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인류학
두 손으로 도구를 다듬었던 인류의 지혜를 배우자
[기술 인류학] <작은 것이 아름답다> 두 번째 시간 후기
기술 인류학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두 번째 시간은 5장. 규모 문제에서 시작했습니다. 책 제목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인 만큼, ‘규모’라는 것은 이 책에서 참 중요한 키워드 같은데요, 특히 ‘작다’라는 게 뭘까 많이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핵심이 되었던 부분은 5장에서도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소집단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규모 단위의 다양성에 대처할 수 있도록 분절화된 구조를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91)였습니다. 이 ‘분절화된 구조’란 뭘까에 대해 세미나에서 토론하였고, 그 중 유리샘이 기차 예시를 들어주신 게 기억에 남습니다. 길다란 기차는 통으로 되어 있지 않고 부분 부분 끊어져 있되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커브를 돌 때 훨씬 더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죠. 그런 것과 같이 집단에서의 ‘분절화된 구조’도 좀 더 유연하게 각종 상황들에 대처할 수 있게 집단 사이 사이를 나누고 조직하는 것 같았습니다.
또 ‘뿌리 내림’과 ‘뿌리 뽑힘’ 사이의 대조를 이야기 나누었는데요, 뿌리를 내리는 것은 ‘서로 얽히다’와 유의어였습니다. ‘너’와 ‘나’가 구분되지 않고 뗄 수가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 생명이 풍부한 상태입니다. 반면 뿌리가 뽑힌 상태는 생명이 없는 상태입니다. 신기했던 건 ‘친하다’는 게 뿌리가 내린 상태보다도 뿌리가 뽑힌 상태에 가깝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친하다고 할 때는 되게 가깝고 그래서 더 연결되어 있고 그런 느낌인데, 이게 오히려 끼리끼리 논다, 비슷한 애들끼리 그냥 논다, 즉 같은 자아를 계속 고집하고 타인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다는 뜻으로 ‘뿌리 뽑힘’의 상태라고 볼 수 있나 봅니다. 반면 뿌리 ‘내린’ 상태는 슈마허 식으로 말하자면 ‘자기 임무’를 아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만물과 세계가 다 (좋든 싫든) (지독하게!) 얽혀 있음을 아는 것이죠. 이걸 모르는 사람을, 슈마허는 심지어 “타락한 자”라고 말합니다. 현대인의 소외와 불안, 초조가 다 이 타락에서 오는 거라고도 하는 듯하고요.
슈마허의 교육관은 이반 일리치와는 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학교 없는 사회’, ‘선생의 부재’의 중요성을 외치는 반면, 슈마허는 ‘어버이의 죄’, ‘스승의 교육’ 이러한 것을 강조하죠. 그렇다면 누가 맞는 걸까요?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고, 이 다양한 관념들을 우리가 품어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세미나에서 들은 말처럼, “한 권의 책만 읽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와 같습니다. 하나만 옳다고 여기는 게 가장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양한 관념들 사이에서 그때그때 ‘위계’를 정하는 일 같습니다. 존재도, 관념도 모두 위계를 정해야, 우리는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가 봅니다.
이때 이번 세미나 때 가장 중요한 페이지가 나오는데요, 바로 117쪽입니다. 몇 부분 옮겨보자면, “19세기의 관념들은 우주 내부의 위계제를 부정하거나 제거하지만, 위계질서 개념은 [우주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다. (…) 세계를 하나의 계단으로 보고 그 계단에서 인간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인생에 부여된 의미심장한 임무를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슈마허가 경제학이나 전문 지식보다 ‘인문학’을 더 (절대적으로) 높은 위계로 두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저는 좀 곱씹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문득 최근에 읽은 물리학 책의 한 부분이 생각났습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책인데, 저명한 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이 책의 틈새에서 아인슈타인이 죽은 친구의 누이에게 보낸 위로의 편지를 인용하며, “시간의 물리적 본질보다 더 깊은 것”(123)이 있다고 말합니다. 친구가 이 부분이 인상깊다고 말해서 다시 주목해보니, 생각해보면 물리학자가 어떻게 ‘물리학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말하자면 우리 각자의 ‘전문적인 분야’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것도 같습니다. 슈마허 관념으로 보자면 ‘더 높은 위계’인 게. 아인슈타인이 시간의 본질은 제쳐두고 친구 누이를 위로할 때의 그 마음(아인슈타인은 그 친구가 죽은 지 한 달 뒤 사망했다고 합니다.), 슈마허가 가난한 사람들의 기준에서 그들을 생각할 때의 그 마음…. 접점이 있을 것 같고, 그게 이 책의 제목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설명해줄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들은 다 작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작으니까요. 그리고 그 마음과 그 신체의 크기가 딱 맞아 떨어졌을 때, 그게 ‘아름다운’ 것인가.. 싶습니다. 기술 인류학 팀은 마지막 과제에서 일상의 ‘동사’를 (읽은 책들을 토대로) 새로이 바라보기로 했는데요, 저도 계속 생각을 늘려가봐야(어쩌면 줄여가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