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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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인류학 에세이] 대화하다, 나의 도덕을 확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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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하다, 나의 도덕을 확장하다
대화를 하다보면 말문이 턱 막힐 때가 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상대방이 내 예상과 너무 다를 때다.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의 저자 아마르티아 센은 그 순간이 바로 너의 좁은 도덕이 확장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Home in the World)』(2024)은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1933– )의 자서전이다. 자서전은 저자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이라 생각하는 것들을 담은 글이다. 아마르티아 센은 1998년 후생경제학에 대한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에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영광의 순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저자가 본격적으로 경제학 연구를 시작하는 데에서 자서전은 끝난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과정이 자서전의 전부다. 이 과정에는 무수한 대화들이 있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아마르티아 센이 노벨경제학상보다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 ‘대화’라는 것을 파헤쳐보려고 한다. 그는 실로 ‘대화의 화신’이었다. 의견이 비슷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의견이 아주 다른 사람들과도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자, 한번 그에게서 대화의 비결을 들어보자!
대화의 비결 1: 복수의 정체성을 가져라
어쩌면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 대화가 잘 진행되지 않거나 확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때, 그 이유는 상대에게서 내가 그동안 인지하기 힘들었던 다른 정체성이 그에게서 비어져 나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는 ‘객관적 착각’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이는 내가 ‘객관적이다’라고 말하는 게 사실 ‘착각’에서 비롯됐다는 걸 말한다. 그 객관적이라는 느낌은 오로지 당시의 조건 및 시야에만 해당하지, 다른 때 다른 곳에서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어떤 말에 당황하는 것 역시 내가 어느 특정 순간(들)에 본 상대방의 모습이 그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나의 ‘객관적 착각’이다.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사람이 ‘복수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임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다. 딸인 동시에 엄마일 수 있고, 회사원인 동시에 연구자일 수 있다. 돈을 좋아하는 동시에 기부를 할 수도 있고, 교회에 가는 동시에 불경을 읊어볼 수도 있다.
대화의 비결 2: 고유한 관점을 가져라
그런데 대화가 이어지려면 단순히 복수의 정체성이 ‘다 좋다’기보다는 ‘자신의 고유한 관점’이 있어야 한다. 다 좋다 다 좋다 하면 대화를 하기 전이나 후나 차이가 없다. 아마르티아 센은 마르크스 하나를 보더라도 남들과 똑같이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관점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연구 분야인 경제학 외 다른 분야들도 공부하며 자기 생각을 쌓아갔다. 심지어 그는 어린 시절 암에 걸렸을 때 의사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직접 책들을 뒤져가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그 방법을 모색했고 효과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아마르티아 센은 남들이 옳다고 하는 생각과 의견을 무심코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더듬더듬 공부해 가며 무엇을 진정으로 추구하면 좋을지 결정했다. 그렇게 얻은 그 자신의 ‘고유한 관점’은 그가 나누는 대화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을 것이다. 또 대화 상대방에게는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다.
대화의 비결 3: 나의 도덕을 확장하라
이렇게 대화를 함으로써 무엇이 창발하는 것일까? 바로 ‘확장된 도덕’이다. 아마르티아 센은 연구한 분야는 후생경제학이었다. 후생경제학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뿐 아니라 아주 먼 사람들까지, 그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경제학이 윤택한 삶과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을지를 연구한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사람들 말고 나와 그렇게 가깝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까지 우리는 생각이 미치기 어렵다. 그런데 아마르티아 센은 이 분야에, 그 모든 사람에게 이바지할 학문에 진심으로 임했다.
그가 그렇게 폭넓은 사람들에게까지 가닿는 일에 전념할 수 있던 데에는 그가 나눈 대화들이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아마르티아 센은 어린 시절부터 학창 시절까지, 경제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그 길목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과 대화했다. 그는 그 대화들을 통해 세상에는 정말로 다채로운 사람들이 있음을 진심으로 감각했다. 그렇게 그는 자기 자신만이 전부였던 세상에서 빠져나와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즉 아마르티아 센은 많은 대화들을 통해 자신의 도덕을 확장했다.
도덕이란 무엇이 옳고 그른지, 궁극적으로는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한 생각이다. 도덕을 확장하게 된다는 건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확장된다는 것이다. 경제학이 단순히 배부른 사람들만 더 배불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외면하는 데 기여하는 게 아니라, 혹은 자국민만 생각하고 타국민은 배제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살아있음을 느끼고 그들 모두의 삶과 행복에 기여해야 한다. 이것이 아마르티아 센이 다채로운 대화를 통해 얻은 진심이었다.
그동안 나는 대화를 할 때 말문이 턱 막히면 자책부터 했다. 내가 무엇을 놓쳤거나 잘못했나 계속 반문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조차, 아니 그 순간이야말로 귀한 순간이라고 아마르티아 센은 말한다. 대화가 막히는 순간, 그 순간은 네 도덕과 상대의 도덕이 맞부딪힌 순간인 거라고, 지금 네 도덕은 무럭무럭 크고 있다고, 너는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될 거라고, 그래서 대화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그는 말한다. 좋은 대화든 망한 대화든, 피하지 않고 직면한다면 우리는 더 큰 세상, 더 큰 가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