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인류학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지금 여기의 삶을 완전히 긍정하는 주인공들의 세계를 탐험합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정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주인공의 삶이 어디로 이끌릴지는 아무도 모르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규정 지을 수 없는 존재들이 온갖 살 궁리로 복작거리는 숲에서 깔깔 웃고 떠들며 놀다 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삶에 감사하며 한 걸음 더 낯선 길을 나서봅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우연을 수용하고 마음껏 상상하는 것 뿐!
[까마귀 농부의 동화 읽기] 대나무, 달, 소녀–가구야 공주 이야기
안녕하세요? 동화 인류 연구회 수습 연구원, 까마귀가 되어 날아간 농부입니다. 더운 여름 잘 지내고 계신지요? 힘드시다고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한여름 밤의 꿈인 양 덧없고 으스스한 옛이야기 한 자락 띄워 보냅니다. 오늘 올릴 글은 지난 학기 “치유의 인류학” 시간에 제출한 과제로, 푸른 대나무처럼 출중하고 아름다웠던 가구야 공주에 관한 글입니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보고 세미나에서 공부한 내용과 제가 공상한 내용을 토대로 썼습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세요.
대나무, 달, 소녀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지브리 애니메이션 《가구야 공주 이야기–공주가 지은 죄와 벌》을 보았다. 동화 인류 연구회에서 같이 세미나를 하고,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 주제 전시회를 나중에 따로 봤다. 보고 듣고 고민하는 과정 끝에 정리하고 싶은 것을 이 글에서 적는다. 생각을 여러 번 바꾸었기 때문에 이 글도 잠정적인 해석이 될 것 같다.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즐기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심각해져 버렸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본질을 생각하다 보면 삶의 태도에 대한 물음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만큼만 소박하게 쓰자고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가구야 공주가 그리는 선 : 직선, 동그라미, 얽힘
인문세 특별 세미나 덕분에 읽게 된 팀 잉골드의 ‘선’(line) 시리즈는 세상을 선으로 바라보는 시력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주요 소재인 대나무, 달, 소녀의 행보를 선의 관점에서 보면 직선, 동그라미, 얽힘을 그릴 수 있다.
쭉쭉 뻗는 대나무의 직선
대나무는 수직적이다. 지상에서 하늘로 곧게 뻗는다. 무당집이나 논에서 하늘 기운을 받으려고 대나무를 꽂아 놓은 장면을 볼 수 있다. 상승과 하강은 수직의 운동이다. 가구야 공주는 금기를 어긴 벌로 하늘에서 추락한 자로 설정된다. 대나무를 통로로 지상에 온 가구야가 만난 첫 사람은 나무꾼이자 공예가인 대나무장이다. 자식 없이 늙은 대나무장이는 가구야를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로 받는다.
때 이른 죽순으로 솟아나서 어린 대나무처럼 무섭게 자라나는 신체적 성장의 선과 함께, 고귀한 귀족 아가씨로 갖추어지는 신분 상승의 선도 수직적이다. 함께 자란 두메산골 아이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부, 아름다움, 인기, 재능의 사다리를 타고 높은 위치에 오른 가구야는 천황의 배필감이 된다. 그런데 상승의 선은 멈출 줄을 모른다. 황실을 넘어 천상으로 올라가 버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기 때문이다. 땅속에서 솟아나 인간 모두가 우러러보는 위치로 상승하는 가구야 공주는, 결국 그가 기원한 원점인 달로 다시 돌아간다.
돌고 도는 동그라미, 달
가구야 공주의 집은 어디인가? 가구야 공주는 여기저기 집이 많은데, 공식 소속은 달이다. 달은 돌고 돈다. 동그란 달이 동그란 지구 주위를 공전하면서 자전하는 동안 밀물과 썰물이 교대하고 만월과 삭월이 갈마든다. 달이 그리는 선은 원형이다.
달에서 온 가구야 공주가 지상에서 그리는 동선은 달의 궤도를 닮았다. 핵심점에 다가가지 않는 왕복은 직선이 아니라 중심점의 둘레를 도는 원 모양을 형성한다. 산골과 수도를 오가는 그의 행보는 꿈꾸던 것에 가닿지 못하고 출발점으로 돌아오기의 반복이다. 교외로 벚꽃놀이 나갔다가 허무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짧은 나들이길에서도 원운동의 패턴이 보인다. 만개한 벚꽃 아래서 가구야 공주는 빙글빙글 돌면서 혼자 춤을 춘다.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아기가 공주를 툭 건드린다. 가구야 공주는 ‘현타’ 온 사람처럼 멈춰 서 있다가 갑자기 일정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가구야 공주는 결합하지도 못하고 벗어나지도 못한 채 둘레를 빙빙 도는 궤도 위에 묶여 있는 것 같다.
원과 나선의 운동은 다르다. 원운동은 닫힌 고리 안에서 영속되는 반복 운동이다. 윤회를 연상시킨다. 한편, 나선 운동은 주변의 사물을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여서 어디론가 이동시킨다. 지상에서의 삶은 진공을 도는 달의 원운동과 다르다. 생명은 돌개바람이나 소용돌이 같은 사물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려가 이동하며, 무상한 변화 속에서 출발점을 찾을 수 없고 원상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래서 가구야 공주가 달로 원상 복귀하려면 지상의 관계를 끊고 기억을 지워야 된다. 그런데 달의 거주민들은 접촉 금지라는 금기를 깨고 지상과 인연을 맺어왔다. 그 때문에 달은 지구에 얽혀 지구의 둘레를 영원히 맴도는 것이 아닐까? 그 덕분에 지상의 사람들은 영원한 순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다.
선의 얽힘, 제작과 양육
달나라 선녀님에게 금단의 열매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사람의 정을 키우는 것’이라는 노래 가사에 표현된 대로 지상의 인연에 얽히는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자마자 가구야 공주는 여러 인연에 휘말린다. 팀 잉골드의 표현에 따르면 사회생활은 선의 얽힘이다. 선들이 서로 얽히고 풀리고 하면서 저마다 고유한 행로를 펼쳐가는 것이 사회적 삶이다. 그렇게 얽히는 와중에 경로가 바뀌고 속도도 변한다. 선의 행로에서 핵심은 두 가지다. 연속과 변화. 선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멈춘 듯해 보인다면 그것은 펼쳐갈 에너지가 응축되어 긴장된 상태이다. 선은 언제나 반드시 더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얽힘으로 새로워진다.
대나무장이 부부가 가구야 공주를 양육하는 이야기는 제작과 양육 사이의 공통점을 시사한다. 팀 잉골드는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에서 제작이란 자연물의 생명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성장 방식에 새로운 주기를 개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팀 잉골드가 예로 든 서태평양의 카누 제작자는, 숲에서 자라던 나무의 삶의 과정을 끝내고 바다의 배라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나무에게 열어준다. 항아리도 마찬가지다. 땅에 속한 물질인 점토가 도공의 ‘어루만지고 달래는 손길’을 통해 항아리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팀 잉골드는 자연물을 새로운 생활 주기로 진입시키는 제작자에 빗대어 부모의 양육을 설명한다. 인간 부모는 뱃속에서 자라던 아기를 세계 속 새로운 생활로 수월하게 이행하도록 돕는다.
나아가, 소녀가 여자로 성장하는 것은, 팀 잉골드가 인용한 인류학자 빅터 터너의 말대로 ‘존재론적 변환’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환은 통과 의례를 거쳐 일어난다. 가구야 공주는 명명식과 옷 입기 의식을 마치고, 생존과 소통을 위한 기예들을 전수 받는다. 이것으로 귀족 사회의 일원이 되어 결혼할 짝을 찾을 준비를 마친다. 소녀 시절을 끝내고 성인 여자로 살아가는 문턱을 통과하는 순간이다.
공주의 난제, 결혼을 왜 해야 하나요
가구야 공주는 헤이안 귀족 사회에 난제를 제기한다. “도대체 왜 결혼을 해야 하나?”하는 문제이다. 대체 왜인가? 이 질문은 현대 여성들의 마음에도 공명하는 오래된 물음일 것이다.
가구야 공주가 결혼하기 싫어한 나머지 지상의 삶을 중단하는 이유들을 영화 속에서 찾고 있던 나는 세미나 마지막 날 충격에 빠졌다. 세미나를 이끌어주시는 달님은 그 어떤 이유도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가구야 공주가 결혼을 거부하는 것은 낳음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낳음을 거절하는 것은 더이상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가구야 공주가 왕의 구혼을 거절하며 차라리 죽겠다고 부모 앞에서 말할 때 나는 딸과 아버지 사이에서 곤혹스러운 입장이었다. 양쪽의 입장이 다 이해되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나도 답 없이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낳음을 거부한다는 것은 우선, 말 그대로 출산과 양육 행위의 거절이다. 출산과 양육은 왜 하는 건가? 그것은 생명이 왜 지속되어야 하는 건가 묻는 것과 같다. 삶을 이어가는 것에는 앞서 존재하는 목적이 따로 있지 않다. 어떤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손익을 따져서 이익이 있을 때 조건부로 생명 쪽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생명이란 계속 펼쳐지는 선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 낳아지는 것이다. 살아가는 중에 다가오는 사물과 사람들과 합류하여 새로이 겪는 사태들의 소용돌이가 사람의 삶을 형성한다. 이러한 겪음의 과정에서 그동안 받아온 양육과 교육의 손길들이 기억나면서 고유한 길을 새로 열어가는 솜씨로 발휘된다.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통과하면서 가보지 못했던 지점들에 도달하고 본 적 없는 시야와 예상 못한 능력들을 장착하며 몇 차례고 새로운 인간으로 변모하는 것, 그런 것을 성숙이라고 한다. 이것이 가구야 공주가 거부하는 앞으로의 삶의 연속적인 차원들이다.
시련을 통한 갱생, 즉 낳음/낳아짐을 거부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무감응과 망각의 세계로 진입한다. 불필요하니까 결합력, 감응력, 소통력, 기억력이 모두 쇠퇴한다. 유령처럼 살아가면서 왜 흘리는지도 모른 채 눈물을 흘린다. 달나라는 참 우울한 세상이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
이 작품은 타카하타 이사오(1935~2018)의 유작이다. 70대에 접어든 이사오 감독이 무려 8년에 걸쳐 완성한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가구야 공주가 그렇게 오고 싶어 했고, 결국 이별해야 하는 지상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답게 펼쳐지는지! 연필이나 붓으로 그린 듯 가벼운 선들이 살아 움직인다.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산천초목이 부드럽고 밝은 색감으로 칠해진다. 인물의 감정이 분노로 폭발할 때는 선도 거칠어지고,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면 화면도 갈색 필터를 끼운 듯 어두워진다.
한편, 주된 스토리와 상관없어 보이는 제작과 양육의 장면들이 표현된다. 예를 들면, 엄마가 반죽을 하는 동안 아빠는 대나무 살을 다듬는다. 주어진 도구를 기막히게 사용해서 그릇을 제작하는 화전민들의 작업장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젖먹이부터 아장아장 걷는 평민 아기들이 돌봄의 손길 속에 어우러져 자라고 있다. 그 연장선 상에 작품을 만들고 캐릭터를 양육하는 또 하나의 손길이 있다. 힌트를 얻을까 싶어서 찾아본 동영상에서 타카하타 이사오 팀이 공을 들이는 장면의 사례는 정말 의외였다. 그들은 칼로 참외를 자르는 장면이 두부 써는 것과 다른 느낌이어야 한다며 시간을 들여 이렇게 저렇게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작업은 더뎌질수록 비용도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개봉 일자를 미루더라도 작업 방식을 타협하지 않았다고 하는 감독 자신이, 작품 속 천 년 전 제작자와 양육자들에게서 닮은꼴을 찾은 건 아니었을까? 무언가를 만들고 키우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삶에 임하는 태도를 생각해볼 때,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이지 ‘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사오 감독이 창조한 가구야 캐릭터의 현재성
결혼하기 싫어하는 아가씨 이야기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각색되었다. 헤이안 시대에 그림책 두루마리로 귀족 사회에서 유통된 『다케토리 모노가타리』는, 현대에 이르러 당돌한 여자아이의 성장기로 그려진다.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의 가구야는 귀족 여성으로서 구혼자들과 서한을 주고받는 문자 사용자이다. 이 책에서 가구야는 훌륭한 예술작품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주는 존재로 표현된다. 한편, 타카하타 이사오의 가구야 공주는 가정 교사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들고, 성인식 도중 가출을 하지를 않나, 산골 청년과의 비밀 연애의 꿈을 꾸기도 하는 반항아다. 구혼담이 주된 스토리인 헤이안 고전 소설에서 가구야는 석달 만에 어른이 된다. 이와 달리, 이사오 감독은 공주의 유년 시절 성장 스토리에 작품의 절반을 할애한다. 가구야 공주는 음악적 재능을 꽃피우는 젊은이로 성장하여, 벽장 같은 규방을 뚫고 나가 변화무쌍하고 드넓은 대지에 안기고 싶어 하는 캐릭터로 창조된다. 실내 생활을 하다가 달로 돌아간 헤이안 고전 속 가구야 공주와 달리, 이사오의 가구야는 귀족의 옷을 훌훌 벗어던진다.
현대의 가구야 공주는 기억을 잃기 직전 짧은 해방의 비행을 감행한다. 결혼을 거부하며 날고 뛰는 이 맹랑한 아가씨를 하늘과 땅이 감싸 안는다. 공주의 복장을 벗은 가구야는 햇빛, 창공, 비를 감촉하고 땅 위에 인간과 자연이 그려낸 풍광에 두루 접촉하며 바다 속에 풍덩 몸을 담근다. 파노라마처럼 그려지는 이 장면들을 통해 전달되는 작품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자기 한 몸을 넘어서는 시야를 확보하라.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지금의 어둠을 뚫고 나가라. 크고 아름다운 세상을 마음에 담고 하루하루 소중한 삶을 펼쳐가라. 겪을 가치가 있어서 겪는 것이 아니라, 네가 겪음으로써 세상에 가치를 낳는 거란다.
옛이야기의 으스스함, 선녀들이 떠나도 이야기는 남아 있다
결혼을 거부한 귀족 아가씨로 살았던 하늘나라 선녀님의 짧은 생은 여기서 끝난다. 다시 겹겹이 옷을 갖춰 입고, 고통 없는 무감각의 달 세계로 호송된다. 가구야 공주는, 귀족 선생님께는 웃지도 달리지도 않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부르짖고, 부처님 앞에서 슬픔과 아픔도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라고 외친다. 마치 반항하는 사춘기 소녀처럼. 소녀는 결국 문턱을 넘지 못했다. 모처럼 세상에 와서 스스로 겪고 발견한 그 가치들을 열쇠로 더 이상의 낳음과 겪음을 열어가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결혼 생활을 거절하고 하늘로 돌아가는 선녀 이야기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둥근 달을 바라보며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To be continued.)
*참고도서
『다케토리 이야기』(지식의날개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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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름다운 가구야 공주가 지상의 인연의 얽힘이라는 문턱을 넘지 않으면 결국 달의 무감각한 세계로 간다는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크네요. 산다는 것은 얽힘을 받아들이며 제작자와 양육자가 되는 것. 선의 얽힘 속에서 스스로 변환되고 타자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여 존재론적 변환을 일으켜라 ! 생명의 삶에 왜라는 이유는 없다. 그저 선을 그리며 나아갈 뿐이다.
선생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올리고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요.
떨리는 마음을 딛고 연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가구야 공주는, 귀족 선생님께는 웃지도 달리지도 않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부르짖고, 부처님 앞에서 슬픔과 아픔도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라고 외친다. 마치 반항하는 사춘기 소녀처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있는 저를 생각해봅니다.
“겪음”은 세상의 “얽힘”을 엉망진창, 뒤죽박죽 받아들이고 싸우고 반항하고 받아들이고 깨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잘 나가는 동화인류 연구실 글 잘 읽고 갑니다.
연구실 방문을 환영합니다. 온몸을 던져 반항하고 깨지는 겪음! 샘, 감사합니다.
가구야 공주가 대나무 순에서 태어나고, 죽순 아이를 기르는 부모가 하필 대나무로 바구니를 짜서 파는 사람들이라는 설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하다 말았었는데요. 선생님 마무리 글을 읽다보니, 대나무가 바구니가 되기 위해 생겨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삶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머무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를 도구로 쓰며 살아가고 누군가의 도구로 사용되다가 사라지는 당연한 순환 속에 있다. 다른 존재를 도구로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스스로 다른 존재를 위한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며 자기만이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나를 꾸짖는 것 같습니다. 글로써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반장선생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나무를 베어다가 손질해서 솜씨 좋게 엮어내는 대나무장이와 그 손에서 태어나 쓰임을 얻는 그릇들이, 서로에게 도구가 되어 주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