상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고 체계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고 체계란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기 위해, 세상에 한정되어 있는 여러 재료들을 이렇게 저렇게 조립하여 체계화시킨 도구 세트 같은 것이다. 이 사고의 도구 세트는 사회마다 고유한 형식이 있으며, 어느 정도 안정화되어 있다. 또한 사회마다 다른 이 사고 체계는 절대 중립적이지도 않다.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는 사회의 고유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옳다고도 할 수 없다.

나는 비를 내리게 하는 방법으로, 비의 원리를 이용한 구름씨를 뿌리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이런 내 생각도 내가 속한 사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과학을 우상처럼 여기고 과학기술만이 지구와 인류를 구할 것처럼 달려드는 우리의 모습과 내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명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과학이라는 틀로 세계를 본다. 우주가 유지되고 움직이는 방식은 과학으로 모두 증명되고 설명될 수 있으며, 우리가 당면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과학적 사고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절대적이라고 믿는 우리의 방법 또한 이 사회의 하나의 틀에 불과한 것이다.

 

객관적이라는 착각

과학이란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는 사고의 틀, 도구 상자로, 이상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생각이 사회의 구조 안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라는 점에서 객관적 사고란 없다. 과학 또한 현대의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일 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고 믿는 과학적 사고 체계가 세계를 부분적으로 사고하게 하며, 우리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던 주술과 제의의 토테미즘적 사고(야생의 사고) 체계가 되레 세계를 우주적 차원에서 사고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야생의 사고에서 그는 현대과학과 토테미즘을 사고 체계의 두 양식으로 비교하며 설명한다. 과학적 사고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내는 분류 체계를 만든다. 과학의 분류 체계는 개별의 사물들을 완전히 추상화시켜 개념으로 묶어내, 역사적인 시공간을 넘어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식물, 동물, 인간, , 새와 같이 많은 존재들은 이러한 분류 체계 속에 나눠지고 이는 시공간을 넘어서 적용될 수 있다. 과학적 사고가 바라보는 세계는 정적인 모습으로 세계는 이 분류 안에서 고정된다. 인간은 그 바깥에서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는 자로 존재하게 된다.

야생의 사고는 사회의 오랜 관찰과 경험을 통해 도출된 사고 체계로 그 사회의 시공간을 포함하고 있다. 야생의 분류 체계는 치밀한 관찰을 통해 현실의 사물들을 축소해 기호화시키며, 기호를 통해 같은 것에는 차이를 입히고 다른 것에는 같은 성질을 입힌다. 실제로 그것이 같으냐 다르냐는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호화는 아주 구체적인 것부터 보편적인 것까지 양극을 포괄하며, 인간인 나도 그 부분으로서 포함된다. 예를 들어, 오세지족은 세계를 하늘, , 땅의 세 부류로 나누며, 모든 존재와 사물은 하늘(, , , , 성단星團 ), (섭조개, 거북, 골풀의 일종인 Typha latifolia, 안개, 물고기 등), (백곰과 흑곰, 퓨마, 고슴도치, 사슴, 독수리 등)과 같이 분류 체계 내에 위치한다(같은 책, 122). 부족 내 씨족의 토템 또한 이 분류 체계 안에서 작동하며, 아이들의 머리형도 이에 영향을 받는다(같은 책, 254). 그들은 기호화된 사고 체계를 이용해 불연속하는 세계를 연결하고, 자신은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세계의 질서에 개입해 들어간다. 야생의 사고가 바라보는 세계는 동적인 모습이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계의 부분인 나는 이 질서 안에서 연결되고 관계 맺으며 존재하게 된다.

 

우주에 어떻게 힘을 미칠 것인가

여기에서 다시 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푸에블로 인디언 왈피족은 비가 필요한 때가 되면 제의를 지낸다. 그들에게 비를 부르는 번개는 뱀과 그 모습이 닮아 있기에, 둘은 같은 기호로 묶인다. 비를 부르는 제의에서 뱀은 그들만의 형식을 거쳐 신성화되어 번개를 부른다. 뱀이 비와 연결되어 있지만 뱀이 곧 비를 내리게 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부족 내 전해지는 신화에 의해 만들어진 주술이나 제의를 통해, 비를 부르는 번개와 뱀 사이에 개입한다. 야생의 사고는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뱀과 비, 인간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사고한다. 이는 하나의 예일 뿐, 자연의 모든 존재는 그들의 사회 고유의 분류 체계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두고 자연을 도구로 사고한다고 한다.

그에 비해 과학에서 인간은 비를 내리게 하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한다. 비와 나 사이에 어떤 것들의 연결이 있는지, 그로 인해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지, 당면한 문제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들은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과학이 사용하는 개념자체가 시공간을 넘어 고도로 추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주 만물의 구체적인 연결을 보는 것 자체가 어렵다. 과학의 사고 체계가 인간을 오만하게 만든다. 레비스트로스는 원하는 결과를 즉각적으로 도출하지 못할지라도, 야생의 사고는 인간을 사려 깊게 만든다고 했다. 변화하는 주변의 상황과 때에 따라 달라지는 자리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하는 그들의 분류 체계가 사려 깊은 사람이 되게 한다고 말이다.

 

사려 깊은 사람 되기

세계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움직인다. 레비스트로스식으로 말하면, 세계는 그 사회가 세계를 구조화하는 방식대로 움직인다. 야생의 사고는 우주 전체의 질서를 모든 존재들의 연결 속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나는 그 안의 부분으로 만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주변의 일들을 우주 전체의 차원에서 생각을 해야 한다. 마치 복잡한 큐브처럼, 나의 작은 움직임이 옆의 자리에 영향을 미치고, 그 변형이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전체가 조정이 된다. 나로 인해 영향을 받는 수많은 존재들을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어느 사려 깊은 원주민은 말하길 모든 성스러운 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같은 책, 62). 우주 만물과 나 사이의 연결을 보려는 사려 깊음이 나를 제자리에 있게 하고 스스로를 성스럽게 한다. 주변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위해 두리번두리번 존재들에 호기심을 가지고 한번이라도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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