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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인류학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지금 여기의 삶을 완전히 긍정하는 주인공들의 세계를 탐험합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정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주인공의 삶이 어디로 이끌릴지는 아무도 모르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규정 지을 수 없는 존재들이 온갖 살 궁리로 복작거리는 숲에서 깔깔 웃고 떠들며 놀다 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삶에 감사하며 한 걸음 더 낯선 길을 나서봅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우연을 수용하고 마음껏 상상하는 것 뿐!

[까마귀 농부의 동화 읽기] 이야기한다는 것

작성자
coolyule
작성일
2024-10-25 21:21
조회
197

 

이야기한다는 것

-안데르센 동화 “종이 떨어진 깊은 곳”을 읽고

 

 

  큰 강이 흐르는 지역에 사시는 분이 계신가요? 그 강물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 팍팍한 인생길을 가다가 다리 위에서 몸을 던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면, 강바닥에 해골들이 있겠네요? 옛날에 가라앉은 배도 남아 있겠지요? 시대별로 강에 빠뜨린 물건만 해도 박물관 소장품 못지않을 거예요. 자루에 담아 버린 범죄의 증거물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직접 확인하고 싶나요?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합니다.

  안데르센이 태어난 덴마크 오덴세에도 강이 흐르는데요. 깊은 데서 종소리가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 소리가 들리면 누군가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으스스한 도시 전설도 있나 봅니다. 강이 생겨나던 먼 옛날부터 인어 할아버지도 한 분 살고 계시다고 해요. 뱀장어 가죽 바지에 은색 비늘 장식 웃옷 차림인 이분의 패션은 수련 잎 단추로 완성됩니다. 독거 인어 노인이 워낙 외롭고 심심하다보니 우리가 스마트폰 켜듯이 자주 종을 치지요. 그러면 종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합니다.

  종이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냐고요? 그걸 알려면 대체 이 종이 왜 제자리를 벗어나 엉뚱하게 물속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 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안데르센 시대에 이미 전설로만 남은 교회 건물의 종탑에 걸려 있었던 종이예요. “뎅그렁! 뎅그렁!” 교회 예배 시간을 알리던 종이 어둡고도 힘든 시절에 관한 이야기들을 간직하게 되었답니다.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이 묻어둔 비밀, 음침한 범죄, 배반, 죽음 같은 암울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의 무게에 그만 종탑에서 떨어져 굴러간 거예요. 종이 떨어질 때 탑 밑에 누가 없었기를 바랍니다.

  강물에 수장된 교회 종의 신세를 생각하니 사물에게도 기구한 팔자라는 것이 있는가 싶습니다. 보란 듯이 높이 걸려 있던 종은 이제 버려진 채 잊히겠죠. 종의 종말이니 ‘멸종(鐘)’입니다. 하지만, 반전이 있습니다. 깊고 어둡고 조용한 곳에 ‘듣기를 청하는’ 존재가 있었던 것이죠. “강물의 정령”이라고도 불리는 아까 말한 인어 할아버지입니다. ‘듣고 싶어하는 귀’야말로 바로 이야기가 탄생하는 조건이랍니다. 그런데, 인어 할아버지와 종이 만난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요? 안데르센이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들었다고 합니다. 안데르센의 귀가 들었기 때문에 지금 이 이야기가 전자 시대의 인문세종 홈페이지에까지 전해지는 것이지요. 만약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는 강바닥에 수장된 교회 종 신세와 다름없는 거랍니다.

  운명의 반전이랄까요. 종 인생의 역전은 이야기 행위를 통해 일어납니다. 종이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가 공기 방울처럼 수면으로 떠올랐어요. 마치 무덤에서 일어나고 저승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 같은 반전입니다. “부활”과 “현전”이라는 낱말이 떠오르네요. 원리상 귀신의 “출몰”과도 같아요. 유기했거나 살해한 것들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오는 건 범인의 입장에서는 무서운 이야기고요. 희생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에 대한 복수입니다. 살아나지 않는다 해도 물에 빠진 사람이 시체로 떠오르면 목격자는 기절초풍하겠죠. 이야기가 안 좋은 쪽으로 흐르는 듯해 분위기를 추슬러 보겠습니다. 늪에 빠졌다가 연잎을 타고 올라오는 이집트 공주 이야기나, 바다에 투신하지만 공기의 정령이 되어 상승하는 인어공주 이야기는 어떠신가요? 모두가 추락했다가 상승하는 계열의 모티브를 사용합니다. 이런 역전이 이야기하는 일 자체의 속성이기도 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떨어진 종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야기한다는 것은 깊은 곳에 무겁게 가라앉은 것을 가볍게 띄워 올리는 기술이군요. 한갓 소리로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로 바뀌는 데에는 기억력과 화술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듣는 이의 존재야말로 강력한 부력입니다. 종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청해 듣는 인어 노인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듣고 서로 전하면 이야기가 더 살아나겠지요? 다시 가라앉지 않으려면 수평 방향으로 멀리멀리 보내는 여행 능력이 작동해야 합니다.  

  어디까지가 ‘멀리’일까요? 이야기가 퍼져나가는 범위는 공기가 닿는 범위로, 공간적으로는 ‘온 세상’, 시간적으로는 ‘영원’입니다. 그래서 물의 정령의 바통을 이제 공기가 이어 받습니다. 공기와 바람 형제는 이야기 전달의 달인입니다. 새들처럼 이들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우리도 이야기 유통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답니다. 먼 옛날 교회 종이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이유는 바람이 잘 통하는 종탑 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결국 무거워서 추락하긴 했지만, 이야기는 공기를 타고 여행 할 수 있답니다.

  안데르센에게 동화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전래된 이야기들을 빌어 생겨난 ‘동화’ 장르는 그가 멀리까지 다닐 수 있게 해준 여행 도구였어요. 늘 여행을 다녔던 안데르센은 기차 타고 마차 타고 여행하듯이 이야기를 타고 다닌 거예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여행하고, 보고 듣고 이야기를 만들면서 살아갔잖아요. 안데르센은 어려서부터 이야기로 입신과 출세의 길을 열어 갔어요. 그것 밖에는 가진 게 없었다고 해야 맞겠죠. 초면인 사람의 집에 찾아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어 거처를 마련하고 공부 비용을 지원 받았어요. 가난한 소년의 도시 정착 시절은 자기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들에게 많은 부분 좌우되는 것이었어요. 안데르센에게 동화란, 멀리 갈 수 있게 해주는 여행 구두였어요.

  오랫동안 이어진 인간 행위인 이야기하기는 동화 창작의 시대부터는 동화 작가를 싣고 갑니다. 그전까지 민담은 개별 작가들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 주진 않지요. 민담은 인류 무의식이라는 공동의 강으로부터 떠올라 입에서 입으로 익명의 민중들 사이에 전해지고 공유되고 다듬어졌어요. 한 사람의 작가가 쓴 동화가 불멸의 작품이 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그 이야기를 길러 올린 강은 계속 흐른다는 게 새삼 두근거리게 하네요. 이야기는 흐른다. 인어 할아버지가 계시는 한! 인어 노인에 대해 들은 할머니가 손주와 마주 앉을 수 있는 한! 어쩌면 우리 시대엔 인공지능 로봇이 이야기하는 종(鐘)의 자리를 이어받을지도 모르겠네요.

  오늘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언젠가 혹시라도 오덴세 강을 접할 기회가 있다면 저는 안데르센이 들려준 강 밑의 종을 떠올리게 되겠죠? 여러분이 사시는 곳에 있는 강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강물 아래 깊은 곳에는 무엇이 가라앉아 있는지 짚이는 바가 있으시다면 이야기를 청해도 될까요?


글: “종이 떨어진 깊은 곳”(Klokkedybet; The Bell Deep) 『안데르센 동화 전집』(현대지성)

삽화: https://www.hcandersen-homepage.dk/


전체 1

  • 2024-10-27 08:57

    강의 가장 깊은 곳은 오래 전 수도원이 있던 자리이고, 그곳에 떨어진 종이 강물의 정령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은 고해성사를 떠올리게 하네요. 남몰래 하는 것 같은 고해성사도 종소리처럼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군요. 공기와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전해져 우리들에게도 이르렀네요. 이야기는 안데르센의 여행 구두라는 선생님의 해석이 멋집니다. 유리샘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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