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나의 순례기 쓰기] 글바다7 “내방신”, 내가 몰랐던 신성
수요종교인류학 글바다(‘내 안의 신을 찾아서’ 순례기 쓰기) 2025-4-4 김유리
주제문 : 내방신의 매력을 파헤친다.
취지 : 내가 몰랐던 신성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린다.
서론
나는 가면을 쓰고 가끔 방문하는 유형의 신에 대해서 쓸 것이다. 왜냐하면, 오십 년 넘게 유일신의 그늘에서 의심을 뜯어 먹으며 살던 한 마리 짐승에게 전율감을 선사하며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본론
여러 가지 신
나카자와 신이치의 『신의 발명』에 등장하는 신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 전지하고 전능하지만 인간끼리 알아서 하도록 두는 유일신이 계시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힌 채 우주를 완벽하게 창조한 후 ‘지켜보고 있다.’ 너희는 나의 피조물이니 나처럼 완전하라. 한편 엉성한 신도 있다. 할 줄 모르고 못 한다고 손사래 치는 까마귀라는 창조주다. 마지못해 어찌어찌 창조를 해나가지만 대체로 한 번에 되는 법도 없고 모양새도 보잘 것 없어 후손들의 웃음을 산다. 왜 이런 신화가 있나? 인간이 불완전하니 신도 불완전하고 창조도 불완전할 것이라는 논리다.
마음의 구조의 표현
나카자와 신이치에 의하면 신들은 마음의 구조를 표현한다고 한다. 저자는 라캉 정신분석학에 따라 마음의 구조는 언어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인지고고학자 스티븐 미슨과 같이, 저자는 언어의 구조가 유동적 지성이 작용하는 현생인류의 뇌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말을 할 줄 알게 된 호모 사피엔스의 마음의 구조가 심오하게 표현된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완벽하고 고지식한 유일신으로부터 세상을 웃게 만드는 까마귀 창조주까지를 포함하는 광활한 “마음의 들판”(233쪽)에서 여러 가지 신들이 배태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고를 조직하는 종교, 종교를 낳는 사고
여러 가지 신들은 여러 가지 사고 방식을 표현한다. 유일신적 사고는 마음의 내부를 ‘비대칭성의 원리’에 입각해 재조직한다(205). 우리 마음을 단 하나의 척도에 따라 지어진 구조물로 건축한다. 이 건축물의 바깥은 건물 구조에 작용하지 못한다. 안과 밖이 분리된다. 인간은 ‘나’라는 말을 뱉기 시작한다. ‘나’,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 중에 가장 특별하다! ‘나’, 우리의 사고는 다른 모든 인간의 사고 중에 가장 가치 있고 올바르다! 이런 과대망상 자아상의 거울상도 있다. ‘나’는 언제나 부족하고 모자라고 미치지 못한다! 자아의 팽창이든 자아의 수축이든 단일한 척도를 숭배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유일신교도들이다. 이들은 자기 척도에 따라 세계를 개조하려 든다.
이에 비해, 짐짓 모른 척하면서 슬그머니 들어와 있는 다른 원리들이 있다. 다르다는 것 자체가 척도의 중심성을 파괴하므로 이것을 대칭성의 원리에 입각한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스펙타클 영화 세트장에 뭣 모르고 들어서서 어리둥절하며 걸어 다니는 시골뜨기 관광객 같은 신이다. 이 사람의 방문으로 전체 촬영은 일시 중단된다. 우주는 완벽해, 완벽한 건 내 연필, 연필은 그려, 그리는 건 네모, 네모는 문, 문은 열어, 열린 것은 통해, 통하는 건 바람 하면서 얼토당토 않게 통로를 열고 들어 온 ‘내방객’ 같은 신이 있다. 그런 것이 신이치가 말하는 다신교 우주의 내방신 모델이다. 이러한 내방신적 사고를 우리는 20만 년 전부터 내장하고 있다.
우리는 척도 바깥을 사고하기를 좋아한다. 서구는 동양을, 제국주의 유럽 청년들은 야생을, 남자는 여자를, 미국인은 외계를, 일본인은 환타지를 사고하기를 좋아한다. 바깥을 사고하려는 충동은 구조 내부에 있는 인간의 본성이다. 구조를 창조해 생존 기회를 높이는 것도 인간의 마음이 하는 일이고, 그 구조로 인해 시야가 좁아지고 사고가 경색되는 것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구조 안에서 구조 밖을 사고하는 것은 관계적이고 대칭적인 오래된 ‘야생의 사고’다.
마음의 구조물 안에서 배회하다
현대 한국에 개신교가 판을 치는 역사적 이유가 있을 것이나 이에 대해 잘 모른 채 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는 평생을 유일신교라는 구조물의 복도를 배회하며 지냈다. 교회에 나가지 않은 지 30년이 넘었지만, 기성의 마음의 구조, 즉 ‘패턴’을 부수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교회 다니던 80년대를 지나, 90년대 초 대중문화의 세례 속에서 나는 일종의 중독의 길로 기울었다고 생각한다. (‘중독’과 마음의 경색에 대해서는 생략)
그때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러 다녔는데, 그중에서 [트루먼쇼]를 본 것이 가장 이상한 경험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세트장에서 인생을 시작해서 어른이 된 트루먼이 어느 날 집에서 뛰쳐나간다. 먼 바다로 쪽배를 타고 나가 풍랑에 휘말려 표류하다가 쿵 하고 세상의 끝에 부딪치는 장면이 나온다. 세계의 끝은 구조물의 벽이었다. 트루먼은 하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피디의 음성을 들은 체도 않고 벽을 더듬어 작은 문 하나를 찾아내더니 열고 나가 버렸다. 그 장면을 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이처럼 헐떡이며 울었는데 그러면서도 참 엉뚱한 눈물 포인트다 싶었다. 당시엔 생각을 밀고 나가지 못했지만, 지금 이 글의 맥락에 이어 붙이자면, 그건 청년 백수의 마음에 다가온 대칭성 원리의 방문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온통 벽인 곳에 나타난 문의 이미지만으로 균열이 창조되고 누출(눈물 분출)이 발생한다는 것인가?
유일신은 구조물 내부에 머물라고 지시하고, 밖에서 온 신들은 나를 한 번씩 데리고 나가는 존재들이다. 대칭성의 원리에 따르면, 마음이 지은 구조물이란 것은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하는 상자일 때도 있고, 다녀올 때까지 비워두는 장소일 때도 있다.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다녀올 수 있을까? 하나의 유일신을 다른 유일신으로 대체하는 것 말고, 더 밀고 나갈 수 있을까?
다신교적 사고
나카자와 신이치는 지극히 높은 신과 가끔 내방하는 신이라는 두 가지 신의 유형을 소개한다. 우리가 아는 유일신 종교들은 내방신을 억압하고 지고신을 유일한 신으로 세운 것이다. 지고신은 내방신과 함께라야 전체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일신과는 다르게 다신교 우주를 구성한다. 지고신은 이 땅에 빛으로 강림하여 언제까지나 상주하는 신 유형이다. 우리 삶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도록 모든 것에 내재하고 빠짐없이 살리려는 무형의 ‘위대한 영’이다. 이 신이 상주하는 것으로 우리는 사회 속에서 대대로 훌륭한 인간으로 살아나간다.
이것으로 충분할 것 같지만, 마음의 들판은 더 광활하다. 마음은 다신교 우주 안에 지고신과 내방신 유형을 공존하게 한다. 우리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이곳으로, 때가 되면 머나먼 곳에서 기괴한 가면을 쓰고 식물의 잎으로 온몸을 두른 신들이 몰려온다. 이곳이 전부가 아니고, 바깥이 있음을 알리는 존재들이다. 이 신들은 죽음, 번식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죽은 자들은 어디로 가며, 아기들은 어디서 오는가?) 이 신들은 더럽고 냄새나고 폭력적이고 괴성을 지르고 몸을 떤다. 사람들은 꿈인지 생시인지 얼떨떨하게 신을 맞이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땀 흘리고 춤추고 불빛이 어른거리는 속에 격렬한 집단적 감정에 휩싸인다. 내방신은 일상과 질서라는 지고신의 구조 바깥과의 통로 그 자체가 된다.
아기 예수들
나카자와 신이치는 지고신과 내방신이 다신교적 전체 우주를 이룬다고 말한다. 마음은 다신교적 구조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일신교적 구조로 흐르는 것도 마음의 충동이지만, 저변에서는 다신교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고 틈만 나면 상기시키려고 한다. 인간은 관계적 사고를 하려고 한다. 유일신을 모르던, 모든 것을 관계적으로만 조율하던 인류 마음의 어린 시절이 현대인의 어른 마음, 협착된 마음으로 뚫고 들어올 때가 있다. 그 순간을 잉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금은 유일신적 사고가 지배하는 시대다. 그럼에도, 다신교적 사고로부터 혜성처럼 유일신적 질서를 뚫고 잉태되어 아기들이 새로 태어나는 세계가 발견될 수 있을까? 『신의 발명』이 종장에서 기다리는 세계는, 항상 생성하는 창조적 원리일 대칭적 사고가 작용하는 세계라고 생각된다. 성스러운 아버지 혼자 전체이고자 했던 종교 안에 마리아 홀로 허락되어 아기 예수 세상이 생성된 것도 대칭성 사고의 발명품이다. 어쩐지 마리아는 계속해서 기적과 신화를 발생시키는 통로 역할을 해오고 있는 것 같다. 유일신을 다른 유일신으로 대체하는 방식이 아닌, 지고신과 내방신을 두루 갖춘 다신교적 전체성에 대한 관념 하나를 발견한 것도, 극장 안에서 눈물 터진 청년의 마음이 잉태한 기적이다. 중노년의 뇌이지만, 까먹지 않고 싶다!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