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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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평양의 항해자들](2)_6장 카누의 진수와 의례적 방문
『서태평양의 항해자들』(2) 6장 카누의 진수와 의례적 방문
관습과 전통에 대한 자발적 복종
백인 유럽인들이 원주민을 게으르고 나태하다고 보거나 그들의 노동 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는 오만은 지극히 자신들의 노동과 자본 관점을 ‘중심’에 두고, 즉 인간은 ‘이득(gain)’을 위해 노동을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사고방식을 노동에 적용시켜, 급여를 충분히 주면 그에 비례해 원주민들이 당연히 노동할 것이라 여긴다. 그런데 분명 이득이 보임에도 움직이지 않는 원주민을 위와 같이 가치 절하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인의 관점을 벗어나 원주민 그 자체의 관점에서 보면 원주민은 부족의 관습이 정한 의무에 의해 또는 관습과 전통에 의해 지배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일한다. 저자 브로니스라브는 사실 원주민들은 ‘쉬지 않고 정력적으로 숙련된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조건 역시 조직된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있다’(224)고 말하며, 백인들이 오해하듯, 개인들이 개별적으로 식량을 찾아 나서거나, 기껏해야 고립된 가족 경계 단계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반박하며, 이들의 집단, 사회 단위의 ‘조직력’, ‘조직된 노동’을 강조한다.
카누는 제작하는 과정이 보여주듯이, 그 과정에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하고 개개인은 특정 임무를 나누어 수행하는 등 하나의 목적을 위해 구성원 모두가 조직적으로 힘을 합친다. 그리고 개개인 각각의 특정 임무는 사회학적 배경의 차이를 보이는데, 누군가는 자기 자신의 카누를 소유하기 위해 일을 하고, 또 누군가는 임금을 위해 일하는가 하면, 추장에게 봉사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노동이 하나의 목적을 향한다는 것인데, 즉 ‘추장이나 우두머리가 카누의 소유자라는 칭호를 갖도록 하는 대신, 추장은 그 카누를 전체 공동체가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225)이다.
그리고 이 공동작업이자 분업 작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 공동체를 지탱하는 사회적 장치(social apparatus), 사회적 기제(social mechanism)가 있어야 한다. 우선 추장이 있어야 하고, 추장은 공적 권리와 특권을 가지고 공동체 부의 일부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기술적인 작업을 조직하고 지도할 수 있을 만큼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조건을 보다 깊은 곳에서 지탱하는 진짜 힘은 ‘관습과 전통에 대한 복종’이다. ‘원주민사회에서 명령은 일상생활에서 모두가 따르고 지키는 관습, 규칙, 법의 직접적인 힘에 의해 수행된다.’(226) 말하자면 원주민사회의 진짜 권력은 추장이 아니라 ‘전통’이다. 추장은 그저 이 권력으로서의 전통이 작용하는 기제일 뿐이다. 그리고 이 권력이 추상적 상태로, 또 물리적 외압에 의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힘으로 작용하며 자발적으로 원주민을 움직이게 한다.
가치로서의 ‘부(富)’
저자는 6장에서 쿨라 외에 트로브리안드 섬에서의 물물교환 방식을 추가로 언급하며, 우리가 원시인들의 경제관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통념, 즉 원주민은 단지 초보적 형태의 교역만 하고, 교역이나 교환이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돌발적으로 필요한 때만 드물게 행해질 것이라는 통념, 또 내 것과 남의 것의 구별이 분명치 않다거나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행동들만 있을 것이라는 통념 등이다.
그리고 이런 통념들은 몇 가진 틀린 가설에 기반하고 있는데, 하나는 ‘미개인의 재화에 대한 관계는 전적으로 순수하게 합리적이기에, 결과적으로 그의 생활 조건 하에서는 부나 가치의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241)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누구나 자신의 근면성과 기술을 가지고 양 또는 질의 측면에서 가치 있는 재화를 생산해낼 수 있다면, 교환의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241)는 것이다.
먼저, ‘얌’과 같은 단순 식료품만 봐도 우리의 예상과 달리 이들은 이것을 단지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좋아하기 때문에 또 축적된 만큼의 부로 사회적 특권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축적한다. 이 음식 저장이 단순 생명 유지 활동이 아님을 보여주는 또 다른 경우는 ‘비라말야(vilamalya)’라고 부르는 주술이다. 이 주술을 통해 사람들은 마을에 음식이 넘쳐나고 그것이 오래 남는 것을 보장해 준다고 믿는다. 이 주술은 마을 주민들은 얌을 먹고자 하는 식욕을 감소시켜, 결과적으로 창고에 저장된 얌의 절반가량은 썩어서 버리게 만든다. 그러면 저장 창고에는 다음 수확을 위한 빈 공간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주술만 보아도 음식 저장이 음식이라는 부(富)를 과시, 전시를 위한 목적이었음을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 오죽하면 이들의 잔치에서 “우리는 먹을 것이다. 토할 때까지 먹을 것이다.”라는 문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을까. 이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즐거움과 함께 창고에 저장된 얌이 섞어 가는 것을 생각하면 느끼는 쾌감을 표현하는 말이다. 사실 음식물의 참된 가치는 이 같은 쾌감, 즐거움, 감정에 있다. 쌓아둔 풍족한 음식물을 이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저자는 인간의 가치란 ‘인간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사물에 대한 감성적인 생각이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되면서 만들어 낸 결과물‘(245)이라고 말한다.
브로니스라브는 이어 인간이 근면과 기술을 통해 양과 질의 형태로 표현되는 가치 있는 물건을 생산할 수 있다면 교환의 필요성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반박한다. 그러나 원주민의 물질 이용과 심리학의 기본적 사실만 봐도 금방 이해가 되는데, 이들을 ‘주고받음’ 그 자체를 좋아하며, 또 소유하고 있는 부(富)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함으로써 부의 소유를 즐긴다. 남에게 주려는 생각을 늘 사면서, 오히려 남에게 주기 위해 내 것과 남의 것의 구분을 더 선명히 한다. 왜냐면 증여물은 아무렇게나 함부로 주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격식을 갖추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증여물들은 실리가 증대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득(gain)’과 무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