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인류학
두 손으로 도구를 다듬었던 인류의 지혜를 배우자
[기술인류학 에세이]사람과의 연결 속에서 일하다(최종)
인문공간세종, 2024 기술인류학, 최종에세이, 2024.12.26., 미자
사람과의 연결 속에서 일하다
『어떤 동사의 멸종』은 전화받다, 운반하다, 요리하다, 청소하다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실 이 책의 저자는 이 일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그 일들에서 느낀 희노애락을 아주 구체적으로 썼다. 나는 그중 요리하다에서 저자가 ‘기본적으로 요리하는 재미라고 한다면 맛을 창작하는 것이지만 그것보다 내 가슴에 와 닿았던 즐거움은 연결의 감각이다(p.246)’이라고 말하는 부분에 유독 시선이 갔다. ‘내가 여전히 유의미하게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p.249)’이 있으면 서울 변두리 지하 주방에 처박혀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일하는 것이 연결의 감각을 느끼는 것이라고? 나는 20대초에 회사에 입사해 오늘도 아침이면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나에게 일은 어떤 의미일까? 일은 사회에서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표식이었다. 신입직원에서 점차 직급이 올라감에 따라 나라는 존재도 성장하고 의미있는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일이 연결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연결은 좁은 나를 벗어나 세상과의 소통이다. 그렇다면 나는 세상과 얼마나 연결되어 소통하고 있는 걸까?
내가 일하는 공간
우선 아침이면 출근하는 사무실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을지로4가역에서 내려 15분 정도 걸어 간다. 건물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내려 카페트가 깔린 복도를 지난다. 검지손가락을 지문인식기에 대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출입문 옆에 있는 문서세절기와 복사기, 정수기를 지나 우리팀 직원 자리를 거쳐 창가 쪽에 있는 내 책상에 도착한다. 오늘도 나는 내 왕국(?)에 도착했다.
이 왕국의 가장 충실한 부하는 컴퓨터다. 모니터와 자판기, 마우스로 구성된 삼총사가 있어야 왕국이 작동한다. 우리는 각자의 왕국에서 하루를 치열하게 싸우기도 하고 한숨을 돌리기도 한다. 각 왕국은 파티션으로 구분된다. 파티션 색깔은 파란색과 회색이다. 파티션 색깔이 주황색인 다른 회사의 사무실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음~그래서 사무실은 안정감 있게 무채색이나 파란색 계열을 사용하는군.
파티션은 자리를 구분하기도 하지만 책꽂이를 걸 수도 있고 업무에 필요한 각종 자료를 붙일 수 있다. 파티션이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책상들끼리 붙어 있어서 옆에 직원이 뭘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때도 최대한 자신을 가릴 방법을 모색했을 것이다. 지금도 파티션의 책꽂이 등을 활용하여 주위의 시선이 닿지 않게 한다. 어찌되었건 각자가 느끼는 편안한 방식으로 자신의 왕국을 만든다.
이렇게 자신의 자리를 만든다고 하지만 신입 직원의 자리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 위치할 확률이 높다. 직급이 높을수록 안쪽 즉 창가나 구석진 자리다. 그리고 보통은 직급이 높은 순으로 차례대로 앉는데 어찌하다보면 관리자 앞에 바로 앉을 수도 있다. 그러면 왠지 모를 불편함이 올라온다. 파티션을 좀 높게 쳐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책꽂이에 책을 꽂거나 무엇이든 쌓는다.
예전에는 문서도 손으로 쓰고 전달은 다른 부서를 찾아가거나 문서함에 넣었지만 이제는 컴퓨터로 문서 작성을 하고 전자 결재로 클릭으로 문서가 전달된다. 사람이 움직이는 일은 회의에 참석하는 정도다. 서로 간 말을 하는 빈도도 줄었다. 전화기 대신 사내 메신저나 카톡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무실이 조용할 때면 어디서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자판을 두들기는 직원은 일을 하는 걸까? 수다를 떠는 걸까? 하지만 이건 나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고 내가 일을 하고 있지는 않으니 말이다.
숫자를 다루는 건 사람이다
그렇다면 사무실 내 왕국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뭘까? 컴퓨터를 켜는 일이다. 퇴근할 때 가장 늦게 하는 일도 PC를 끄는 것이다. 컴퓨터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는 세상이다. 나는 회계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회계팀에서는 회사의 각종 경비와 급여 등을 지급하고 세금을 납부하고 연말정산을 하고 자금관리 등을 한다. 지금은 현금을 직접 만지는 일은 없지만 어쨌든 돈과 관련되어 있으니 업체에 대금을 주거나 급여가 이체될 때에는 신경이 쓰인다. 나는 그동안 여러 부서에서 근무를 했지만 회계팀에서 근무한 기간이 가장 길다. 이렇게 오랜 기간 회계업무를 했지만 이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회계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결산업무라고 생각한다. 연말 기준으로 한 해의 모든 장부를 마감하고 재무상태표 등 여러 보고서 표를 작성하고 회의 의결체를 거치기 때문이다. 각 부서에서 사업을 추진하는 일들이 모두 숫자로 표시된다. 각종 업체 대금 지급이나 직원의 인건비로 말이다. 한 해 우리 회사의 돈이 어떻게 들어오고 어떻게 나가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다. 전에는 회계가 단순히 숫자를 표시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쓰다 보니 직원들의 업무가 숫자로 나타난 것이겠다 싶었다. 결국 사람이 일 년 동안 한 일인 것이다.
나는 회계팀에서 다루는 것이 숫자라고만 생각했고 사람과 부딪칠 일이 없다고 여겼다. 그랬기에 나는 사람이 아닌 숫자를 좋아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숫자가 어디로 갈지 정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업무가 시스템으로 매뉴얼화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시스템도 사람이 변경하고 업그레이드시킨다. 결국 일은 컴퓨터나 시스템이 아닌 사람이 하는 것이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사람이고 그들과의 관계이다.
사람과의 연결 속으로
…노동에는 적어도 세 가지 역할이 있다. 인간에게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향상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 다른 사람과 함께 공통의 임무를 수행하여 자기중심성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것 말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E.F.슈마허, p.67)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슈마허는 노동의 세 가지 역할에 대해 얘기한다. 나는 그중에서 자기중심성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연결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조직에서는 각자 맡은 일이 있고 그 업무를 완수하기 위해 능력을 발휘한다. 일의 잘 완수되면 성취감도 느끼고 보상도 주어진다. 보상은 승진이다. 승진이 되면 보통은 내가 잘난 줄 안다. 나도 그랬다. 나는 인정받고 있으며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렇게 보상받는 건 당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회계팀에서 전표를 발행하려면 다른 부서의 직원이 결의서를 작성해 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승인을 하려면 먼저 팀원이 승인에 필요한 작업을 해야 한다. 업무가 나누어져 있다고 하지만 각자가 하는 일은 이렇게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연결되어 있다. 팀간 부서간 그리고 기관간에 촘촘한 그물망처럼 말이다. 돈이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것도 다른 기관에서 입금을 해야 가능하다. 우리 회사에서 나간 돈은 다른 기관의 입금이 된다. 그리고 이런 연결에 관여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과의 연결감 속에서 우리는 자기 중심성을 극복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일을 한다고 하면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그에 따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했지 사람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면 나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과의 갈등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과의 연결이 좋은 일로만 연결될 수 있을까?
『어떤 동사의 멸종』의 저자는 노동을 통해 발현되는 희로애락이 있다고 말한다. 이 희로애락이 사람과의 연결점이다. 여기에는 고통과 욕망이 있다. 나에게 일을 한다는 것은 이런 희노애락을 모두 탈각시키고 오로지 일의 진행에만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런 시선으로 주위를 보고 나에게도 요구했다. 그런 식의 일은 나를 고립시키고 단절시킨다.
이제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회계팀은 연말 연초가 가장 일이 많은 시기다. 일이 많다는 건 사람들과 연결될 지점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이 연결 속에서 숫자가 아닌 사람들을 기꺼이 만나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