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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 인류학


[인류의 대항해](1) 3~4장 발제

작성자
보나
작성일
2025-03-17 17:50
조회
38

고대 항해자들은 어떻게 대양의 비밀을 풀었나?

 

바다,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

인류의 대항해는 대양 항해를 개척한 인류 사회를 살펴보며 고대의 항해자들이 어떻게 바다와 동반자로서 살아왔는지, 바다가 어떻게 인간 사회의 일부가 되었는지 설명한다. 5만 년 전에 동남아시아 본토 사람들은 노를 젓거나 돛을 이용해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여 뉴기니와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진출했다. 그들의 후손은 3만 년 전에 태평양 남서부의 비스마르크 해협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기원전 8000년에 사람들은 에게 해를 종횡무진하기도 했다. 인류는 수천 년에 걸쳐 바다와 다양한 관계를 발전시켜왔다. 바다는 뱃사람들의 끊임없는 관찰과 점진적 침투, 기억을 통해 터득해 가면서 서서히 인간의 환경이 되었다. 바다가 인간의 환경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고대 항해자들과 바다의 친밀한 관계, 태평양과 지구상에서 가장 외진 섬들을 식민화한 여정을 살펴보며 그 의미를 생각해보자.

 

고대 항해자들과 바다의 관계

고대 항해자들은 노와 돛만 가지고 바다에 의지해 살아왔다. 그들은 바다 위에 솟아 있는 바위를 보고 밀물과 썰물을 판단했고 거칠어진 뺨의 느낌으로 바람을 짐작했으며, 해저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무엇보다 바다와 바다의 분위기에 대한 감각, 조심성과 존경심이 뒤섞인 채로 바다를 보는 방식을 배웠다. 저자에 의하면 물에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항해란 바다의 리듬에 적응하고 눈에 띄지 않는 신호들을 읽어 내는 것이자 대양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는 삶의 연장일 뿐이었다. 항해 기술의 발달로 유조선이나 모터 보트는 이동하고자 하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의 거리와 방향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지만, 기술에만 의존하며 바다와의 친밀감을 잃었다.

친밀감을 잃은 관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증기 기관과 디젤, GPS가 등장하기 전에 물의 공간은 바다에서 삶을 보낸 사람들의 성격을 규정했다. 바닷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다가 어떤 것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일평생 바다 쪽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들에게 바다는 인간에게 깊은 경외감을 주고 변화무쌍한 바다의 변덕을 결코 제어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불러일으켰다. 고대 항해자들에게 바다는 때로는 신뢰를 때로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주는 동반자, 친구이자 적, 생계 수단이자 묘지였다.

뱃사람과 바다는 부서지는 파도의 분위기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조심스러운 관계이기도 했다. 분위기에 따라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관계란 인간과 바다가 서로가 살아가는 환경이 되어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격을 규정하는 사이를 의미한다. 서로가 때로는 경외감을 때로는 두려움을 주는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미지의 대상을 결코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없다는 깨달음은 우리에게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얕은 여울과 심해, 점토, 모래, 자갈, 식생, 해류와 소용돌이, 바다 생물로 이루어진 풍경, 즉 바람과 물결, 해류와 조수의 흐름이 만들어 내는 바다의 삶은 항해를 통해 배웠고 중단 없이 전달되었지만,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에 브라이언 페이건은 우리에게 어떻게 고대 사회가 대양에 관한 수수께끼를 해독하며 자신들의 이해를 발전시키고 바다와 관계 맺어왔는지 파악하기를 제안한다.

 

바다에서 필요한 기술

여울과 해안선이 저마다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바다는 어디서나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바다는 색깔과 감출 수 없는 단서들, 그 자신의 언어를 통해 항해자들에게 수심을 알려 주고 깊은 물길로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도와준다. 바닷물의 색깔이 전하는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도록 바다 밑바닥 색깔 변화를 관찰하는 눈을 기르는 생존 기술을 배워야 한다. 이때 바다 상태가 잔잔해지는 때를 놓치지 않는 인내심과 판단력 또한 중요하다. 연안 항해에 경험과 고도의 익숙함이 필요하다면, 먼바다 항해는 강력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동기와 능력에 대한 자신감, 종교적 믿음, 호기심 등의 감정이 필요하다. 모든 대양을 해독하는 작업은 오랜 경험과 냉정한 현실주의, 조심스런 항해, 깊은 바다 풍경과 얼마나 친숙한가의 문제이 기 때문이다.

 

인류의 태평양 남서부 식민화 여정

3~4장은 5만여 년 전 동남아시아 본토에서 출발하여 태평양과 지구상에서 가장 외진 섬들을 식민화한 여정을 추적한다. 인류는 이 책의 제목처럼 익숙한 터전과 근해를 떠나 대항해에 도전했다. 항해자들은 위험한 바람과 높은 파도를 잘 알면서도 왜 깊은 바다로 모험을 나섰을까? 오세아니아 근해는 뉴기니의 동쪽 바닷가에서부터 멀리 남쪽과 동쪽 깊숙이 태평양까지 뻗어 있다. 숲이 우거진 섬들은 예측 가능한 바람과 해류로 항해 회랑을 형성하는데 이 회랑은 열대 사이클론 벨트로부터 항해자들을 보호한다. 25천 년 전이 되자 후빙하기의 항해자들은 솔로몬 제도까지 정착했다. 그들은 사냥꾼이자 고기잡이였고, 작은 야영지와 동굴에서 살았다. 외부에서 유입된 유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새로운 고향에서 서서히 적응해 가면서 고립되어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2만 년 전에 작은 흑요석 박편이 비스마르크 제도의 거주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도구 제작용 돌이 뉴브리튼 섬의 탈라세아에서 비스마르크 제도로 운반되었기 때문이다. 탈라세아는 비스마르크 제도에서 350km 떨어져 있으므로 섬사람들이 유용한 상품을 얻기 위해 장거리 여행을 감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섬들 간 방문이 늘어나며 탐험도 활기를 띠었다. 대략 만 3천 년 전, 사훌 북쪽 해안이나 뉴아일랜드 섬의 북단에서 200~230km 항해하여 가시 범위 바깥의 마누스 섬에 도달했다. 이 탐험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자원이 빈약한 섬 사람들은 뉴기니에서 나무에서 사는 유대류인 회색늘보주머니쥐를 식량 공급원으로 들여왔다. 뉴기니와 비스마르크 제도는 토란과 사탕수수, 일종의 바나나 등의 열대 작물이 유래한 곳으로 과수의 수확량을 증대하기 위해 나무를 재배하기도 했다. 이러한 개량종 식물은 장기 항해를 위해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항해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남서부의 인구는 말라리아 풍토병의 영향으로 미미했으며, 뉴기니 고지대에서만 조밀한 농경 인구가 번성했다.

 

라피타인의 이주와 정착

기원전 1600년 경에 뉴브리튼 섬의 위타리 화산이 대규모로 폭발한 전후로 섬 생활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대재난 전후에 서쪽으로부터 이방인들이 비스마르크 제도에 도착했다. 토란 뿌리와 마, 도끼, 까뀌와 큰 솥을 들고 온 이방인들은 토란과 작물을 심을 밭을 만들기 위해 숲을 밀어내고 영구적인 집을 지었다. 솔로몬 제도의 남동쪽에 위치한 뉴칼레도니아 서해안의 유적지에서 대략 기원전 800년 것으로 추정되는 라피타 토기는 훨씬 동쪽에 위치한 통가에서 발견된 이국적인 사금파리와 동일했다. 라피타 토기는 태평양 서부 대양 향해의 표식임이 밝혀졌다. 곧이어 특정한 양식으로 그려진 정교한 사람 얼굴 그림을 비롯한 복잡한 무늬가 새겨진 유사한 토기가 태평양 남서부 전역에서 출토되었다. 인도양의 마다가스카르부터 태평양 라파누이까지 널리 퍼진 새로운 이주자들은 타이완이나 그 일대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은 기원전 1500년까지 오세아니아 근해 전역에 정착했다.

라피타인들은 기원전 1200년경 솔로몬 제도 남단에서 산타크루즈까지(오세아니아 원해) 진출했다. 기원전 1200~1100년 사이에 바누아투 제도와 뉴칼레도니아로, 기원전 800년 무렵에는 850km를 항해해 피지 제도에 도달했다. 동쪽으로의 항해는 피지를 지나 서부 폴리네시아로 알려진 사모아와 통가, 하와이와 라파누이까지 확장했다. 이들은 농경인으로 조가비로 장식된 사금파리와 묘목, 닭과 개, 돼지뿐만 아니라 의례적인 물물 교환, 우정과 적대감 등의 자신들의 풍경을 함께 실어갔다. 특히 새로운 식량은 제한된 수렵에 의존했던 섬의 경제 생활에 유연성을 증대했으며, 저장이 가능해서 오랫동안 바다 위에서 머물 수 있게 되어 장거리 교역, 탐험과 정착이 확대되었다.

이들은 바누아투 제도 테오우마 만에 산호로 뒤덮인 해변과 화산재 암초에 난 동굴에 공동 묘지를 세웠다. 이러한 매장 풍습으로 라피타 사회의 조상과의 관계와 생사(生死)관 등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흑요석 박편을 통해 비스마르크 제도에서 나온 흑요석이 솔로몬 제도 남서부의 라피타 사회와 바누아투, 뉴칼레도니아, 피지까지 전파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물물 교환이 창출한 사회적 네트워크는 태평양의 섬들을 연결했다.

 

라피타인의 카누와 항해

라피타인들은 태평양의 바다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 카누를 제작해서 항해했다. 카누는 험악한 날씨와 강한 바람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비교적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충분한 양의 식량과 물도 실어야 한다. 원양 항해의 카누는 언제든 뱃머리를 돌려 귀환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아웃리거나 쌍동선 등의 플랫폼 형태가 안정적이며 실용적이다. 라피타 배는 속을 파낸 통나무를 바탕으로 옆널을 한두 장 덧붙이거나 여러 장 이어 붙여 거친 바다에 맞설 수 있었고, 선체가 좁고 길어서 속력을 내기 쉬웠다.

거의 모든 항해는 친숙한 지형지물과 동일한 도착 지점을 이용해 많은 이들이 거쳐 간 항로를 따랐다. 사방이 실제와 가상의 위험으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그들은 기준 가시선 항로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풍향이 바뀌지 않고 부는 우세풍을 이용해 항해했다. 라피타인들의 태초의 항해는 의도적인 식민화의 여정이었다. 이들은 한 세대 이상을 머물다가 다시 새로운 섬을 찾아 바다로 나갔다. 이러한 라피타 식민화가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되었다. 라피타의 지속적인 식민지의 팽창은 높은 출산률과 낮은 유아사망률 등 기대 수명이 증가한 결과 인구가 성장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인구 압력과 새로운 교역 기회와 값나가는 상품을 찾으려는 움직임, 형과 아우 간의 경쟁 관계로 인한(맏이가 집터와 텃밭, 재산, 제의적 특권과 각종 특권적 지식을 물려받음) 양질의 자원 획득이 미지의 땅을 향한 대담한 항해에 유인 동기를 제공했을지 모른다. 카누 개척자들은 필요하면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다는 자신감과 멀리 육지가 있다는 조짐(불규칙한 물결의 패턴)이 보일 때까지 해와 달, 별로 항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경계 흐리기, 라피타인의 태평양 적응 전략(사회적·경제적·정치적 네트워크 창출)

라피타 카누는 오세아니아 원해에 자리한 섬들을 놀라운 속도로 식민화했다. 이러한 항해는 사모아에서 발길을 멈추었다가 서기 500년 이후 항해가 재개되었고, 서기 1000년이 되자 사람들은 라피타 조상들의 항해 능력에 의지해 쿡 제도와 소시에테 제도로 항해했다. 서부 폴리네시아 섬들의 전통은 통가타푸 섬을 중심으로 해양 제국 형태로 확장되어 통가 제도를 넘어 서쪽의 피지와 동쪽의 사모아까지 인위적으로 조성된 연계에 바탕을 둔 통치 체제로 관장되었다. 주변 바다에 대한 지식에 의존해 친숙한 항로를 따라가는 장거리 여정은 수백 킬로미터에 유대를 다지는 결혼과 결합해 제국의 핵심을 이루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조상을 공경했다. 조상들의 위업은 고립된 사회들을 잇는 구전 전통의 사회적 접착제로 세대 간의 연속성과 개인들 간의 지속적인 연계를 보장하는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고 유지했다. 항해자들이 한 섬에서 다른 섬으로 이동했을 때 도구 제작용 흑요석, 경작용으로 쓰이는 돌도끼와 까뀌를 만드는 암석, 조개 까뀌를 만드는 각종 조가비 등의 물품의 이동과 함께 해양에 대한 구전 지식, 항해 정보, 관념, 문화적 영향, 예술적 모티프, 노래 등의 풍성한 지식을 함께 가져갔다. 서로 평등한 집단 사이에서 이루어진 모든 활동은 개인들과 집단들 사이에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지속되는 사회적, 경제적 네트워크를 창출했다. 이러한 연계는 일종의 보호막과 유대감을 형성하며 수백 킬로미터에 걸친 직간접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연계망은 먼바다를 끊임없이 왕래하면서 서로의 경계를 흐리며 바다의 비밀을 해독하는 과정에 기여했다.

오세아니아 원해 항해

현생 인류는 6만 년 전 동남아시아에 정착했다. 45천 년 전에 이르자 현생 인류는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했다. 그리고 그들은 15천 년 전쯤 북아메리카로 건너갔다. 소수의 항해자들은 이미 뉴기니와 남서태평양 지역(솔로몬 제도와 비스마르크 제도)에 정착해 있었고, 기원전 1500년 이후에 라피타인은 기준 가시선 항법에 의존해 산타크루즈 제도(멜라네시아)까지 진출한 다음 기원전 800년에 통가와 사모아 섬(서부 폴리네시아)에 도달했다. 이들은 대략 1800년 동안 본거지의 신앙과 사회적 관계 문제 등으로 탐험을 중단했다가 하와이, 라파누이와 뉴질랜드, 채텀제도(동부 폴리네시아)까지 도달했다.

오세아니아 원해의 바닷길 여정은 대략 10만 년 전 사하라 사막 이남에서 시작된 호모 사피엔스 최후의 위대한 팽창이었다. 사모아 섬 너머 동부 폴리네시아의 바다는 수천 제곱킬로미터의 망망대해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섬들의 패턴과 그 섬들 대부분이 우세한 무역풍의 맞바람을 받는 위치에 있다. 천여 년 전 지구 상의 가장 외딴 섬들을 식민화한 폴리네시아인들은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을 항해했다. 곳곳에 예측 가능한 지형지물을 표지판으로 삼는 연안 항해에 비해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에 점 하나에 불과한 작은 카누에 의지해야 했던 여정에서 항해자들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먼바다 항해에서 항해자들은 어떤 단서들을 어떻게 이용하며 항해했을까?

고대 항해자들은 그들을 인도하는 탁 트인 바다 풍경과 소리에 의존했다. 탁 트인 바다에도 항해를 위한 자연의 표지판은 육지의 풍경만큼 많기 때문이다. 천체의 운동, 육지를 향해 날아가는 새 떼, 굴절되는 너울, 변화무쌍한 조수와 해류의 바다 풍경과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모두 풍성한 자연의 표지판이다. 넓은 해협을 횡단하는 긴 여정에는 강력한 제의와 연관되어 오랜 견습 기간과 추가적인 항로 안내 기술이 필요했지만, 이러한 예측 가능한 자연의 풍성한 표지판을 이용했던 고대의 항해자들에게 육지와 바다는 속속들이 잘 알고 친숙했기 때문에 육지에서 바다로 자유롭게 넘어갈 수 있었다. 태양, , , 바다의 풍경과 소리를 표지판 삼는 항해자들에게 대양을 해독할 수 있는 전문적 지식과 기술, 주변 풍경과의 친숙한 관계 맺음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훈련된 지식과 정보는 고대의 항해자들에게 망망대해서 고립감을 느끼기보다 친밀감을 느끼며 끝없이 펼쳐진 미지의 대양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었으리라.

 

문화의 지평을 넓히는 장거리 항해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오랜 경험과 정보와 지식의 습득, 최고의 항해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쪽의 미지의 해역으로 항해하는 것은 여전히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대부분 폴리네시아인들은 고향에 머물렀고 소수의 항해자들만이 위험을 무릅쓴 모험을 시도했다. 이러한 모험은 희생이 컸지만 커다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으며 성공적인 여정은 대대로 전해지는 후광과 독보적인 권력과 위신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장거리 항해는 특권적 행위였다. 이러한 위신과 권력은 해양에서의 전문적 능력과 대양의 비밀을 해독하는 지식으로부터 나왔다. 대양을 건넌 사람들에게 폴리네시아 바다는 섬과 섬을 잇는 바닷길과 함께 경제적, 사회적, 의례적, 유대적 관계가 생겨나는 네트워크였다.

그런데 태평양 섬들에 인류가 도래하면서 근본적인 환경 변화가 초래되었다. 오세아니아 원해의 많은 섬들은 농경인이 도착하기 전까지 식용 식물이 부족했다. 사람들이 땅을 개간하고 작물을 심는 등 생산적인 농경 시스템이 어업과 결합하여 대규모 잉여 식량을 생산했다. 불가피하게 정치적, 제의적 권력은 좋은 땅을 가진 사람들에게 넘어갔고 서기 1600년이 되자 폴리네시아 사회는 족장과 항해가, 사제로 구성된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족장 사회로 발전했다. 족장 사회들은 더 큰 위신에 대한 족장과 사제들의 비옥한 농경지와 정치적, 제의적 권력을 향한 경쟁의 악순환 속에서 불안정한 동맹 관계와 전쟁의 줄타기를 하다가 고립 상태에 빠져들었다. 섬 주민들은 여전히 수평선 너머에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대양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이 그들의 문화적 지평은 육지 풍경에 국한되었고 바다와 인간의 거리는 멀어졌다.

대양 항해를 개척한 고대의 항해자들에게 바다는 때로는 경외감을 때로는 두려움을 주는 친밀한 동반자였다. 그들은 바다를 속속들이 잘 알았고 육지처럼 바다에 친밀함을 느꼈다. 이는 바다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환경임을 인식하며 항해를 통한 연계와 이에 따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바다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바다가 인간의 환경이 되었다는 것은 바다의 미세한 분위기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속속들이 알고, 친밀함을 느끼며 바다에서 노를 젓고 항해하는 행위가 일상생활의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일상은 문화적 지평을 넓힐 수 있는 토대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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