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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인류학

두 손으로 도구를 다듬었던 인류의 지혜를 배우자

 

[동사 탐구-대화하다] 대화하다, 지지고볶고 함께하다

작성자
붱붱
작성일
2024-12-17 22:35
조회
109

기술 인류학 / 동사 탐구-대화하다 / 24.12.20 /붱붱


대화하다, 지지고볶고 함께하다


최근 ‘탄핵’ 관련 시국에 대하여 내가 몸 담고 있는 분야에서 살짝 불거졌던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시국에서 하나의 전문 직업군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였다. 한쪽은 이 직업의 전문성을 살려 사람들을 환기시키는 방향도 가치가 있다는 의견이었고, 다른쪽은 거기서 그칠 게 아니라 훨씬 적극적으로 현장으로까지 활동을 끌고와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이 논쟁은 각자의 의견을 이야기한 채 서로 더 나아간 대화를 잇지는 못하고 끝났다.

이쪽 분야에선 꽤 화제였던 듯한 이 논쟁에 대해 같은 직업군인 친구와 이야기했고, 우리의 결론은 ‘각자의 의견이 각자의 조건에서 비롯된 그 나름대로 타당한 의견이었다’였다. 하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린 후 나에게는 추가적인 궁금증이 생겼다. 서로 다른 둘이 대화를 하더라도 그 어떤 변화도 없이 서로의 ‘타당함’만을 고수한 채 그 대화가 끝나버린다면, ‘대화’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대화를 해야 그 대화는 좋은 대화가 되는 것일까? 우리가 서로 아주 다를 때, 우리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 좋을까? 서로 다른 둘의 대화는 어디로 향해 가야 할까?

이에 대하여 아마르티아 센의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이 아주 큰 힌트를 준다고 생각한다.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은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노후에 쓴 자서전이다. 이 책의 작가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데 아주 이골이 난 사람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과 아주 다른 견해를 가졌던 친구와의 대화를 “늘 지적으로 자극적이고 생산적이었다.”(471)고 평한다. 아주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생산적이라니? 이 말은 그 대화를 통해 무언가 새로운 걸 만들었다는 걸, 적어도 대화 이전과 비교해서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아, 그는 좋은 대화를 했음에 틀림없다! 아마르티아에게 좋은 대화의 비결을 좀 들어보자.

대화할 때 존재한다

아마르티아 센은 199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그가 상을 받은 이유는 그동안 경제학 쪽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를 연구하고, 후생경제학을 발전시킨 데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노벨경제학상이나 받은 사람의 자서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가 없단 것이다. 그의 자서전에 있는 건 ‘자기’가 아니라 ‘타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에서 자기 자신은 자리했다. 이 책의 이름은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이다. 그는 한평생 남들과 나눈 대화들이야말로 자기가 비롯된 땅임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고 아마르티아 센에게 주관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관심을 두는 것, ‘후생경제학’에 대해 뚜렷하게 인지하고 그 관심을 끝까지 투철한다. 다만 여러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의견을 계속해서 제련해나간다. 말하자면 그 자신의 의견에 여태까지의 대화들을 함께 요리해나간다고도 볼 수 있겠다.

복수의 답을 끌어안다

대화란 무엇인가? 어떤 쟁점에 대해 논쟁하고, 어떤 결론에 도달한다면, 그 결론 뒤에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학창시절부터 다지선다 중 단 하나의 답을 고르는 데 익숙하다. 우리에게 보통 답이나 결론은 ‘단수’이다. 이런 교육 탓인지 보통 사람들은 여러 다른 의견이 있을 때 그 중 하나만 선택되고 나머지는 다 버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마르티아 센은 ‘복수’의 답을 긍정한다. 그는 여러 군데 지닌 곳들 중 가장 고향 같았던 곳 하나를 물어보는 기자의 말에 그 모든 곳들이 다 고향이었다 말한다. 또 인도의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과거 함께 어우러졌음에 주목한다. 그가 한 매체에 기고한 논문은 단일한 선택지만 인정하는 어떤 이론을 비판하고 ‘복수의 선택’을 긍정하는 내용이었다.

복수의 답들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아마르티아 센의 비결은 지켜보기와 함께 살기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친척들이 서로 다른 사상과 의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계속해서 이야기를 멈추기 않는 걸 지켜봐왔다. 여기에는 ‘친척’이라는 점이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암만 의견이 달라봐야 어차피 끊어질 수 없는 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아예 등돌리고 살 수가 없는 관계 속에서, 친척들은 다른 의견들을 끌어안고 계속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아마르티아 센은 커간다. 그가 대단한 점은, 자라면서 만나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다 ‘친척’이라는 관계에 넣는단 점이다. 궁극적으로 책의 제목이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이듯, 자신이 발붙인 세상에 모든 존재들이 마치 친척과 같이 하나의 고향을 가진 가까운 관계들임을 그는 받아들인다. 세상을 하나의 고향, 하나의 온전한 생명체로 볼 때, 서로 다른 의견을 가졌다고 사람들을 갈기 갈기 찢는다는 것은 세상 자체를 부인하는 일과 매한가지다. 여러 정체성을 지닌 한 사람이 한 몸으로 살아가듯, 여러 존재들을 품은 세상도 하나의 공유지로서 조화되어야 한다.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의 제목은 그 모든 정체성들과 존재들을 다 ‘나’와 같은 뿌리를 지녔음을 자각하고 끌어안는 마음을 나타낸다.

좋든 싫든 함께 간다

인간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존재이다.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에서 아마르티아 센은 인류에게 “배신, 폭력, 학살, 기근도 있지만 너그러움과 친절함의 놀라운 행동도 있다”(451)고 한다. 인류는 미덕과 악덕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리고 제목이 뜻하는 바, 미덕과 악덕의 인류는 자신의 뿌리이다. 내 안에는 선함과 악함이 함께 자리한다. 대화란 이렇게 선과 악이 공존하는 사람들의 대화인 거다. 

결국 ‘좋든 싫든’이라는 말은 내가 타인을 볼 때도 해당하겠지만 타인이 나를 볼 때도, 혹은 내가 나를 볼 때도 해당하는 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빠짐없이 ‘좋든 싫든’의 면모가 있다. 우리가 기술인류학 세미나에서 읽었던 다른 책들에서도 ‘좋든 싫든’이라는 표현이 종종 나온다. 자연을 파괴하는 거대 기술을 만드는 것도 인류, 나의 뿌리이다. 누군가를 먹이기 위해 스스로 굶는 것도 인류, 나의 뿌리이다. 인간의 양면적인 면모를 그 책들의 저자들은 다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좋든 싫든’이라는 표현을 썼을테다.

우리 모두가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친척’이라는 점을 인지한다면, 우리가 ‘좋은 싫든’ 이 세상에 같이 엉덩이 붙이고 살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인다면, 별 수 있는가? 같이 지지고볶고 함께하는 수밖에. 그리고 ‘언어’를 주된 도구로 쓰는 인간이 함께하는 방법은 대화가 대표적이다. ‘지지고볶고’라는 표현은 이때 참 적절하다. 여러 다른 재료가 지지고볶아지는 과정에서 영양가 있는 요리로 재탄생하듯, 세상이라는 하나의 웍 안에 있는 우리는 ‘지지고볶고’를 극복하고 어떻게든 이야기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모르는 사이에 우리 다른 존재들은 근사하게 요리되어 있을 거다. 똑같은 재료로는 균형 잡힌 식단이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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