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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3/5 세미나 후기 “호올”

작성자
coolyule
작성일
2025-03-11 11:04
조회
18

종교 인류학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15-17장 세미나 후기 2025-3-11 김유리

 

호올

3월 5일 세미나 후기

 

 

노트 필기를 보면서 기억을 조합해서 적었다. 이날은 선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스티븐 미슨(또는 마이든, Steven Mithen)이 음악, 언어, 마음, 몸의 기원에 대해 쓴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세미나 마지막 시간이었다. 달님은 다음의 주제들을 던지고 토론을 이끌었다.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주제를 다루는 세미나 특성상, 다뤄진 주제에 대한 ‘폴더’를 컴퓨터와 머릿속에 만들어놓고 계속해서 단서를 발견하고 연결하는 연구 과제로 삼는 구조가 아닌가 한다. 다소 불안증이 있는 나로서는 맞게 들었나? 기억이 맞나? 회의하면서 작업을 하게 된다. ‘줌회의’(zoom meeting)의 한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늙어서 그런 것이지도 모른다.

 

게임론

놀이는 비대칭을 맞추는 게임으로 발생했다. 놀이는 치우침을 조정하는 주고받음을 계속 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게임은 왜소하고 모욕 받은 쪽이 도전할 수 있게 해준다. 게임은 희소재를 두고 벌이는 승부가 아니라, 관계 조정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계속할 의사가 있으면, 싸워도 된다. 싸워서 이겨도 된다……. 최초의 대칭성 게임은 장례 때 죽음과 치르는 경기였다. 산 자들은 삶의 편에 서서 죽음과 게임을 벌임으로써 죽음과 대등해지고자 한다.

 

토테미즘

호모 사피엔스는 차이에 대한 센스가 있다. ‘나’ 이외의 모든 것은 나와 다르다는 뜻으로 ‘타자’들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타자를 ‘우리’로 종합하고자 한다.(‘너’를 지각 -> ‘나’를 확인 -> ‘우리’의 발명의 과정의 연쇄) 왜 종합하는가? 그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취약하기 때문이다. 혼자인 인간은 없다. 반드시, 관념으로라도 ‘우리’를 이룬다.

나와 나 이외의 것의 차이를 초월하는 종합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차이를 품은 종합이냐, 척도를 세우는 종합이냐의 갈래가 있다. 토테미즘은 차이를 보전하는 무문자 사회 구성 원리다. 문자와 국가가 들어오면 척도가 발생한다. 척도는 편중을 일으킨다.

토테미즘은 인간 부족을 동물과 같다고 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인데도 범고래일 수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함의를 갖는다. (1) 한 몸에 여러 정체성(사람이자 범고래)일 수 있다. (2) 사회 구성원은 변신을 요구받는다(범고래답다는 것의 체화). (3) 범고래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4) 구성원은 토템 부족으로서 한 집단으로 묶일 수 있고, 여러 토템 집단들은 차이나는 채로 공존할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조건에 대한 감수성을 발휘하여 정체성을 편집하는 데 능수능란하다.

언어는 분절된 단어들을 무한한 경우의 수로 조합한다. 언어는 차이나는 것들을 발견하고 종합하는 수단이다. 언어는 ‘우리’를 짜는 직조술이다. 조건에 따라 문화적 필요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생겨난다.

토템 부족의 추장은 공동체의 얼굴이다. 부족 공동체의 구성원을 모두 합친 것이 ‘얼굴’이다. 추장은 부족이 하는 모든 일을 다 잘 한다. 추장은 지식과 재능이 가장 뛰어나고 권위가 있다.

 

전일성

전일한 상태는 충만감을 준다. 전일성은 고양된 행복감을 동반한다. 언어는 차이(분리)를 감각하며 충만감을 주지 않는다.

 

신은 모든 타자의 종합이다. ‘나’와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신은 만물의 기원이다. 그렇다면 나의 기원인 신 안에서 나와 만물이 종합될 수 있다. (절대 타자와 같은 것일 수는 없으나 연결은 가능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타자를 인식하게 되면서 종합이 요구되었고, 신은 종합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서의 탄생한 개념이다. 신은 기원이므로 시간적으로 앞서지만, 종합의 결과이므로 사후적 구성물이 된다.(그렇다면 ‘영원’의 개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기술론

노동은 땅과 관계 맺는 기술이다. 땅, 하늘, 신과 관계 맺기 위해 노동한다. 모든 예술(?)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 나온다.

 

  전일함에 대한 개념적 확장은 이번 수업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남는다. 부분이 아닌 ‘전체’, 즉 ‘whole’에 대해 다루는 개념이므로 ‘wholism’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왜 ‘holism’이라고 쓰는 것일까?

holism은 전일함에 대한 이론(전체론 또는 그냥 홀리즘)을 뜻하는 명사다. 형용사형은 ‘holistic’(전체론적, 전일한)이고 속성을 강조해 명사 형태로 바꾸면 ‘holisticity’(전일성)이 된다. 그런데 이 단어의 접두사 ‘hol-’이 ‘holy’(신성한)의 것과 같다. 그렇다면 ‘전체’(whole)가 ‘신성함’(holiness)과 동의어란 말인가? holy는 신, 또는 종교와 관련 있는 것을 의미한다. 신과 관련된 것은 온전한 것일까? whole이 ‘비분리’ 상태이자 ‘부분보다 큰(greater)’ 고양된 상태라는 점에서 holiness과 유사성이 있다. 그런데 사전적으로도 유의어일까?

hol-이라는 접두어를 발음해본다. 입술이 동그랗게 오므라지고 혀가 내려가고 입천장이 올라가며 목구멍으로부터 바람소리 비슷한 깊은 숨이 불어 나온다. 호올-이라는 발음할 때 입은 동굴 입구가 되는 것 같다. 오-옴이라는 발음을 할 때와 비슷한 모양이다.

이번 책은 너무 재밌었다. 재미란 무엇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다른 단서들로 확장되어 가는 것이 재미있다. 재미란 확장 가능성 앞에서 느끼는 것인가? 공부하는 것뿐 아니라 음악에 몸을 맡기고 까마득히 먼 시공간을 상상하는 기간이었다. 춥고 잘 다치고 빨리 죽는 고달픈 삶 속에서도 전일한 충만감을 느낀 네안데르탈인을 가깝게 느끼게 된 것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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