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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세 번째 시간 후기_바둑으로 노래하라

작성자
이성근
작성일
2025-03-03 18:28
조회
56

바둑으로 노래하라!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은 음악대신 바둑을 하는 나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했다. 나는 왜 30년간 그 어려운 바둑을 질리지도 않고 두어왔을까? 끝없는 사하라 사막의 모래 알갱이보다 많은 경우의 수를 즐겼던 것인가. 상대의 생각을 읽는 것이 재미있었나. 맥닐은 함께 음악활동을 할 때, 자아의식이 약화되고, ‘경계 상실효과를 낳는다고 한다. 그래서 노래로 시작하는 일본의 공장노동자, 운동장에서 함께 뛰어노는 아이들도 이 과정을 경험하며 공통의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나 또한 그랬다. 방과 후 해가 질 때까지 엄마가 부르지 않으면, 정말 미친 듯이 친구들과 뛰어놀았다. 그렇다고 여자애들처럼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한 것은 아니다. 그저 함성을 외치고, 달리고 놀이에 집중했다. 그렇다! 여기서 음악은 악보와 가사와 멜로디가 있어서,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그런 좁은 개념의 음악이 아니다. 그저 함께 구호를 외치고 같은 행동을 으쌰으쌰 해도 음악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둑은?

바둑은 흑백이 땅을 서로 나누는 놀이이다. ‘땅을 넓힌다라는 공통된 목표 아래 자신과 타자가 말없이 서로의 생각을 깊숙이 읽는다. 이 과정에서 겨룸과 협력이 같이 수반된다. 마치 네안데르탈인이 섹스어필을 하며 경쟁하지만, 사냥할 때는 협력하는 것처럼. 바둑의 고수가 될수록 흑백의 땅 넓이는 서로 비슷해지고, 균형을 갖춘다. 노래에 능숙한 네안데르탈인은 더욱 소통이 잘하며 먹이를 균등하게 분배했을 것이다.

좀 더 바둑에 깊이 들어가다 보면, 바둑돌이 바둑판의 공간을 둘러싸는 과정에서, 리듬과 박자가 형성된다. 때론 전투적이고 날렵하게, 때론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돌이 움직인다. 그래서 바둑에서 를 읽을 때, 셈 수()가 아닌 손 수()를 쓴다. 상대 손의 움직임을 말없이 읽는 것이다. 그래서 바둑을 수담(手談)이라 부른다. 한자 그대로 손으로 대화하는 것이다. 서양인들도 영어로 번역할 때 수()‘move’로 명명했다. ‘움직임을 포착한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생각 중 최고라고 판단된 한 수가 손에서 꽃피워 바둑판에 안착한다. 바둑 역사상 5000년 이상 내려오면서 축적된 수많은 가능성을 종합해서, 한 수를 돌에 담아 바둑판에 놓는다. 그때 놀랍게도 그 돌에 감정이 실린다. 끈적끈적한 땀이 밴 돌은 고도의 긴장감을 나타내고, 묵직하고 둔탁한 착수 소리는 생존 전투에서 결연한 마음을 드러낸다.

바둑은 음양의 언어이자 생각을 돌로 표현하는 상징이다. 만약, 네안데르탈인이 언어/인지/자연/사회 각각의 분야를 연결해서 종합 판단하는 인지 유동성을 갖췄더라면, 바둑을 두며 두뇌를 발달시켰을 것이다. 동굴에 격자무늬의 바둑판을 그리고, 별들의 움직임을 표시하고, 사냥 전략을 표시하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전체 2

  • 2025-03-04 09:24

    끈적끈적한 바둑돌 한 수에 감정이 실리고 결연함이 전해진다는 것이 감동적입니다. 성근샘 저희에게 ‘그리운 어머니’ 노래를 불러주시고, 이성에게 불러주던 노래를 들려주세요. 아직 저희에게 바둑은 고도의 문자체계로 여겨지네요.
    댓글을 달다보니 종교인류학을 공부하는 것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 마음에 어떻게 가닿을 것인지 각자의 길을 모색해보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2025-03-05 13:55

    바둑을 시각적으로만 생각했는데, 리듬과 박자를 갖춘 소리를 놓치고 있었네요.
    바둑 돌을 나무 바닥에 땋! 청명한 소리. 어제 해양인류학에서 수학 시간 칠판에 딱딱딱딱 리듬을 갖춘 분필 소리를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바둑 돌과 수학 문제푸는 분필 소리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저도 읽었던 책인데. 네안데르탈인의 노래를 바둑, 해질 무렵, 영수야~~~다시다. 김혜자 선생님을 떠오르게 하는
    성근 선생님의 어린 시절 추억까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