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해양 생물기] 청어 소녀들, 사라진 항해자들
해양 인류학 / 해양 생물기(3) / 2025.03.17. / 진진
청어 소녀들, 사라진 항해자들
“바다의 변화무쌍한 구조는 바다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인간의 짧은 여정에 흔적을 남긴다. 1900년대 초 ‘청어 소녀들herring lassies’ 같은 반항적 공동체도 요각류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다.”(헬렌 체르스키 지음, 김주희 옮김, 남성현 감수, 『블루 머신』, 374쪽)
바다는 육지와 달리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 『블루 머신』은 단단한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이 실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시스템인 바다의 영향을 받고, 그 시스템에 다시 영향을 주는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바다의 여러 요소들을 전달자, 표류자, 항해자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 중 항해자는 바다의 유동적 흐름의 패턴과 변화를 읽어내고, 그 움직임에 자신을 바꾸어냄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존재다. ‘청어 소녀들’은 매년 스코틀랜드의 동부 해안으로 내려오는 청어들을 따라가며 자신을 바꾸어낸 항해자들이다. 그들은 바다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하며 돈을 벌고 자유를 즐기며, 자신들이 뿌리내린 육지에서는 시대의 통념을 거스르는 존재가 되었다.
지구는 바다의 영향 ‘아래’ 있으며, 지구인인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헬렌 체르스키는 바다의 여행자로서 우리가 바다와 어떻게 관계 맺느냐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이 결정된다고 말하며, 바다의 승객이 아닌 선원으로서 바다를 항해해야 한다고 한다. 승객은 바다에 올라타 바다를 관망하고 영유한다. 선원은 바다와 협응하고 조응하며 바다로부터 이득을 얻는다. 성공적인 항해자가 되려면, 자신이 바다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 해양 생물임을 기억하며 바다를 잘 읽고 겸손하게 대해야 한다. 청어 소녀들은 바다의 항해자로 자신을 바꾸어내며 자유를 누렸으나,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바다는 더 이상 항해할 수 없는 곳이 되었고 소녀들도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시대를 앞서가기도 했고 시대를 거스르기도 했던 그들을 따라가며, 바다와 어떻게 관계 맺을지 생각해보자.
청어 소녀들의 이동을 이야기하려면 ‘칼라누스 핀마르키쿠스Calanus finmarchicus’라고 하는 동물성 플랑크톤의 움직임으로 거슬러가야 한다. 자연의 모든 존재들이 그렇듯이 해양 생물들도 먹이연쇄의 그물 속에 있다. 바다 먹이사슬의 최하위 동물은 플랑크톤으로, 식물성 플랑크톤을 먹고 자란다. 북대서양의 차가운 바다에 서식하는 칼라누스 핀마르키쿠스는 어둡고 영양이 부족한 겨울 동안 심해로 가라앉아 동면한다. 그러다 봄이 되어 태양의 빛과 열이 해수면의 식물성 플랑크톤을 증식시키면 겨울잠에서 깨어나 바다의 상층으로 올라온다. 풍부한 먹이로 배를 잔뜩 불린 칼라누스 핀마르키쿠스는 해류를 타고 대서양으로 이동, 청어의 먹이가 되고, 이렇게 살찌운 청어 무리는 바닷새, 바다표범, 대구와 같은 포식자들을 끌어들인다. 청어가 끌어들이는 여러 포식자들 중 하나가 인간이며, 여기에 청어 소녀들이 함께 했다.
스코틀랜드의 청어 잡이 배는 청어 무리를 따라 5월 셰틀랜드제도에서 출발해 12월 영국의 남동부까지 이동했다. 지방이 많은 청어는 빠르게 부패하기에 24시간이라는 정해진 시간 안에 내장을 제거 소금에 절여 포장해야 했다. 청어를 재빠르게 포장하는 작업에 스코틀랜드의 소녀들이 승선하여, 청어 무리를 따라 그들도 함께 긴 항해를 떠났다. 당시 사회 바깥의 일은 남자의 몫이었고, 여성들이 집 밖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바다가 만들어낸 흐름에 올라타 돈을 벌고, 남자들과 동등하게는 아닐지라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일에 대한 대가와 대우를 받았다. 청어를 손질하는 일은 고단하고 힘든 일이었지만, 그들은 이로 인해 집을 떠나 모험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자신감 있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청어 소녀들이 시대의 분위기를 거슬러 집을 나선 것은 바다의 움직임을 따라서였다. 물론 이전에도 청어는 같은 경로를 따라 이동했지만, 1500년에서 1800년까지는 네덜란드인이 이 이익을 취했다. 1800년대 후반 청어 가공이 산업화되며 스코틀랜드인들이 이 이익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바다는 육지의 인간 삶에 변화를 주고, 이에 의해 바다 또한 부분적으로 변화하고 이 변화는 바다 시스템을 조정하게 한다.
청어 소녀들의 항해는 제 1차 세계대전과 함께 멈췄다. 전쟁으로 바다는 격전의 무대가 되었고 청어 잡이는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나며 다시 재개되었지만,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청어 산업은 다시 사양길에 들어서게 된다. 집을 나선 청어 소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회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영유했던 이들이 집안으로 들어가 이전처럼 조용히 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다를 따라간 청어 소녀들처럼 항해자들의 변화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조류를 거스르는 것일 수도,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그들이 당시의 여행을 통한 변신을 되돌리고 싶은 일로 회고할지, 더 나은 항해를 위한 발판으로 회고할지 그들의 목소리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