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해양생물 답사기] 독성을 품은 삶
독성을 품은 삶
2025. 03. 12.(수)
유현지
헬렌 체르스키의 <블루 머신(Blue Machine)>은 해양 생태계가 얼마나 정교한 시스템인지 이야기한다. 마치 기계(Machine)처럼 수온, 염분, 밀도, 회전이 얽히고설켜 다양한 해양 환경을 만들고, 그 안에서 생명체들은 제각기 진화하며 생명을 꽃피웠다. 헬렌 체르스키는 바다를 세 존재로 분류해 설명한다. 전달자와 표류자, 그리고 항해자다. 우선 전달자에는 빛과 소리가 있는데, 바다에서 빛은 영 맥을 못 추리고 사라지는 대신 소리가 장거리 통신망 역할을 톡톡히 한다. 표류자는 바닷물에 몸을 싣고 이리저리 떠다니는 원자나 플랑크톤으로, 전달자와 표류자 모두 바다의 내부 구조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마지막으로 항해자는 바다를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대표적으로는 인간이 있다.
표류자, 전달자, 항해자라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인문공간 세종’의 답사에 참여했다. 첫 참여를 용감하게도 답사로 시작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배짱이 두둑했다. 만약 20대 초였다면, 아마 안전한 독서모임 정도로 시작해서 차근차근 안면을 텄을 것이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난 내 안의 담대함을 길러나갔다. 그건 초등학교 교사라는 안전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야생에서 고군분투하는 내가 길러낸, 일종의 독성(毒性)이다. 독성은 야생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인 방어기제, 즉 야생성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국립생태원>과 <국립 해양 생물자원관>에서 많은 생물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그중에서도 ‘독화살 개구리’를 곱씹어본다. 한 문장 덕분이었다. “독화살 개구리는 인공 증식하면 독이 없다.”
아마존의 원주민들은 독화살 개구리를 활용해 화살촉에 독을 묻혀 사용하곤 했다. 그래서 독화살 개구리의 이름에 ‘독화살’이 붙게 된 것이다. 독화살이라니, 내게는 꽤나 깜찍한 이름처럼 느껴졌지만, 이 작은 친구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야생에서 독화살 개구리는 피부에서 알칼로이드 독(Alkaloid toxins)을 분비하도록 진화했다. 위협을 느끼면 피부에서 강한 독을 내뿜어 자신을 먹으려는 상대의 중추 신경계를 마비시킨다. EBS 다큐멘터리를 보니, 이 개구리가 자신을 삼켜버리려는 뱀의 입 안을 마비시키고 유유히 빠져나오는 모습이 있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독화살 개구리가 인공 증식하면 독이 없다고? 정말 흥미로웠다. 더 알아보니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독화살 개구리는 자체적으로 독을 생성하지도 않고 독을 갖고 태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독을 갖게 되었을까? 이들은 독을 가진 개미나 진드기 등 곤충을 먹어서 독성 물질을 몸에 축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의해 인공 증식된 독화살 개구리는 이름과는 무색하게도 완전히 무독성으로 자란다. 이들은 야생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독이 다시 생기지 않는다.
독 없이 길러지는 독화살 개구리는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잃게 된다. 천적이 없는 안전한 곳에서 증식하면, 역설적이게도 안전을 잃게 되는 것이다. 헬렌 체르스키는 <블루 머신>에서 스코틀랜드의 ‘청어 소녀’를 소개한다. 1800년대 후반, 여성들은 가정에 종속된 채 마을, 부모, 남편을 위해 살아야 했다. 하지만 대서양 청어 무역에 여성의 일손이 필요했고, 이들은 청어의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에 절여 포장하는 일을 맡았다. 야생으로 뛰쳐나온 덕분에 ‘청어 소녀’들은 직접 돈을 벌었고, 전국 항구를 돌아다니며 모험을 떠날 수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기존 시스템에 적응하며 독성을 기른, 통쾌한 ‘항해자’가 아닐까?
나는 야생에서 내 독성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가? 나의 20대는 끊임없이 야생으로 돌아가기 위한 분투였으며, 항해자로서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길 지독히 바랐다. 여자로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아빠는 내가 부산에서 교대를 가지 않으면, 학비는 물론 생활비와 그 무엇도 지원해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난 꽤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집을 벗어나 살아갈 용기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종교를 강요당하면서 무력감이 깊이 새겨졌다. 결국 방황한 끝에 임용고시에 합격했고, 임용을 몰래 경기도로 치고 나서 독립하게 되었다. 독립과 함께 억지로 다니던 교회도 안녕이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난 조금씩 독성을 홀로 길러가고 있다. 내 삶은 비록 인공 증식되었지만, 다시 독성을 되찾기 위한 발버둥 정도는 허용되리라.
뱀의 입 안에서 벗어난 독화살 개구리는 어떻게 될까? 물렁하고 연약한 몸은 뱀의 입 아귀힘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다. 비틀대던 독화살 개구리는 배를 까뒤집고 죽지만, 이 죽음은 전체 종을 살리는 죽음이 된다. 쓴맛을 단단히 봤던 뱀은 ‘이 작고 조그만 빨간 점액질’은 삼키면 안 된다는 걸 학습한다. 그 결과, 바로 코앞에서 독화살 개구리가 돌아다녀도 무시하는 경지에 이른다. 누군가의 야생성이 다른 누군가를 살리는 셈이다.
내가 살아남은 방식도 비슷하지 않을까? 안정적인 직장 밖에서 살아가는 이들, 부모의 기대를 벗어던진 채 자신의 길을 걷는 이들, 공부로 공동체를 이루고 작은 실험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 이들의 배짱을 보며 난 점차 야생성을 회복했다. 내게도 독성이 있다고, 물렁한 몸으로도 본때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비록 야생에서 어떤 뱀에게 물린다고 해도, 나를 보며 누군가는 또 야생으로 뛰쳐나오지 않을까? 어떤 인생은 그것만으로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 ‘인문공간 세종’에서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 모든 ‘청어 소녀’들과 함께 야생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