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인류학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지금 여기의 삶을 완전히 긍정하는 주인공들의 세계를 탐험합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정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주인공의 삶이 어디로 이끌릴지는 아무도 모르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규정 지을 수 없는 존재들이 온갖 살 궁리로 복작거리는 숲에서 깔깔 웃고 떠들며 놀다 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삶에 감사하며 한 걸음 더 낯선 길을 나서봅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우연을 수용하고 마음껏 상상하는 것 뿐!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영(靈)’적 존재들
동화인류학 연구실 연구원들이 연재를 시작합니다. 인류학이 삶을 다르게 보는 안목을 갖는 공부라고 한다면, 동화인류학은 그것을 동화에서 발견하는 공부입니다. 동화 속 존재들이 멈춤 없이 걷는 세계는 한없이 넓고, 그 길은 참으로 다채롭습니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존재를 긍정하며 나아가는 주인공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른 곳에 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주 금요일 동화인류학 연구원들과 함께 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첫 번째 순서는 동화인류학 연구실 ‘깔깔 마녀’ 최수정입니다. 동화에서 아이들을 괴롭히는 마녀는 원래 친엄마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끔 친엄마 맞냐는 소리를 많이 한 걸 보면 진짜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깔깔 마녀’인 이유는 사납고 사악한 마녀가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허당’이기 때문입니다. 엄마를 마녀처럼 신비스럽고 마술적인 존재로 알았던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제는 엄마의 말과 행동을 신뢰하지 않고 ‘깔깔’ 거리며 웃습니다. 오래 알던 친구들도 제가 지키려 했던 신비주의가 사실 별거 아님을 알아챘습니다. 이제는 서로 얼굴을 보며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웃음부터 터뜨립니다. 인류학 공부의 좋은 점은 진리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입니다. 끝없이 달라지는 조합이 있을 뿐, 절대적으로 알아야 할 것도 없고, 꼭 붙잡고 있어야 할 것도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절로 웃음이 납니다. 그중에서도 지금 당장 내가 즐겁게 살 수 있다면 몰라도 틀려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동화야말로 ‘깔깔 마녀’에 딱 맞는 공부입니다. 이제 더 이상 비밀스러움을 짐짓 가장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마녀 ‘깔깔 마녀’와 함께 읽는 동화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영(靈)’적 존재들
깔깔 마녀
동화인류학을 시작하며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dward Burnett Tylor, 1832~1917)의 『원시문화』를 읽었다. 그런데 동화를 읽겠다고 모인 우리가 왜 원시문화의 애니미즘을 공부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타일러의 표현대로 ‘인류 가운데 매우 낮은 단계의 부족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원시적 교리들을 왜 우리가 알아야 하는가? 영적인 존재들을 믿는다는 것과 동화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애니미즘이란 만물에 ‘영(靈)’이 있다고 하는 이론이다. 만물은 인간, 동물, 식물, 사물까지 그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다. 다양한 형태를 갖는 물질적 존재들은 표면적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형태를 벗어난 차원에서 보면 동등한 위계를 갖고 있다. ‘영(靈)’이란 에테르적 존재로서 총체적으로 하나인 이들은 물질적 형태를 옮겨 다니며 실질적 차이를 만든다.
달님은 세계를 이 애니미즘의 방식으로 보게 되면 우리의 행동방식이 바뀔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존재들에게 인간과 같은 동등한 ‘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만물을 대할 때 좀더 조심스러워진다. 나와 나 아닌 것들로 구분하던 사고방식들이, 나와 다른 존재들이 어떤 연속성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바뀐다면, 나의 행동 또한 바뀔 수밖에 없다. 다른 존재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그들이 상호의존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느낄 때 저절로 그들을 나처럼 존중하게 되고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가 만물에 깃든 ‘영’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홀로 고립된 존재로 느끼지 않게 된다. 만물의 영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느끼고, 그들 속에서 완전함을 느낄 수 있다면 두려움과 외로움 같은 고독감이 자리 잡을 곳이 없다.
‘영’은 물체적 존재다
애니미즘 세계에서 만물에 들어 있는 ‘영’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 있었으나 볼 수 없었던 것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의 스펙트럼을 넓힌다. 눈에 보이는 현실뿐만 아니라 환상의 세계까지 실재성을 넓히고, 이 세계의 공적, 사회적 세계의 범주를 확대하며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모든 것이 살아 있다고 할 때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경험될까? 나와 다른 무엇을 구별할 수 있을까? 내 ‘영’이 어디로 갈지 모르고 어떤 것이 나에게 올지 알 수 없게 되면서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인간이라는 물체적 조건에서 잠깐 머물러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나’라는 존재가 따로 없음을 깨닫게 된다.
타일러에 의하면 애니미즘은 고대인들이 삶과 죽음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였다고 한다. 만물에 ‘영’이 있고 ‘영’은 그 만물을 드나들며, 사물에 생기를 부여한다. 타일러의 애니미즘은 이 세계 속에 ‘영’이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영적인 존재들은 다분히 ‘물체적’이라는 말은 몸이 소멸된 후에도 연속적인 실존을 유지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에 거주하는 영들이 잠시 이 세계에 들를 때 다니는 길도 있고, 정해진 곳에 와서 식사도 한다. 영들은 이편이나 저편이나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실체적 존재다.
『신성한 용기』에서의 ‘영’, ‘혼’은 진화하고 성장했다. 그러나 타일러의 『원시문화』에서는 ‘영’의 ‘진화’나 ‘성장’을 말하지 않는다. 죽은 영혼이 자신에게 나가 다른 몸으로 들어간다. 사람 혹은 동물이나 식물로 옮겨 가며 움직인다. 또는 여기 있지 않고 저편에 간다. 『원시문화』의 ‘영’은 달래고 조심해야 하고 몸체를 바꿀 때마다 상태가 바뀐다. 고귀하거나 비천하거나, 조건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맞닥뜨린 세계에 얼마나 많은 생명력으로 참여하는지에 따라 영혼의 성질이 바뀌는 유동적 존재다.
영적 존재들의 관계
타일러의 『원시문화』 에서는 동물의 ‘영’에게 복수하지 않기를 간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달님은 이를 자신들이 어떤 윤리적 인과관계에 들어갈 때 적극적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일 때 강한 부담을 느끼고 이를 줄이기 위해 변명이나 회피, 간청을 하는 이유는 내가 먹는 것은 그의 ‘영’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보기에는 이것이 ‘조롱’을 하는 것 같기도 한데, 이는 영혼의 ‘위계’를 규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현실 너머의 세계에서는 동등하지만 현실 세계에는 위계가 정해져 있어야 수많은 영혼과 함께 사는 이 세계의 책임과 관리를 이야기할 수 있다.
애니미즘 세계에는 ‘희생제의’가 있다. 이 의례를 통해 죽은 자의 영혼을 따라갈, 산 자를 함께 묻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영이 소중하고 고귀한 애니미즘 세계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는데, 달님은 고귀한 ‘영’이 갖는 관계성을 봐야 한다고 했다. 어마무시한 생명력으로 넘치는 왕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세계 전체가 요동친다. 그래서 그런 힘을 책임지고 관리할 관계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개별 ‘영’에게는 산발적이지만 내가 먹는 빵의 ‘영’이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왕과 같은 위대한 영이 사후세계로 돌아갈 때 그의 모든 관계를 함께 돌려보낸다. 고귀한 영을 위한 관계성 자체가 세트로 이동해야 한다. ‘영’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것은 그 관계 전체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애니미즘에서 볼 때 개인적 성취는 죽을 때까지 관계의 성취와 함께 한다.
죽은 영혼을 관리하기 위해 가끔 불러 밥을 먹이며 기쁘게 한다. 그 기쁨과 함께 돌아가 이곳을 잊고 자신들의 시간을 살게 한다. 저편의 시간 속에서 잘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가끔 초대를 한다. 그러나 저편과 나는 완전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의례’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고 경외한다.
타일러와 레비스트로스
달님은 타일러와 레비스트로스를 잠깐 비교해 주셨다. 두 인류학자 모두 관계를 중시한다. 그러나 그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랐다. 타일러는 영혼을 믿는다. 영혼은 너무나 실재적이라 느껴진다. 그것은 오랫동안 인류에게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타일러는 영혼을 믿고 자기 ‘영’을 기쁘게 하는 방법으로 『원시문화』를 썼다. 『원시문화』는 타일러의 영에 들어가 있는 수많은 원시의 ‘영’이 함께 조응한 결과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산업혁명과 공리주의가 성행하던 때, 그 시대의 공리로 주장되던 쾌, 불쾌, 성실, 근면에 대한 반시대적 고찰이었다.
반면 레비스트로스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야생의 사고』를 썼다. 레비스트로스는 ‘죽은 자’는 여기 오지 말고 거기서 잘 먹고 있어야 한다. 거리를 둔다. 각자의 자리에 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아직 『야생의 사고』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다음 시즌을 기대해 본다. 그때 타일러를 떠올리며 읽는다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영속되는 관계
애니미즘 세계는 인간만의 조건으로 바라보는 시야를 더 넓힌다. 내가 죽고 없어도 영속하는 것들이 있다. 나의 영혼이 잠시 정박한 곳이 바로 ‘나’다. 하나의 영혼이 삶의 수행지로서 잠시 머무는 곳이 나의 몸이라고 생각하면, 세계가 확장되고 어떤 경외심과 함께 내 삶을 끌어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 안의 ‘영’을 기쁘게 하기 위해 건강해져야 한다. 영을 기쁘게 하는 생명력을 증가시켜,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우리 삶에 두려움, 외로움이 있지만, 나를 둘러싼 만물에 나와 같은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이 연속된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응원을 받는 것 같다. 손해, 죽음, 고통조차 받아들이며 이 순간의 생명력에 기뻐할 수 있을 것 같다.
원시사회는 사회적, 문화적 관계가 영혼과 연관된다. 영혼의 존재와 함께 하는 경제방식이 있다. 마르셀 모스가 말하는 <증여>의 의미를 생각해 볼 시간이 또 있을 것이다. 모스는 교환과 증여로 영력이 증식한다고 했다. 관계의 영력이 증가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설명한다고 한다. 애니미즘에서 시작해서 교환과 증여의 경제방식으로 존재하기까지.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영혼이 영속될 때마다 힘이 증가한다. 그 생명력에 어떻게 개입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니 기대가 된다.
타일러가 바라본 애니미즘 세계에서 영혼은 반드시 ‘몸’(나)를 통과해 활약할 수 있다. 삶의 물체적 조건은 내가 만든다.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주어진 조건과 함께 해야 될게 너무 많아진다. 애니미즘 세계에서는 ‘인간’개념 또한 완전 다르다. 이런 조건에서 ‘정의’ ‘도덕’은 무엇일까? 애니미즘은 도덕성의 문제, 선과 악으로부터 자유롭다. 삼가고 조심하지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받아들이는 것 외에 어떤 의지가 개입할 수 없다. 다만 ‘감응력’을 키우는 것. 주의를 기울이며 만물의 ‘영’을 체험할 수 있는 감수 능력을 키우는 것 외에 달리 할 것이 없다. 영혼은 의지가 없다. 조건에 맞춰 들어왔다 나간다. 몸체에 박혀 있어 죽을 때 풀려나간다. 존재론적으로 동등하지만 ‘위계’는 있다. 그 사람의 몸을 수행하는 ‘영’이 그 위계를 만든다. 먹고 먹혀야 하는 세계에서 영들의 위치가 현실적으로 동등할 수 없다.
영들의 관계에 참여하기
타일러가 애니미즘을 원시 종교의 교리로 생각한다고 할 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나게 하는 ‘예술’의 기원이 떠올랐다. 어떤 학자들은 종교와 예술의 기원이 같다고도 하는데, 타일러는 원시문화의 애니미즘에서 예술과 종교가 갖는 그 치유의 능력을 본다. 죽음과 고통이 주는 어려움으로부터 위로받고 치유 받으려 했던 고대인의 지혜를 본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따로 없는 다채로운 존재들이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마주치는 모든 관계를 긍정하는 동화야말로 종교이며 예술이 될 수 있다. 달님은 우리가 동화 읽기를 위해, 분석을 위해,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고 했다. 나에게 다양한 종류의 도구(개념)이 많으면 나의 사고를 깨뜨리는데 유용하다는 것이다. 나에게 나의 사고를 구체화할 도구가 없으면 사고가 ‘점프’한다. 생각의 빈틈을 메울 언어가 없다면 생각을 구체화할 수 없다. 언어라는 물체적 조건에 적극 몸을 담그고 참여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것을 애니미즘 이론과 함께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어떻게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생명력 넘치는 고귀한 ‘영’의 자기 제작자가 될 것인가의 문제다. 나와 다른 영적 존재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실재성을 드러내는 방식의 애니미즘 세계관과, 언어라는 물질과 대화하며 그 의미의 실재성을 문장으로 드러나게 하는 그 감각은 상통한다. 애니미즘 세계에서 만물의 ‘영’이 각자 빈틈없이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아 세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듯이, 내가 펼치고 싶은 세계가 문장 안에서 꼭 맞는 자리를 찾아 글이 생기 넘치게 하는 것은 말의 영들을 다채로운 관계에 놓이게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바로 동화인류학 연구실에서 함께 동화를 읽으며 영들의 활기에 참여하고 있는 선생님들과의 관계에서 우선할 것이다. 동화인류학 선생님들의 영력을 동원해 기뻐하고 치유되면서 생명력을 높여 좋은 영이 탐내는 자가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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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을 탐내고, 주변 영도 돌보고, 한눈 팔고, 딴길로 세고 거기서 또 다른 영을 만나는 애니미즘과 동화읽기 동화를 왜 읽어야 하는지 다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오~~ 멋져요. 애니미즘 세계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에요. 깔깔마녀님의 연재가 계속 기다려질 것 같습니다^^
깔깔마녀님 화이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