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인류학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지금 여기의 삶을 완전히 긍정하는 주인공들의 세계를 탐험합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정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주인공의 삶이 어디로 이끌릴지는 아무도 모르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규정 지을 수 없는 존재들이 온갖 살 궁리로 복작거리는 숲에서 깔깔 웃고 떠들며 놀다 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삶에 감사하며 한 걸음 더 낯선 길을 나서봅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우연을 수용하고 마음껏 상상하는 것 뿐!
애니미즘, 우리에게는 낯선 인과 관계
안녕하세요. 동화인류학 연구실의 ‘영빨약사’입니다. 저의 직업은 약사입니다. 그동안 약발(약의 효험)을 공부했고 이제는 더불어 영발(발음은 영빨)을 연구해보려고 합니다. 더 위대한 영빨 근처에 가고 세상의 영빨을 느끼며 더 영빨 있는 자가 되어 영빨을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동화인류학을 공부하며 ‘치유란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치유와 관계성의 조합이 놀라웠습니다. 나와 내 가족만 건강할 수 없고 나와 내 가족만 건강해서도 안됩니다. 내 신체의 노병사(老病死)를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자신과의 관계와 더불어 타인과, 공동체와, 대지와, 우주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치유의 핵심입니다. 건강해지려면 내가 내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지구의 많은 부족을 연구하는 인류학을 통해 그들의 지혜가 담긴 치유의 처방들을 줍줍하여 나누고 싶습니다. 원주민 부족들은 현대인들을 치유할 마법과 주술과 약제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화 속의 마법사, 주술사, 샤먼, 요정, 산파 등 스스로 변신하고, 다른 것들을 변신시키는 것들을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변신 속에 치유의 길이 있습니다. 변신할 수 있는 신체가 건강하고 멋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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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 우리에게는 낯선 인과 관계
영빨약사
‘사람들은 기차를 탄다고 한다. 나는 실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기차로 간다고 한다.
나는 운반된다고 한다.’ (오선민, 『자유를 향한 여섯 번의 시도』에서 인용)
우리는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가는 것일까? 기차에 실려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전자의 인과 관계에 익숙하다. 내가 내 목적지로 가는 기차를 타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원시문화』(에드워드 버넷 타일러)에 나오는 많은 부족과 『은하철도의 밤』을 쓴 미야자와 겐지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보니 기차에 실려 있었고 기차가 가는 곳을 향해 운반되고 있다. 『은하철도의 밤』의 주인공 조반니는 켄타우로스 축제 날에 언덕에 누워 꿈을 꾼다. 꿈속의 조반니는 기차에 태워졌고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손에 열차표가 있다. 우리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권리–기차표가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열차는 정거장에서 멈추고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하고, 조반니의 옆에는 각 구간마다 처음 만나는 매번 다른 사람들이 오고, 이들과 조반니는 두서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진다.
애니미즘으로 사고하는 부족들은 기차와 기차를 움직이고 있는 ‘세상’의 관계에 관심이 많다. 기차가 이승이라면, ‘세상’은 이승과 저승을 모두 아우른 곳이며 생명이 탄생하는 곳이다. 인간은 기차 안의 윤리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기차 밖의 세상과 관계를 맺고 기차 안에서는 볼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윤리를 작동시켜야 한다.
이것을 동화인류학의 오선민 선생님은 마을과 숲의 관계라고도 말씀하셨다. 마을이 우리가 알 수 있는 보이는 세상이라면 숲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숲은 마을보다 더 훌륭하고, 힘세고, 풍요롭고, 생기롭다. 동시에 숲은 악마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힘이 있는 곳이며 죄의식이 없고 심판자가 없는 곳이다. 숲은 죽은 후의 세상을 포함한 곳이다.
우리가 사는 도시는 ‘기차를 움직이게 하는 세상’을 사유하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다. 도시는 오직 살아 있는 상태를 기준으로 죽음과 더러운 것을 감추고 소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 차는 밤에만 움직이며, 도시의 오물은 감추어져 있고, 무덤과 납골당은 도시 주변부로 밀려난다. 예전에 마을과 무덤은 같은 곳에 있었다. 농사 짓는 밭 옆에 무덤이 있었다. 죽음이 감추어져 있지 않았다.
우리는 내가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능동’의 인과 관계에 길들어져 있다. 그러나 생명을 탄생시키는 더 큰 세상(숲)을 생각할 때 우리는 ‘수동’의 넓은 배경 위에 ‘능동이라고 착각하는 삶’을 살다 가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기차에 실려 기차의 목적지까지 운반되고 있다.
애니미즘으로 사고하는 부족들은 ‘내가 무엇을 한다’라는 인과가 아닌, 모든 사물에 인격적 원인을 부여했다. 심지어 ‘나’라는 정체성 없이, 나에게 다가올 어떤 ‘영’을 기다린다. 태양, 달, 강, 바다, 산, 물, 동물, 식물, 사물 등 모든 것이 영혼을 가진 활발한 원인이다. 그들은 인간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죽은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다른 영혼들과의 교류 속에서, 그들과 관계 맺음으로서 ‘잘’ 살 수 있다.
동화인류학 수업에서 『나무의 신화』(자크 브로스)를 읽고 ‘아슈밧타’라는 거꾸로 세워진 나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인도 신화에서 우주목(우주를 탄생시키는 나무)으로 등장하는 아슈밧타는 뿌리를 천상에 두고 나뭇가지가 온 대지를 덮는 모습으로 거꾸로 그려진다. 나무의 위와 아래의 전도라니! 왜 이런 상징이 필요했을까? ‘아래를 향하여 가지들이 뻗어 있고 위쪽으로는 뿌리가 위치해 있으니, 저 높은 곳에서 빛이 우리에게 내려오는도다.’(『나무의 신화』,p74)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가 아닌 하늘에 뿌리를 박은 나무를 통해, 생명의 근원이 태양과 대기에 있다는 것이 진하게 느껴졌다. 하늘에 뿌리를 둔 나무의 줄기를 통해 태양 빛이 내려와 거대한 땅을 초록의 생명(자신의 줄기와 잎)으로 가득 덮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에너지에 대한 지식은 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아슈밧타 나무의 전도된 세계는 세상의 진실을 실감나게 전달한다.
애니미즘의 인과관계는 아슈밧타처럼 (우리가 알던 것과는 반대의) 전도된 인과관계이다. 애니미즘의 인과관계가 아직은 많이 낯설다. 그리고 애니미즘의 세계는 과학의 ‘사실’이 아닌, 수많은 신화와 이야기와 상징의 세계인데 이것들은 우리에게 세상의 진실을 감동적으로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애니미즘으로 세상을 보는 자와 과학의 합리주의로 세상을 보는 자에게 세상 속 인간의 위치와 역할은 완전히 달라진다. 나무가 흐느끼고 피를 흘리고 노래하고 행진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 숲을 파괴하기 어렵다. 숲이 파괴되어 깊은 숲 속의 수많은 요정과 저승의 입구와 생명수의 샘을 꿈꿀 상상력도 함께 고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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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인디언 애니미즘의 일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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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인류학 연구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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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moonse | 2024.06.23 | 2 | 112 |
치유술사 옥현 선생님의 연재가 시작되었군요. 나도 모르게 쥐어진 차표 한 장으로 만나게되는 관계에서 영력 깊은 치유술사를 만나게 되는 행운은 아무나 누릴 수 없죠~ 언제나 좋은 글로 저의 영혼을 잘 관리해주시는 옥현샘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애니미즘적 사고가 왜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기차에 실려 어딘가로 가고 있었네요.
나만 건강할 수 없고, 내 가족만 행복할 수 없다. 영빨이 곧 관계이며, 나는 모든 관계를 돌본다. ‘합리’ 너머의 생명력을 찾아, 영빨약사는 애니미즘의 숲을 탐험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