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인류학
두 손으로 도구를 다듬었던 인류의 지혜를 배우자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4) 독립 인도의 경제학 강의실에서
기술인류학 2024-12-18 김유리
독립 인도의 경제학 강의실에서
아마르티아 센은 식민 본국 영국에서의 경제학 연구를 마감하고, 1960년대 초 인도 델리에 새로 생긴 정경대학에서 경제학 강의를 맡는다. 당시 인도는 독립 이후 언제든지 갑작스러운 폭력으로 불 붙을 수 있는 종교적 갈등, 정치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뿌리 깊은 신분제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센은 불평등과 사회적 선택(사회적 의사 결정)에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는 강의 자료를 조사한다. 그가 회고록의 끄트머리에서 학생들을 위해 참조하는 자료는 잉글랜드 정치경제학의 창시자 아담 스미스의 저술이다.
센에 따르면, 아담 스미스는 비시장적 제도로 시장에서의 과정을 보완하는 데 진지한 관심이 있었다. 스미스는 ‘불편부당한 관찰자’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도덕적 논증을 전개한다. 이 개념은 개인적인 편견이나 해당 지역에 대한 편견이 없는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 가정해보는 관점 바꾸기의 방법적 개념이다. 외부인의 눈으로 어느 사회의 특정한 상황을 본다면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지 상상해 보면, 편견과 분열에서 자유로운 관점에 초점을 모을 수 있다고 스미스는 주장했다.
스미스는 불편부당한 관찰자 개념을 사용해서, 특정 인간 집단이 다른 인간 집단에 대해 우월하다는 주장이 편견이라는 논증을 펼쳤다. 이에 따르면, 당시 잉글랜드 상류층이 아일랜드인에게 흔히 내보이는 비하적 편견은 부적절하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 상류층 상당수가 노예제를 용인하고 있는 것도 부당하며, 그러한 불평등을 제도화한 노예제는 도덕적 퇴락과 비슷한 결과를 일으키므로 타협 없이 배격해야 한다고 스미스는 주장했다.
수업 중에 아담 스미스의 저술이 낭독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아프리카 연안에서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노예 소유주에 비해 열등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며, 몇몇 중요한 면에서 오히려 더 우월한 인간이라는 주장이다. 인도라는 오래된 불평등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학생들이 강의실에서 접한 스미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지리와 시대의 경계를 넘어 즉각적인 유대와 공감을 표시한다.
센은 스미스의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논증이 60년대 초 델리 정경대 학생들에게 호응을 받은 것을 기록하며, 설득이라는 것은 감정만이 아니라 이성적인 논증의 힘에서 나올 수도 있음을 확인한다. 이성적인 논증과 자유로운 주장은, 대화와 토론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이 함께 협력하여 더 나은 의사를 결정하는 수단이 된다. 아마르티아 센은 민주주의란 ‘토론에 의한 통치’라는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설득의 중요성을 재차 주장한다. 밀은 좋은 정책 수립에는 대중의 이성적 논증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마르티아 센은 사회가 선호하는 선택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배제 없이 이루어지는 것에 관심을 두었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연구하는 사회 선택 이론을 경제학의 한 분야로 구축하고 싶어 했다. 케임브리지에서는 동료 학자를 구하지 못한 연구 분야지만, 델리 정경대에서 이 분야의 연구자들이 빠르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독립 이후의 인도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인도에서는 교육과 의료 같은 공공 서비스를 확충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모두를 위한 공공 서비스에 자원을 써야 한다는 공공 담론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고질적인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관련이 있다. 심각한 빈곤과 사회적 차별을 겪는 최하층에게는 교육과 의료가 어차피 별 쓸모가 없으리라 흔히 여겨졌다. 배제와 차별의 대상인 최하층 개인의 필요가 어떻게 전 사회적 선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 방법론을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 센의 사회 선택 이론이다.
아마르티아 센은 투표와 선거라는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대중의 이성적 검증을 거친 가치 판단이 작용해야 개인의 선택과 사회의 선택 사이가 일관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마르티아 센은 불평등이 사라지려면 먼저 사람들을 범주화하는 단일 정체성 개념을 극복해야 하고, 이성적으로 논증하고 설득하는 상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센의 강의실에서, 인류에게 주어지는 가장 고귀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인종이나 국가의 독점물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한 타고르의 말이 되살아난다. 독립 인도의 경제학은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존중과 이해라는 가치에서 출발함을 보여주는 강의실 장면을 회고하면서 센은 안심과 희망을 담아 회고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