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에세이] 19세기와 21세기의 성장의 의미
19세기와 21세기의 성장의 의미
성장한다는 의미는 신체적 성장과 정신적 성장이 있다. 성장한다는 사전적 의미는 사람, 식물, 동물이 신체적으로 점점 커진다고 명시했다. 인문학에서는 시대를 더욱 폭넓게 이해하는 정신적 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가장 익숙한 건 성장은 바로 경제성장이다. ‘저성장’ 고착화로 이제 곧 경제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기사를 매일 보고 있다. 이제는 성장이라는 단어가 기대와 희망이 아닌 압박과 두려움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두려움 속에서 아이들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있다. 21세기 저성장 시대에 엄마로서 성장한다는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19세기 안데르센의 시대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서 안데르센은 소설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안데르센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는 장르를 강조했다. 안데르센에게 동화는 어린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볼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를 발표했다. 많은 비평가에게 왜 이런 글을 쓰냐며 비판을 받았지만, 안데르센은 매해 크리스마스에 동화를 발표했다.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는 민담이 전부였던 시대에 아이를 위한 어떤 창작물을 만든다는 건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30세 이후 계속 동화를 발표하면서 마음속 어린아이를 간직하고 있었다. 안데르센은 아이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구어체로 동화를 써 내려갔다. 하지만, 동화의 이야기는 발이 잘려나간 「빨간신」같이 잔인하거나 군인이 공주에게 입을 맞추는 「부싯깃 통」처럼 아이들이 읽기 부적합 내용이라고 비판받았다. 안데르센은 ‘이야기’에 있어서 어른과 아이의 선을 긋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쳐다보면서 모든 어른에게 있는 어린아이를 위한 글을 썼다. 동시에 가장 환상적 동화는 현실에서 나온다고 말하며 사실주의에 토대를 두었다. 그렇다면 성장한다는 동사를 안데르센의 작품과 자서전을 통해 더욱 해석해 보려고 한다.
어른과 아이
「종」 은 어느 날 아름다운 종소리가 마을에 들려 종의 기원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동화는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른과 아이의 상반된 시각을 보여준다. 1부는 어른들이 진짜 종소리를 찾기 위해 관광하고, 시를 짓고, 논문까지 쓰기도 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종의 출처에 대해 설왕설래한다. 2부는 14살이 되어 견신례를 받은 12명의 아이가 종을 찾아 떠나고 결국 두 아이는 종을 찾아 끝까지 떠난다. 안데르센에게 어른은 성장이 멈춘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떠나더라도 제자리를 뺑뺑 돌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종을 찾아 떠났지만, 단순한 관광을 하던지, 지금 있는 곳이 숲 한가운데라고 생각하면서 어쩌면 종은 도시에서 들리는 거 같다고 말하며 돌아간다. 심지어 종지기는 종에 대해 논문까지 쓰지만, 결코 종에 대해 알지 못한다.
2부에서 12명의 아이는 14살이 되어 견신례 받은 후에 숲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14세 견신례에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자신의 일생에서도 14살에 배우의 꿈을 가지고 코펜하겐으로 떠났다. 14살이 되어야지 떠날 수 있는 책임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많은 동화에서 어린이는 유혹에 넘어간다. 안데르센이 동화를 쓴 이유는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동경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14살에 코펜하겐으로 떠났듯, 아이들이 멈추지 않는 성장을 동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상상과 현실
12명의 아이 중에서도 대부분 아이는 집으로 돌아간다. 혼자 남은 왕자는 “이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꼭 종을 찾고 말 테야.”(314쪽, 『안데르센 동화전집』)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마침내 종을 찾은 그 순간 거의 동시에 도착한 또 다른 아이가 있었는데 바로 가난한 아이였다. 견신례의 옷과 신발을 돌려주느라 집으로 돌아갔지만, 종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다시 숲으로 와서 왕자를 만난다. 둘은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달라 헤어졌지만, 둘은 다시 만나 포옹하고 손을 맞잡았다. 과연 돌아가는 아이와 끝까지 종을 찾는 아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EBS 프로그램에서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에게 20년 후의 하루를 상상해 보는 미래일기를 써보라고 했다. 교수, 아이폰 디자이너, 유튜버 등등 다양한 직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몇몇 학생들은 백수, 알바생, 회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중 한 아이는 과학자가 꿈이지만 발명에 실패해 결국 그냥 회사원이 되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아이는 그림을 좋아하지만, 돈은 못 벌어서 직업은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어떤 아이는 밤 11시까지 믹스커피 마시며 야근하면서 버티고 있는 자신을 그렸다. 많은 아이가 어른은 곧 돈을 버는 존재라고 대답했다.
200여 년 전 시대에는 어땠을까?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은 10대부터 돈을 벌며 어른의 책임을 느껴야 했다. 안데르센은 11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돈에 대한 엄청난 책임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꿈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았다. 어머니는 안데르센을 공장에 보냈지만, 일은 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결국 공장에서 쫓겨나왔다. 그 후에도 어머니는 안데르센이 재단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안데르센은 적응하지 못했다. 안데르센은 14살에 배우의 꿈을 가지고 코펜하겐으로 떠났다. 안데르센은 자신의 재능을 확신했으며 누군가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줄 거라고 상상했다. 그 상상은 현실이 되었고, 후원자를 만나 문법학교를 졸업하고 국왕의 후원금을 받으며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뒀다. 자서전에 자신의 상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14살의 안데르센은 종에서 왕자의 말과 닮았다. 하지만, 사실 안데르센은 한참 뒤에 찾아온 가난한 아이였다. 성장 과정에서 안데르센은 친구들의 놀림에 상처받아 울고, 의기소침하고, 두려워했다. 안데르센이 꿈꾸는 성장은 왕자같이 거침없이 앞으로 가고 싶었지만, 사실 그는 뒤돌아갔다 갈팡질팡 하지만 결국 종을 찾은 가난한 아이였다. 종에 대한 끝까지 찾는 힘은 결연한 의지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말로 하면 상상하는 힘이다. 종에 대해 가장 많이 상상해 본 두 아이가 결국 그 종을 현실에서 만난 것이다. 안데르센의 작품 또한 사실주의와 상상의 접점에 놓여있다. 아이들을 위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쉽게 끝맺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현실보다 더욱 차갑게 그려진 동화가 있다. 19세기와 21세기를 비교하니 아이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경제적 압박은 다르지 않았지만, 이제 상상의 힘이 고갈되었다. 아이들은 이제 종을 찾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추가 보충 내용
– 돌아간 이 아이들의 성장은 과연 멈춘 것일까?
– 성장한다는 건 단지 높은 곳의 목표를 향한 것이 전부일까? (안데르센식 성장기와 성공 / 자본주의식 성장)
– 그렇다면 무엇을 상상해야 하는가?
– 안데르센식 사고법 ‘제발 내 재능을 알아줘’를 성장의 동력으로 봐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