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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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평양의 항해자들](2) 후기- 어째서 묻따말 쿨라
“쿨라Kula란 부족 간에 광범위하게 행해지는 교환의 한 형식이다. 그것은 커다란 권역 내에서 교역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많은 섬들의 공동체 사이에서 행해지는데, 이 교역의 고리는 외부세계에 개방되지 않는 닫혀있는 고리이다. 이 고리는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뉴기니 동단의 북쪽 및 동쪽에 있는 여러 섬을 연결한 선으로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두 종류의 한정된 물건이 항상 반대 방향으로 돌고 돈다.”(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 최협 옮김 『서태평양의 항해자들』(민속원), 122쪽)
맛심족 원주민들은 쿨라 교환에서 조개 팔찌와 조개 목걸이를 주고받는다. 이때 일상적인 교역을 병행하는데 수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물건들을 섬에서 섬으로 운반해 물물교환을 한다고 한다. 이 교환 활동이 원주민들에게는 아주 중요해 보였다. 카누의 건조, 대규모의 장례식, 금기 등이 쿨라와 연결되어 있고 또, 수많은 부족들이 함께 엮여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지점은 하나의 유기적 전체(one organic whole)를 만드는 쿨라에 대해 정작 원주민들은 규칙 정도를 알고 있을 뿐, 전체적인 제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의 의미나 사회적 기능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쿨라를 할 때 전통적인 법에 의해 뒷받침되고 주술적 의례를 행하는데도 어째서 원주민들은 그들 삶의 중요한 부분인 쿨라의 의미나 기능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무얼 하는데 있어서 목적이나 방향성이 있어야 할 것 같고, 내가 어떤 의미를 갖고 행동하는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원주민들은 자기가 뭘 하는지 그 의미도 모르고 로봇처럼 남들 하는대로 따라한다는 의미일까. 좀 미묘한데, 그들이 뭘 모르고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안다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중요하다는 전통적인 수행이 의무처럼 믿음처럼 각인된 것일까? 오늘 세미나에서 오선민 선생님은 우리가 인문세에서 활동하는 한 우리 스스로를 보기가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의 관점의 한계 때문에 우리가 우리 밖으로 나가서 본다는 것은 어렵다는 의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섬원주민들에게 쿨라는 그 전체를 떠올리지 않고도, 너무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이 되었을 정도로 다같이 먹고 살기 위한 일종의 룰 같은 것인가보다. 원주민들에게는 말그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쿨라. 그런데 관점의 한계가 있다면 어떻게 밖에서 안을, 안에서 바깥을 볼 수 있었을까? 그런 시도는 했을까? 그것은 다음 세미나에서 알아보겠다.
“쿨라는 반드시 필요에 의해 행하지는 않는다. 쿨라는 순수 장식용으로 만들어졌고 일상의 장식으로는 사용되지 않는 두 개의 물건을 끝없이 되풀이해서 교환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개의 의미 없고 쓸모없는 물건을 계속해서 교환하는 것이 부족 간에 있어서 큰 제도의 토대가 되고 다른 많은 활동을 수반하여 행하도록 한다. 신화, 주술, 전통은 쿨라를 중심으로 일정한 의식, 의례의 모든 형식을 구축했으며, 그것들을 통해 원주민들의 생활 자체를 지배했다.”(안보나 선생님 발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