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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인류학

두 손으로 도구를 다듬었던 인류의 지혜를 배우자

 

[기술 인류학] 전쟁과 농업(2): 우리는 어떻게 배불리 먹게 되었을까?

작성자
붱붱
작성일
2024-10-15 22:57
조회
196

기술 인류학 / 전쟁과 농업(2) / 24. 10. 17. / 붱붱

우리는 어떻게 배불리 먹게 되었을까?

내가 『전쟁과 농업』에서 요약을 맡은 제3강의 제목은 「기아로 본 20세기 정치」이다. 그런데 먼저, 우리에게 ‘기아’란 무엇일까? 감이 잘 안 올 때는 영상 매체에 좀 기대보자. 넷플릭스에 기아를 검색해본다. 기안84가 출연한 프로그램들이 나온다(발음 유사). 유튜브에 기아를 검색해본다. 야구 경기나 자동차 영상이 뜬다(KIA). 우리에게 기아는 더이상 일상적인 키워드가 아닌 듯하다. 우리는 어떻게 기아를 피할 수,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을까? 제3강 「기아로 본 20세기 정치」에서 저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그 이유로 ‘우리가 기아를 전가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제3강에서 저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20세기 정치가 어떻게 ‘기아’를 정치 도구로 사용했는지를 밝힌다. 저자는 영국 출신의 역사가 마크 마조워의 『암흑의 대륙: 유럽의 20세기』(1998)를 언급하며 이 장을 시작한다. 마조워는 자신의 책에서 그 무엇보다 밝은 땅으로 칭송받는 유럽이 사실은 ‘암흑의 대륙’이었음을 드러낸다. 후지하라는 이 책을 통해 ‘역사의 어둠을 응시하는 일’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동안 외면 혹은 간과해온 ‘진실’이라고 말이다.

19세기 말에는 ‘어둠’을 키워드로 세 권의 책이 나왔다고 한다. 탐험가 헨리 모턴 스탠리의 『가장 어두운 아프리카에서』(1890), 자선가 윌리엄 부스의 『가장 어두운 영국과 그 출구』(1890), 소설가 마쓰바라 이와고로의 『가장 어두운 도쿄』(1893). 앞의 두 권은 아프리카나 영국의 빈민가를 부정적인 의미로 ‘어둡다’고 본 책이다. 뒤의 한 권은 초반에는 앞의 두 권의 책처럼 부정적인 색안경으로 도쿄의 빈민가를 바라보다가, 실제 그곳에서 먹고 일하고 자며 사실은 빈민가가 아니라 부촌이야말로 ‘진짜 어두운’ 곳임을 깨달은 책이다.

저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마조워와 마쓰바라가 똑같이 “빛을 비추려는 인간에게 빛을 비춰야만 한다”고 비판한다고 말한다(92). “빛을 비추려는 인간에게 빛을 비춰야만 한다”…. 처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때는 이해가 안 돼서 별표를 막 쳤었는데, 이 요약글을 쓰다보니 이해가 좀 되려 한다. 

마조워는 『암흑의 대륙: 유럽의 20세기』 서두에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작가 요제프 로트의, “왜 유럽은 다른 대륙에 문명과 예의를 보급할 권리를 주장하는가? 그들 자신에게가 아니라?”라는 말을 인용했다고 한다(87). 이는 비유럽에 ‘문명과 예의’를 가르쳐 주려는 유럽이야말로 바로 그 ‘문명과 예의’가 가장 필요한 나라임을 꼬집는 말이다.“빛을 비추려는 인간에게 빛을 비춰야만 한다”라는 말도 이와 비슷하다. 이 문장에서 ‘빛을 비추다’는 표현은 2번 들어가는데, 앞과 뒤의 뜻이 좀 다른 것 같다. 전자는 ‘계몽시키다’ 혹은 ‘돕다’라는 뜻이라면, 후자는 ‘탐구하다’ 혹은 ‘알아내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이 문장을 다시 쓰면 ‘도우려는 자에게 (애초에 그가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가 되겠다.

실제로 후지하라는 ‘빛을 비추려는 인간’을 되묻고 비판한다. 먼저 유럽과 미국이다. 그들은 ‘인권’ 개념을 위한다면서도 아프리카에서는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착취한다. 그들의 위한다는 ‘인권’은 사실 그들 땅에 있는 자국민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철저히 다른 땅, 아프리카의 사람들을 인권의 ‘인()’에서 배제시켰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는 민주주의 역시 ‘모두를 포괄한다’는 이상을 표방하지만 사실상 특정 계층을 철저하게 ‘배제’시키고 있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그리고 이러한 배제에 ‘기아’가 아주 대표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나치 독일은 슬라브인(러시아인)에게 곡물을 가혹하게 수탈했고(‘기아 계획’과 ‘바르바로사 작전’), 러시아 역시 동유럽에서 소련 서부에 이르도록 수많은 이들을 굶게 하였다(‘블러드랜드’). 기아 정책의 무서운 점은 이를 시행하는 수뇌부가 살인의 죄책감으로 괴로울 일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식량 보급을 끊기만 해도 기아(飢餓)는 어느새 아사(餓死)가 되었다.

기아의 문제는 사회주의 또한 이는 벗어나기 어려웠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대약진’ 운동에서 기아를 해결하려 했지만 오히려 사태를 더 심각하게 만들어버렸었다. 일본도 군에서의 ‘병참’을 등한시하며 기아 문제를 심화시켰다. 저자는 정치의 중심, 행복 추구의 중심은 ‘먹거리’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대상에 선을 긋지 않”는 먹거리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이다(115).

농업·전쟁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정치 역시 ‘즉효성’을 기반으로 돌아갔다. 정치가들은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연설 기술을 갈고 닦았다. (민주적 절차로 시작된) 나치 또한 국민계몽·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를 선두로 매력적인 스피치를 청중들에게 선사했다. 이러한 문제는 현재에도 계속되는데, 저자는 일본이 나날이 재일조선인에 대한 혐오발언을 앞세운다고 말한다. 미디어 또한 소비자를 실시간으로 현혹하고 있다(120~121).

저자는 이토록 즉효성에 매몰된 정치 말고 ‘토론을 중시하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토론은 ‘즉흥성’을 기반으로 한다. 지도자로 본다면 ‘재상’의 ‘재()’는 본래 ‘고기를 칼로 공평이 자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즉흥성의 정치’는 국가에 모인 부를 ‘공평하게 재분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125).

3강을 다 읽고 나는 우리의 배부름이 다른 땅의 굶주림으로 가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식당에서 나온 고등어 튀김을 마저 다 못 먹고 식당을 나와 버린 게 마음에 걸린다.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것이 주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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