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기술 인류학

두 손으로 도구를 다듬었던 인류의 지혜를 배우자

 

[기술 인류학] 전쟁과 농업(3-2) 관으로서의 인간

작성자
붱붱
작성일
2024-10-30 01:17
조회
17

기술 인류학/전쟁과 농업(3-2)/24.10.31./붱붱

관으로서의 인간

“우리는 누구나 삼라만상의 세계를 떠도는 의지할 데 없고 탐욕스러운 관()입니다.”(159)

 

『전쟁과 농업』에서 저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우리가 도저히 ‘미소 짓’고는 살아있는 것을 생으로 먹지는 못하는 위인들이라고 말한다(155). 우리는 의식한다, 내가 먹고 있는 게 살아 있는 것이며, 그걸 감히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며 먹고 있다는 사실을. 스윽 몸에서 빠져나와 이 사실을 소름끼치게 목격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윤리적 부아’를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우리에게 ‘먹거리’가 현재 너무 멀어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먹거리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죽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비닐에 싸인 무언의 가공품으로만 이를 접한다. 인간이 살아갈 때 반드시 해야 할 ‘먹는 행위’에 대한 그러한 무감각은 다른 행위에까지 옮아, 우린 어느새 참 무신경하고 비윤리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사태가 왜 이 지경까지 된 걸까? 기본적으로 우리가 ‘삼라만상의 세계를 떠도는 의지할 데 없고 탐욕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탐욕’이라는 게 위험한 게, 이게 사람을 앞만 알고 뒤는 모르게 한다. ‘내 입’만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내 배를 바로 불리는 ‘즉효성’ 있는 것들만 찾다 보니, 우리에게 트랙터(1강)와 탱크(2강), 프로파간다(3강)의 기술이 확 가까워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다시 먹거리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를 ‘관’으로서 깊이 인지해야 한다. ‘관으로서의 인간’은 생명과 생명을 연결하는 존재다. 내가 먹은 것도 생명이요, 내가 싼 것도 (다른 생명이 거름으로 먹는다는 의미에서) 생명이다. ‘연결’은 먹는 자의 숙명이자 임무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알게 되면, 그 무엇보다 혼자서 ‘자기책임’(151)을 끙끙 앓지 않게 된다. 어느 것도 나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없고, 동시에 어느 것도 나 혼자 못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리고 가장 본질적인 행위인 먹는 일를 비롯해, 일하는 일, 노는 일, 글쓰는 일까지, 우리는 시종일관 ‘관’이다. 연결, 또 연결! 이 흐름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드넓은 맥락 위에 놓을 수 있다. 그렇게 여유가 생기고, 느긋해지고, 즉흥적일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꺼이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책을 보면 이 ‘다음’은 나라는 존재 너머에도 있는 듯하다. 책에는 기근 속에서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먹을 볍씨를 내어주며 스스로 굶어 죽은 한 ‘의로운 백성’이 나온다(24). 저자의 질문처럼 ‘먹는 행위’는 어디까지일까?(153) 이 인물을 생각하면, 먹는 건 존재를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