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인류학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지금 여기의 삶을 완전히 긍정하는 주인공들의 세계를 탐험합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정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주인공의 삶이 어디로 이끌릴지는 아무도 모르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규정 지을 수 없는 존재들이 온갖 살 궁리로 복작거리는 숲에서 깔깔 웃고 떠들며 놀다 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삶에 감사하며 한 걸음 더 낯선 길을 나서봅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우연을 수용하고 마음껏 상상하는 것 뿐!
떡갈나무에 대한 추도사
떡갈나무에 대한 추도사
영발약사(영빨약사에서 이름 바꿨어요^^)
나무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산소를 공급해주고 맛있는 열매와 과일을 제공해줍니다.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줍니다. 인간들은 나무를 사랑해서 주말이면 수목원과 산에 가고, 집 근처 둘레길을 걷고, 집안에서 나무를 키웁니다. 반면에 인간에게 알러지를 일으키는 가로수들은 쉽게 뽑혀지고 유행에 따라 가로수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고대와 중세에 이르기까지 오래된 나무와 크고 우람한 숲은 인간에게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북유럽 신화의 오딘에게 바쳐진 나무는 물푸레나무였고, 천둥의 신 도나르–토르에게 바쳐진 나무는 참나무(떡갈나무는 참나무의 일종)였습니다. 예전 우리나라 서낭당(성황당)의 큰 나무는 신이 거주하는 곳이었습니다. 안데르센 동화에는 성목(聖木)처럼 보이는 떡갈나무가 나오는 『늙은 떡갈나무의 마지막 꿈–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유쾌한 방랑객들이 기타와 에올리언 하프(바람을 받으면 저절로 울림)를 떡갈나무 가지에 두고 갔는데 이 악기들이 신비한 소리를 내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때부터 떡갈나무는 높이 자라고 힘이 강해져 성목이 되었습니다. 이 떡갈나무의 거대한 머리는 싱싱하고 푸른 잎들이 우거져 ‘왕관’처럼 아름다웠으며, 떡갈나무의 꼭대기는 구름을 뚫고 위까지 자라서 큰 별들을 대낮에도 볼 수 있었습니다. 떡갈나무의 잎들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은 신의 수준입니다.
성탄절 전날, 죽기 바로 직전에 떡갈나무는 한가지 소망을 품습니다. 저 밑에 있는 나무, 덤불, 꽃들도 자기처럼 높이 자라서 자신이 보는 장엄함을 같이 보길 원합니다. 땅에서부터 몇 미터 자라지 못하는 식물들이 떡갈나무의 위치에서 세상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길 소망합니다. ‘떡갈나무의 이런 간절한 생각이 전해지자 마치 사람의 심장처럼 열렬하고 뜨겁게 가지들과 잎들을 부르르 떨었다.’ 예로부터 떡갈나무는 신탁을 내리는 나무이며 잎을 떨면서 신탁을 내립니다. 떡갈나무는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저 밑에 있던 식물들이 하늘로 상승하면서 떡갈나무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떡갈나무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떡갈나무는 폭풍우에 뿌리가 뽑힙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성탄절에 눈 덮인 해안에 길게 누워 있게 됩니다. 서 있어야 하는 나무가 시체처럼 누워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이면은 얄궂습니다.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에 참나무 숭배 제의는 전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에도 유럽인들 안에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떡갈나무가 성탄절 전날 폭풍우에 뿌리가 뽑히고 성탄절 날 시체로 누워 있는 것은 이교도(드루이드교)의 성목을 부정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교도인의 숭배 대상을 없애고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 작품을 읽으니 떠오르는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2010년 한반도의 중부를 관통한 태풍 ‘곤파스’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전날의 폭풍우에 둘레가 꽤 되는 나무 여러 채가 뿌리를 드러내고 어지럽게 쓰러져 있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에 많이 놀랐습니다. 나무들도 인생의 행로가 있고 그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드높이 우뚝 솟은 떡갈나무를 등대 삼아 바다를 항해하던 선원들은 외칩니다.
‘떡갈나무가 사라졌다! 우리의 항로 표지가 사라졌어!’
‘떡갈나무는 지난 밤 폭풍우에 쓰러진 거야. 이제 무엇으로 표지를 삼지? 표지를 삼을 만한 것이 없잖아!’
이것은 선원들의 떡갈나무에 대한 추도 연설입니다. 선원들은 자신들에게 소중했던 떡갈나무의 역할을 되새기며 그(그녀)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이 추도사는 이교도인 드루이드교가 그동안 그들의 인생 방향을 가리키는 역할을 했는데 그 역할이 끝났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종교 역사에 따라 어떤 나무는 추락하고 어떤 나무는 상승합니다. 떡갈나무는 추락했고 전나무는 지위가 상승하였습니다. 나무에 대한 추도사라니(!) 재밌네라고 이 작품을 읽었는데 종교사를 품고 있는 이야기였네요. 떡갈나무가 종교의식을 행하여 땅 근처의 나무들을 하늘 위로 상승시키고 있을 때 배의 선원들도 ‘하늘 위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떡갈나무의 영력이 대단했나 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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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아 | 2024.07.19 | 1 | 158 |
우리 인생의 항로를 표시해주던 떡갈나무의 자기 희생에 대한 이야기군요. 자기 밑에 있는 존재들에게 세상의 장엄함을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다한 떡갈나무가 남긴 또 다른 항로 표지는 무엇일지 생각해봅니다. 영발약사님 글은 떡갈나무가 쓰러지며 남긴 것은 자기 희생의 거름으로 자기 뒤에 남을 생명을 성장시키는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에게는 안보이던 떡갈나무의 숭고한 마음을 보신 선생님의 영발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