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인류학
두 손으로 도구를 다듬었던 인류의 지혜를 배우자
[전쟁과 농업] 먹거리와 농업의 재정의를 통해 전체를 생각하기
먹거리와 농업의 재정의를 통해 전체를 생각하기
후지하라 다쓰시는 『전쟁과 농업』(후지하라 다쓰시 지음, 최연희 옮김, 따비)의 시작에서 효율 중심의 경쟁 시스템을 비판했다. 이런 시스템이 바탕이 된 사회 안에서 농업과 먹거리 등의 정치는 빨리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시스템 안에서 시스템의 오류를 보기란, 그리고 달리 살아가기란 어렵다. 하지만 시작은 그것을 다르게 보는 데서 시작하고, 그 방법으로 그는 지금의 사회를 역사적으로 점검하고 달리 생각해보자고 했다. 그 과정의 하나로 그는 이 책의 5장에서 다른 시스템으로 방향을 바꿔갈 수 있는 시작점으로 식사, 농업, 교육을 다르게 정의하고자 한다. 그가 이 용어들을 다르게 정의하는 데는 어떤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먼저 우리가 기존에 이 용어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우리가 떠올리는 식사란 음식을 먹는 것, 농업이란 우리가 먹을 만한 식물들을 기르는 것, 교육 또한 아이들을 가르침으로써 기르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재정의하고자 한다. “식사는 음식물이 몸을 통과하는 현상, 농업은 자연을 거드는 것, 교육은 지켜보는 것.”(185쪽) 기존의 의미에서는 주어의 행위가 전적으로 느껴진다면, 후지하라의 정의에서는 주어가 보조적인 역할, 그러니까 도움을 주거나 일부분으로 관여를 하고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설명을 들여다보자.
그는 인간이 음식을 먹는 행위를 전 생태계의 순환 과정의 일부로 본다. 내 입에 들어오는 음식물은 자연에 의해 길러진(여기에서 농업이란 의미도 다르게 정의된다. 인간이 기르는 게 아니라, 자연이 기르는 과정에 인간은 조금 거들어 그 부분을 취할 뿐이다.) 것이고, 몸속의 미생물의 힘을 빌려 소화하고 배설하여 자연에 다시 되돌려 놓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식사는 내 입에서 맛을 느끼고 체내에서 영양소가 흡수되는 과정으로만 떼어내서 이야기할 수가 없다. 농업과 교육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농업과 교육을, 거들고 지켜보는 정도에서 정의하는 이유는 인간이 전적으로 대상에 어떤 영향을 가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재고해봐야 한다고 하는 게 아닐까.
먹거리와 농업을 말하면서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하는 데는, 효율과 속도 중심의 시스템이 사람을 기르는(농업이 식물을 기르듯이) 교육 현장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는 교육에서 먹거리가 빨리 처리해야 하는 즉효적인 일로 취급되어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지금의 현실에도 반대하며, 먹거리가 중심으로 와서 교육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발효를 통해서 들여다본 지효성과 우연성이다. 발효식품은 만들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음식이자 다양한 우연적 요소들에 의해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음식이다. 그는 앞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즉효성이 아닌 즉흥성을 강조했다. 즉흥성이란 그때그때의 상황과 주위의 조건 등을 고려해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발효식품 또한 그때그때의 다양한 요소들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런 것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농업과 교육을 한 방향으로만 일어나는, 부분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님을 생각하게 해준다.
또한 기존의 농업과 교육의 ‘기른다’는 그 동작이 한 방향으로만 일어나는 일방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그는 두 행위에서 기르는 자 또한 그것을 거들고 지켜봄으로써, 그러니까 그 과정에 관여함으로써 어떤 변화를 겪는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 변화 또한 기른다에 넣고자 한다. 그러니까 그에게 농업과 교육의 기른다는 행위는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적인 동작이고, 즉효성까지 고려했을 때 두 행위는 전체를 고려해야 하는 ‘다원적인’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