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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에세이] 마음의 종소리

작성자
남연아
작성일
2024-12-21 23:31
조회
38

마음의 종소리


 아이를 키우면서 성장하더라는 동사를 매일매일 경험한다. 처음 출산했을 때 정말 아기가 작다는 사실에 놀랐다. 2.86kg으로 태어난 아기는 목도 못 가누는 존재였는데 뒤집기를 하고, 기어다니고, 일어서고, 이제 두 발로 걷는다. 아이의 신체적 성장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현대인들은 성장하더라는 단어를 왜곡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성장의 본질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근현대 교육에서 성장은 신체적으로 몸이 자라고, 정신적 성숙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우리는 성장을 통해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현대 시대의 성장은 성공을 향한 과정과 노력으로 생각한다. 기술적 공부, 커리어 발전으로 나의 월수입이 증가해야 한다. 현대인은 ‘성장’이라는 명목하에 끝이 안 보이는 사다리를 올라간다. 상위 1%의 사람들도 더욱더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사고 체계는 육아에도 적용이 된다. 목도 가누지 못하는 아기는 연약한 존재고, 빨리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미션을 가진다. 주변 친구들은 아기들이 빨리 걷고 빨리 말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성장 개념으로 육아한다면 모든 성장 과정을 빨리 해치워야 하는 과제로 생각하고 성장을 끝내 완성해야 한다고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아이 그리고 사람의 완성은 어디일까? 그 아이가 학교 졸업하고, 취업해서, 결혼하고, 독립하면 그때 완성되는 걸까?

 성장에 대한 많은 의문이 생길 때 나는 동화를 읽기 시작했다. 동화 속에서 현대적 성장과는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성장 이야기는 굉장히 익숙했다. 끊임없이 노력해서 어떤 곳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이야기도 있다. 다른 성장의 관점을 찾고 싶어 동화를 폈지만, 현대적 성장 스토리들이 기억에 남았다. 그 중 하나 작품은 바로 종이다. 어느 날부터 도시에 아름다운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도대체 종소리가 어디서 나는 건지 궁금해했다. 동화에서는 종을 찾으러 숲으로 떠나는 어른들과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른과 아이의 반응은 상반적이기도 하고, 또 닮아 있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어른들과 아이들은 종을 못 찾고 돌아왔지만, 숲속 끝까지 가서 종을 찾아낸 두 명의 아이들이 있다. 나는 이 두 아이는 어떻게 종을 끝까지 찾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어른의 영혼이 아닌 어른의 몸

 안데르센에게 견신례를 치르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견신례는 14살에 치러지는 세례식이다. 종에서도 아이들은 견신례를 치른 후에 종을 찾아 숲으로 떠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안데르센은 견신례를 받는 아이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의식이 끝나면 아이들의 영혼을 가진 그들은 옳고 그름을 아는 어른의 몸이 되는 것이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전집』, 현대 지성, 312쪽) 여기서 왜 옳고 그름을 아는 ‘어른의 영혼’이 아니라 ‘어른의 몸’이라고 했을까?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은 도덕적 판단이고 영혼의 영역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왜 몸이라고 했을까?

 여기서 안데르센의 삶을 들여다보자. 안데르센은 소설, 희곡, 시를 썼고 처음에는 소설로 유명해졌다. 그러다 30살에 동화를 쓰기 시작하면서 매해 크리스마스에 새로운 동화를 발표해다. 안데르센에게 동화는 어린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볼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를 발표했다. 많은 비평가에게 왜 이런 글을 쓰냐며 비판을 받았지만, 안데르센은 매해 크리스마스에 동화를 발표했다.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는 민담이 전부였던 시대에 아이를 위한 창작물을 만든다는 건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안데르센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는 장르를 강조했다. 물론 동화 작가로 세계적 성공을 거둔 것 또한 그에게 동화를 강조하는 동력이 되었을 수도 있다. 성공과 명성만으로 18년 동안 168편의 동화를 발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화 작가로서 어른과 아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린아이의 영혼’을 끊임없이 깨워야 한다는 소명이 그를 창조적 에너지로 이끌었을 것이다. 안데르센은 성장의 의례인 견신례에서 ‘어른의 영혼’이 아닌 ‘어른의 몸’을 말했다. 그렇다면 안데르센에게 성장은 영혼은 늙지 않아야 하고, 판단력을 할 수 있는 몸은 자라나야 한다.

종을 잊은 사람들 종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영혼이 사라진 존재로 묘사한다. 그들은 종소리를 찾기 위해 도시에서 숲으로 떠나지만, 그들은 숲으로 가면서 우왕좌왕한다. 종소리는 이제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었다. 아무도 종은 찾지 못했지만, 숲에서 빵 장사를 하기도 하고, 숲을 관광지로 생각하기도 하고, 종이 시의 소재가 된다. 왕이 종소리를 알았을 때는 ‘세계의 종지기’라는 벼슬이 내려지기도 한다. 부엉이 소리가 종소리라고 찾아낸 사람은 결국 ‘세계의 종지기’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도대체 그 소리가 부엉이의 머리인지 몸통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고, 매해 부엉이에 대한 논문을 쓰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어른들의 종소리를 찾아 숲으로 떠났지만, 도착한 곳은 종소리를 잊은 도시였다.

 다음은 14살이 되어 견신례를 받은 12명의 아이들은 드디어 종을 찾으러 숲으로 떠날 수 있었다. 견신례를 통해 이제 옳고 그름을 아는 어른의 몸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명의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여자아이는 무도회에서 입을 옷과 신발에 마음이 뺏겨 집에 가고 싶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물질의 유혹에 빠져 다시 집에 돌아간다. 반대로 한 아이는 물질적으로 가난해서 돌아가야 했다. 주인집 아들에게 빌린 신발을 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떠날 수 있는 기본 조건인 자신의 신발을 갖지 못했다. 마지막 아이는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물질적 유혹에 빠지고, 물질적으로 부족하거나,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아이들은 떠나지 못했다. 그들은 견신례는 치렀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어른의 몸이 되지 못했다.

 나머지 9명의 아이들은 숲으로 향했지만, 중간중간 뿔뿔이 흩어졌다. 숲길은 험해서 옷들이 찢어지고, 피가 나기도 했다. 어떤 아이들은 자신들이 온 곳이 숲의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종은 상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 다섯 아이들은 작은 은종 앞에서 의견이 갈린다. 네 아이들은 이것이 자신이 찾는 종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아이만 소리가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 아이는 왕자였다. 왕자는 아무리 봐도 그 은종은 작아서 자기가 들은 감동적인 소리를 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아이들은 왕자가 잘난체한다고 생각했다. 즐겁게 종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머물렀다. 10명의 아이들은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 몇몇 아이는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죄책감을 가졌을 수도 있고, 몇몇 아이는 다시는 그 험난한 숲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결심한 아이도 있을 수 있다. 작은 은종을 보면 종을 찾았다는 성취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 아이들 또한 숲으로는 떠났지만,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도착지는 종소리가 사라진 도시였다.


끝까지 가는 아이들

 종은 여전히 크고, 아름답게 울리고 있었다. 왕자는 종을 포기할 수 없어 혼자 길을 떠났다.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지만, 종을 찾았다며 즐거워하는 소리만 들렸다. 왕자의 마음에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숲속에서 더 큰 종소리가 울렸고, 왕자는 “이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꼭 종을 찾고 말 테야” (같은 책, 312쪽)라며 굳게 다짐한다. 숲속에서 왕자는 도시로 돌아간 가난한 아이를 만난다. 가난한 아이는 종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다시 숲으로 돌아왔다. 왕자는 같이 가자고 제안했지만, 가난한 아이는 자신의 나막신을 내려다보면서 왕자처럼 빨리 걸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둘이 생각하는 방향은 반대였다. 결국 둘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왕자가 가는 숲속에서는 다양한 생물과 풍경이 펼쳐진다. 못생긴 원숭이들, 이상한 꽃들, 백조, 징그러운 뱀, 개처럼 짖어대는 두꺼비 등등. 안데르센은 숲을 거칠고, 험난하고, 기괴한 생물이 사는 곳으로 묘사한다. 왕자는 여기서 어떤 생물한테도 관심이 없다. 심지어 존재하지도 못한 채 지나친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벼랑 끝까지 올라간다. 결국 꼭대기에 다다르고, 거기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무척 아름답다. 거대한 파도, 눈부신 빨간 노을, 초롱초롱한 별, 꽃과 풀. “이 모든 자연이 하나의 거대한 성당”(같은 책, 312쪽)이라고 말한다. 반대편에서 가난한 아이가 나타났고 둘은 부둥켜안았다. 너덜너덜한 옷과 나막신을 신은 가난한 아이도 자신이 믿는 길을 끝까지 갔고, 결국 그 꼭대기에 도착했다. 왕자와 가난한 아이는 마음에 종소리를 간직한 채, 어떤 유혹과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종에 도달했다. 여기까지 보면 현대적 성장스토리와 굉장히 비슷하다. 많은 유명인은 어렸을 때는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자신의 꿈을 이뤄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런 순간이 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안데르센 동화에서 종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은 딱 두 명의 어린아이 뿐이다. 많은 경험을 쌓은 어른들은 다 실패했다. 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몸이 자라는 것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의 맑은 영혼을 간직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현대적 성장과 안데르센의 성장이 갈라진다. 현대적 성장은 함께 다음 단계로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지금을 희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은 엄청난 선행학습이 진행되는데 그 목표는 모두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돈이다. 이런 압박에 요즘 아이들은 무기력하고 꿈이 없다고 어른들은 안타까워 하지만, 어린아이의 영혼을 일깨워주지 못한다. 19세기 산업혁명과 계급이 무너지면서 안데르센은 물질이 사람의 영혼을 무너트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안데르센 또한 작품 활동을 위해 돈이 필요해 후원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에게 돈은 수단일 뿐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어린 순수한 마음을 강조했다.


자연의 성장

 안데르센 성장과 현대적 성장에 공통점이 있다면 다들 외롭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종 말고 다른 모든 것은 수단이 되었다. 의견이 다른 친구들은 걸림돌이 될 뿐이다. 숲은 종을 향해 나아가는 자신의 배경일 뿐이다. 가시나무 또한 종을 위해 겪어야 하는 성장통일 뿐이다. 다양한 생물들이 숲속에 우글우글 존재하지만, 왕자는 존재 자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앞만 보며 이 세상에 오직 자신과 종밖에 없다. 왕자와 가난한 아이는 같은 목적을 가졌지만, 서로를 돕지도 못하고 각자의 길을 간다. 결국 왕자는 꼭대기에 올라가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감탄한다. 마지막에 가난한 아이는 반대편에서 나타나 결국 꼭대기에 도착했고, 왕자와 만나 손을 잡으며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정말 아름다운 자연경관에서 그들은 여전히 외로웠을 것이다.

 만약 왕이 중간에 지나친 뱀, 원숭이, 백조들과 대화를 나눈다면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만약 왕자와 가난한 아이가 협상하여 함께 꼭대기에 올라가면 어떤 스토리가 펼쳐졌을까? 자연의 성장에서는 왕자처럼 도착지로 바로 가지 않는다. 주변을 바라보며 어슬렁거리며, 누군가에게 마음을 뺏기고, 머물러야 한다. 나와 다른 존재에게 눈길을 주고, 소리를 듣는 것이다. 집을 떠남으로써 많은 존재를 만나고, 대화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렇게 하다가 샛길로 빠지고 길을 잃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종소리는 크고 아름답게 들린다. 종은 수단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다. 내 영혼에 새로운 관계를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성장은 완성이 아니다. 성장은 새로움과의 마주침이다. 어디서든지 누군가와 함께 있던지 종소리가 들리면 있다면 우리는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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