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수요종교인류학] 오리엔테이션 후기_ 성스러움으로 충만했던 시간
<수요종교인류학 오리엔테이션 후기>
성스러움으로 충만했던 시간
2025.2.5. 최수정
종교!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성스러움’, ‘영성’입니다. 2025 인문공간세종 ‘종교인류학’ 오리엔테이션이 오늘(2월 5일 수요일)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인류학’세미나 입문식을 치렀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희생제의를 치르듯, 야심차게 오늘의 성스러운 음식으로 선별된 깨끗하고 무구한 생크림 케이크 초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 성냥의 붉은 머리가 그어질 자리가 떨어져 나가고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 모두 함께 모아 뱉은 한 호흡의 숨으로 활활 타오를 불꽃을 꺼트리는 것이 마지막 의식이었는데…… 삶이란 언제나 예측불허입니다. 그러나 또한 불확실하고 애매한 순간에 자기만의 의미를 붙여가는 것이 삶입니다. 신성한 공부 공간인 베어하우스에 생생한 불꽃을 현현하지 못했지만 긴장하며 깊게 들이마셨던 숨이 조용히 내뱉어지던 순간 초를 꽂은 케이크에 성스러운 불꽃이 피워졌다고 믿고 맛있게 나눠 먹었습니다. 믿는 순간 그렇게 결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성스러움’이란 무엇일까요? 성스러움은 삶과 죽음에 대해 의식하면서 죽음을 초월하고 싶은 인간이 스스로 이 세계에 살아있음의 의미를 부여하고 실제 자기 삶을 살아가며 느끼는 경이로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성스러움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 세계를 구현하며 느끼는 내적 체험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자신의 내적 힘을 믿는 인간만이 경험하는 성스러운 체험! 언제부터 인간은 자신의 내적 힘을 인식하기 시작했을까요?
오늘 오리엔테이션에서 오선민 선생님께서 인문공간세종의 2025 종교인류학 전체 프로그램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종교인류학 프로그램을 넓게 보면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1부는 언뜻 보면 종교랑 별로 상관없어 보입니다. ‘종교인류학’ 첫 책인 스티븐 미슨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제목을 보고 놀라셨지요? 네안데르탈인이 노래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나요? 오선민 선생님은 오늘 오리엔테이션에서 이 책은 인류 의식의 초월적 분기의 시작을 보여준다고 하셨습니다. 두 발로 걷고, 손을 쓰고, 말을 하게 되는 인간의 물질적 신체조건 변화에서 인류의 의식 진화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책인 나카자와 신이치 『신의 발명』은 인류 의식의 초월에 대한 자세한 매커니즘을 밝히고 있다고 하셨지요. 네안데르탈인에서 호모사피엔스 인류로 발달하며 인간의 내부에서 어떻게 ‘성스러운’ 초월적 경험이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무척 궁금합니다.
2부는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세계 종교 사상사』1, 2를 읽게 됩니다. 수렵채집민의 종교에서 기독교까지 종교 사상의 발달사를 본다고 합니다. 종교가 어떻게 사회 시스템이 되었고, 어떤 물질적 조건과 정신적 조건에서 문화 형태가 되고 역사적 조건이 되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세계 종교 발달의 역사를 배운 뒤 3학기에 우리는 종교가 어떻게 현실적 일상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통로가 되고 있는지 탐구하게 됩니다. 종교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원리를 만들고 사회를 결속시키며 경제와도 연결되는지 들여다보며 종교와 현실의 깊은 연관성을 이해해 보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현실 속에서 성스러운 공간은 어디이며 그곳에 어떤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통해 발생되는 나의 일상 속 지복을 떠올리며 삶의 신성한 순간을 발견해 봅니다.
유신론자든 무신론자는 우리는 무의식 중에 내 힘의 한계를 느낄 때 신을 찾고 마음을 모아 ‘기도’를 합니다. ‘기도’는 내가 어쩌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나 밖의 힘에게 무언가 바라는 기원을 담고 있습니다. 오선민 선생님은 지금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셨는데요. 영성이 충만한 사람은 지금 나의 생각과 행위가 다가올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멀어져 나의 너머에 있는 힘을 의식할 줄 알고, 그 힘의 실재를 믿는 사람이 영성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인데요.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종교인류학’을 통해 그 길을 찾아 나서는 연습을 하면 언젠가 우리도 그 순간을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2025 종교인류학 세미나를 마치고 나면 어렴풋이라도 그 의미를 알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오선민 선생님은 인류학은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공부법이라고 하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하나의 세계를 각기 다른 관점으로 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다양한 관점을 위해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게 됐다는 것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금 관점의 다양성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잃어버린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되찾기 위한 공부가 필요한 것이지요.
저는 오늘 인문세 <종교인류학 오리엔테이션>에서 종교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스스로에게 ‘신’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질문해 보았습니다. ‘신’은 영성이 넘치는 성스러운 존재입니다. 오늘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신 오선민 선생님은 ‘영성’은 ‘나’를 기준으로 한 ‘너머’, 즉 ‘초월’의 느낌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기 ‘너머’의 무엇을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지금 여기의 자기뿐만 아니라 어제와 내일의 자기도 생각할 수 있고, 자신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너머’라고 하니 순간적으로 ‘너머’가 나의 외부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러나 마음을 갖게 된 호모사피엔스의 ‘너머’는 그의 ‘내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생각을 생각하는 ‘내면’이 곧 자기 안도 되고 바깥도 되면서 자기를 초월하게 된다고 할까요? ‘영성’이란 자기 내면과 외면이 하나가 되면서 끝없이 확장되는 자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지금 우리에게는 ‘종교인류학’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만난 선생님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지금 이것만이 전부일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도 자신을 이끄는 ‘영성’이라는 화두를 놓치지 않았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고 싶은 힘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종교인류학’세미나를 신청하신 선생님들은 무의식 중에 이 세계의 무수한 존재들과 연결된 힘을 느끼고 초월적 존재로서의 나의 들썩이는 마음의 요동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의 경이로움에 대해 함께 말하고 체험할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요?
자, 그래서 오선민 선생님은 ‘종교인류학’ 세미나에 작은 의미를 부여하는 성스러운 시간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1년 기한으로 세워진 인문세 종교인류학 교단의 교칙을 만들어 시행해 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인문공간세종 세미나 공간을 우리 ‘영성’을 키우는 신성한 성소라 생각하시고 첫째, 매주 성스러운 간식을 준비하기! 성스러운 의미는 각자가 부여합니다. 자기만의 의미가 들어가면 성스러워집니다. 둘째, 세미나에 오실 때 거울을 보고 자기 외면에 성스러움을 더할 복장이나 악세사리를 합니다. 나의 내면을 외부로 표현하는 옷과 장식이 ‘나’의 ‘영성’을 드러나게 합니다. 재밌겠지요? 저는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집에 오는 내내 다음 주에 어떤 성스러운 간식을 준비하고, 어떤 복장을 할까 고민하는 저를 발견하고 지하철에 서서 혼자 웃고 말았는데요. ‘종교인류학’을 공부하며 내 안의 ‘영성’을 발견하기 위해서 나와 나의 주변을 성스럽게 여기는 연습이 얼마나 저의 일상을 생기 넘치게 할지 벌써 기대됩니다.
사진도 참 좋고요. 너무 풍요로운 시간이었군요. 오티의 내용에 수정샘의 고민과 생각이 담뿍 담겨서 읽는 즐거움이 컸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초월’ 이란 단어가 제 구미를 당겼습니다. 영어로 ‘meta’라고도 하는데요. 그리스어에서 파생이 되었고, “사이에, 뒤에, 다음에, 넘어서”를 뜻합니다. 바둑에서 ‘초월’이라 함은 물아일체의 경지로 ‘에고’를 초월하고, 초 집중 ‘삼매’의 경지에 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매까지는 아니지만, 저는 바둑에 집중했을 때 핸드폰 소리를 못 들을 때가 종종 있어요. 즉 바둑판안에 벌어지는 온갖 변화무쌍한 음양의 문제를 풀기 위해 고도로 몰입하는 것이죠. 그 때 문득 어둠속에 해메다가 좋은 수를 찾을 때, 뭔가 ‘초월’의 미묘한 고양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즉 더 멀리보고, 깊이 사유하는 힘이 0.0000001mm 만큼 나아간 듯한 느낌이요.
바둑판 안에서 살펴보면, 1판이 끝나기 전까지 끝없이 ‘흑백의 경계’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데요. 즉 아직 확정되지 않는 영토인 ‘흑백의 경계’를 카오스(혼돈)라고 대입하면, 그 혼돈을 질서로 만드는 것이, 미확정 영토를 내 땅으로 만드는 것이죠. 그렇게 ‘흑백의 경계’에서 타자와 ‘수싸움’을 겨루다보면, 나의 잠재력을 초월하여 나의 독창적인 스토리가 탄생되는 것이죠. 그것을 ‘기보’라고 불리고요. ‘기보’가 완성되면, ‘복기’를 할 수 있느데 그 때 자신의 부족함을 깨우치면서,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발짝 나아갑니다.
그리고 혼돈에서 질서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흑백은 서로 계속 먹고 먹히기를 반복하는데요. 그러면서 묘한 균형과 순환의 질서가 탄생되죠. 이것을 인류학이라는 배경에서 좀 더 생동감있게, 다이나믹하게 알아가고 싶네요.
후기를 읽으며 내안의 영성에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수정샘! 고맙습니다^^
수정샘의 후기를 읽으니 ‘라이터를 켜라’가 생각나네요^^ 성스러운 장식과 복장도 기대가 됩니다.
해양인류학팀도 종교인류학에 밀리지 않게 힘차게 카누를 박자를 맞춰 저어가렵니다. 종교인류학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