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물과 인류] (1) 몸으로 바다 지도 그리기
몸으로 바다 지도 그리기
항해자, 몸으로 바다를 읽다
어떤 목적이든, 긴 여행 혹은 탐험을 위한 길을 떠난다고 할 때 나에게 바다는 육지보다 더 무모해 보이는 공간으로 보인다. 육지 위에는 건물, 산, 물건 길 위에서 눈에 잡히는 것이 많다. 눈에 걸리는 그 대상들이 인간에게 안정감을 준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디로 가야 할지 이정표가 되고, 이 이정표들 덕에 나의 자리를 가늠하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정표들로 지도 그리기가 가능하다.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내가 가야 하는 길에 지도가 없을 때 또 지도를 그릴 수 없을 때 인간은 혼란에 빠진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는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바다 위에서는 눈에 잡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내가 있는 위치가 어디쯤인지, 어디로 가야 다음 행선지로 도착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 혼돈과 미지의 영역인 바다로 뛰어드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러나 해양 인류학 세미나에서 만난 고대 항해자들은 무모하지 않다. 그들은 바다를 알지 못한 채 그저 호기심과 모험심만으로 배를 타지 않는다. 그들은 바다를 ‘안다’. 바다에 대한 충분한 정보, 지식과 지혜를 통해 항해에 최소한의 안정을 보장받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돌아올지를 알고 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바다를 해독하며 이 지혜를 키워갔다. 그런데 바다 해독 시에는 육지와는 조금 다른 눈이 필요한 듯 보인다. 바다 위에서는 당장 눈앞에 확인되는 선명한 대상들이 없기 때문이다. 육지와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제3의 눈이 요구된다. 간혹 드러나는 섬들을 제외한다면 그들은 계속 변하는 대상들을 읽는다. 별의 움직임을 보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 바다의 색깔과 온도의 변화를 온몸으로 보고 읽는다, 느끼고 감각한다.
『바다 인류』에 소개된 항해자인 미크로네시아인 ‘마우 피아일루그’는 이 해독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는 별도의 항해 도구 없이 오직 별, 바다와 바람의 움직임, 새, 섬들을 관찰하는 것에 의지해 항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이 자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는데, 카누 바닥에 책상 다리를 하고 앉거나 누워서 바람이 일으키는 파도를 느끼고 해류 밑의 소리를 통해 먼 곳의 폭풍우를 감지했다. 그야말로 온몸이 자연 해독기이다.
미지의 바다를 친밀하게 전환하기
그런데 신기하다. 우주 자연이 막무가내로 변할 것 같지만 감사하게도 그 변화 속에서 해독이 가능한 주기나 규칙성이 있다. 이는 자연이 순환과 반복으로 변화한다는 말이다. 항해자는 바다의 변화를 보면서도 그 가운데 일정한 규칙이나 법칙을 읽어낸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읽기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능력, 변화 가운데 주기와 규칙을 찾아내는 것이 이 항해자들의 진짜 능력이다. 바다를 알고 있다는 것은 이 주기와 규칙을 통해 미지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바다를 예측 가능한, 친밀한 대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다가 예측 가능해지면 항해자의 머릿속에 지도와 좌표가 그려진다. 해서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또 어디로 얼마만큼 가야 하는지를 판단하며 내 위치를 가늠한다.
예컨대, 인도양 항해자들은 이곳 바다가 여름과 겨울의 강수량 차이가 뚜렷하다는 것을 읽어냈다. 겨울 몬순은 대체로 11월-3월경 북동풍으로 부는데,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대륙에서 해양으로 불어간다. 반면 여름 몬순은 5월-9월 남서풍으로 불어 습한 바람이 해양에서 대륙으로 불어와 많은 강수를 유발한다. 인도양의 항해자들은 바람을 읽고 그 방향에 맞춰 순항하는가 하면, 역풍을 돛으로 이용해 전진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해안가 육지에 정박에 휴식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이 몬순 바람의 변화 주기에는 큰 예외 없이 예측 가능하다는 특성 덕분에 인도양 장거리 항해가 가능했으며 바람에 대해 알기만 하면 일 년 내로 귀환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 속에서 항해했다.
소리로 몸의 지도 만들기
우주의 변화 주기를 읽는 능력은 한 세대에서의 배움만으로는 부족하다. 해독 기술은 여러 세대에 걸쳐 누적되며 재차 확인되어야 한다. 온몸을 사용하여 바다를 읽는 이 기술은 선대를 통한 전승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자연을 해독한 조상의 지혜는 구술로, 문자가 아니라 소리로 후대에 이어진다.
팀 잉골드는 우주를 불리 불가능한 하나의 메쉬망으로 묘사한 바 있다. 메쉬망 안의 작고 미세한 움직임은 파동을 일으키며 우주 곳곳에 전달된다. 우주의 공기도 물도 분절되지 않는 하나의 흐름으로 이 공명의 운동에 예외가 아니다. 바다도, 배도, 항해자도 전체 공명의 파동 속에 담겨 있다. 오랜 지혜를 소리로 만들어 전달하는 것은 공명하고 있는 지혜 전체를 몸에 새기는 일이며, 지혜가 곧 몸 자체가 되는 일이다.
바다를 포함한 자연의 변화는 부분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단편적인 듯 보이는 눈앞의 변화도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전체 움직임 위에서 가시화된다. 바다를 해독하는 것은 눈앞의 작은 변화를 감지해 우주 전체 흐름과 다음에 연속될 움직임을 예상하는 일이다. 이는 몸의 감각과 직관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지혜 자체가 된 몸은 어디로 얼마만큼 더 가야 할지, 언제 돌아와야 할지 방향을 알려주며 스스로 지도가 된다.
나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면, 우리가 어디서 출발했고 어디로 가고 있으면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를 안다면 항해는 무모하거나 두려운 길이 아니다. 내가 그 대상을 이해하고 아는 순간은 그 대상에 맞물려 있는 나의 위치를 확인하는 순간이며 그 대상과 내가 함께 서 있는 지도가 그려지는 순간이다. 그때 미지의 대상은 나에게 친숙한 존재가 된다. 바다 위 항해자들은 몸으로 바다를 읽고, 그 지혜를 몸에 새겨 몸을 지도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