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6-7장 후기 “주술과 고구마 外”
동화인류학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6-7장 후기 김유리 2025-3-11
주술과 고구마 외
주술
주술은 인류 근원의 사고의 흔적을 담고 있다. 주술에서는 말과 사물이 분리되지 않는 것 같다. 말이란 본래 문자도 아니고 시각적 기호도 아닌, 소리다. 소리는 물질 세계 속을 흐르고 관통한다. 구술성 저변에 주술성이 있다.
주술은 서구에서 14~15세기(중세)에 이단시 되었다. 우리 사회를 보면 현재 주술은 사적 용도로 위축되어 있다. 말리노프스키의 용법에서 주술(magic)은 기본적으로 공적인 것이고 공동체의 복지를 위한 것이다. 타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는 주술은 흑주술이라 부른다. 개인적인 보복이나 변신과 관련된 것은 요술(witchcraft)라고 부른다.
고구마
기근을 막아줄 ‘구황작물’로 백인들이 들여온 고구마에 대한 토착민들의 냉담한 태도를 주술과 관련지어 설명해보자. 산호섬에서 외래종인 고구마에는 주술이 없다. 농경의 각 단계와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농경 주술의 체계 속에서 고구마는 자리가 없는 것이다. 토착민의 신화 체계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산호섬에서 고구마는 신화적 기원이 없다. 이는 우주적 근원에 닿아 있지 않은 근본 없고 수준 낮은 사물이라는 뜻이 된다. 고구마는 기근이 닥쳤을 때 아사를 막아줄지 모르지만 평소에는 돼지에게 던져준다.
‘인류’
인류학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생물학적이고 개체적인 인간 개념과 다르다. 인류학의 인간관에서 자연 층위의 개체는 ‘비인간’이다. 공적 주술의 메시지를 체화한 사람만이 인간이다. 인류학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주술적이고 공적 층위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술이 다른 집단의 사람들은 사람인가? 그들도 사람이다. 그 사람들 역시 자연 층위를 넘어 주술 층위에 진입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 외국어를 쓰거나 발음(억양 등)이 다르다는 등으로 식별하는 것에 비해, 인류학적으로 다른 사람은 신화와 주술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문화적인 구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주술에 속한 사람들과는 부족 간의 교역 관계로 엮는다. 자기와 다른 것과 관계를 만드는 방식을 만들어내고자 애쓰는 것 역시 인류학이 말하는 사람의 일이다.
말의 지위
주술과 신화는 이야기다. 주술의 공공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언어의 지위가 높고 말에 품위가 깃든다.
주술은 메시지를 발화한다. 상위 수준의 말은 기본적으로 앞을 향한다. 공동체나 조직의 리더는 앞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진단만 해서는 집단을 끌고 가지 못한다. 샤먼은 ‘미래의 말’을 할 수 있는 자이다. 농경 주술에서 배고픈 시기에는 포만의 시기를 말하고, 수확기에는 절제에 대해 말한다. 치료 주술은 병이 아닌 병에서의 회복을 말한다. 순환하는 사회에서 미래는 회복이기도 하다.
악
공적 주술에서 말하는 ‘악’이란 사적 이익이다. 여기에 이기고 싶은 마음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결부된다. 그런데 경쟁심과 과시욕은 사회적 감정으로서 활동의 심리적 동기다. 주술은 이러한 인정욕망을 표현하는 방식을 고도로 조절한다. 사적 이익으로 향할 수 있는 동기들을, 타인을 반드시 경유하도록 설계한다. 가장 좋은 수확물은 일상적으로 교류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으로 보낸다. 타인에게 보내는 식량의 경작 분야만이 경쟁과 허영이 표출되는 통로가 된다.
사적인 감정에 대한 편중을 방지하는 사례로 산호섬 사람들의 결혼제도를 들 수 있다. 가구 단위의 생산물의 절반은 (매부가 우두머리인) 외가로 보낸다. 그 가구의 아들들이 자라면 외가를 승계한다. 한 가구의 가장은 자기 부인과 아이들에게 감정이 끌리지만, 사랑하는 이들에게 물질을 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감정과 재산이 흘러드는 방향을 따로 두는 것이다. 이러한 가족 형태는 모계 친족제(여성이 혈통 계승)와 부거 결혼제(남편의 집에 거주)가 결합된 형태로서 사적 영역에 강력한 중심이 발생하는 것을 문화적으로 거절한다.
산호섬의 아버지들
산호섬의 아버지들은 프로이드의 핵가족 삼각형을 모른다. 그들은 극히 억압되어 있어서 사랑하는 자식에게 뭘 좀 쥐어주고 싶으면 눈을 속여야 할 정도다. 감정과 재산을 분리하는 것은 부자 관계의 유착을 막는다. 거리가 조정되어 ‘광기어린 애착’이 아닌 다정한 우정의 관계가 발생한다. 아버지들은 어린 아이들을 돌보고 자라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데리고 다니면서 기술들을 전수한다. 이에 비해, 아들들과 외삼촌과의 관계는 엄격한 후계 관계다.
한 사회의 물질적 관계 이면에서 사회관계가 드러난다. 산호섬은 사적인 이익을 경계하는 사회다. 가장은 수확물을 처가로 보낸다. 처가에서는 답례를 보낸다. 이로써,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여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세습 재산을 축적하는 것을 방지한다. 처가의 경우, 남녀 형제의 근친상간 터부로 오누이의 물리적 거리를 벌린다. 아내는 처가의 혈통을 이어가고, 자식들은 처가의 우두머리인 매형의 지위를 물려받는다.
추장은 모든 것을 가지지만 자기 것이 없다
모든 남자는 처가에 재산을 보내는 의무를 지는데, 신분에 따라 양상이 다르다. 추장은 개인 창고를 둘 수 없다. 추장의 창고는 공적이며 모두에게 과시 및 감시의 대상이 된다. 정해진 시기에 채우고, 사적으로 채울 수도 없다. 추장은 자기 것이 없다.
추장은 자기 것이 없으므로 가난한가? 산호섬의 이진법은 포만/배고픔(말리아/몰루)이다. 식량이라는 물질에 대한 욕구는 정서적 욕구(인정 욕망, 충족감에 대한 추구)의 표현이다. 추장의 크고 멋진 창고에 그득하게 쌓인 식량은 무엇을 표현하는 것인가? 그것은 추장을 둘러싼 관계들의 물질적 표현물이다. 관계가 포만한 것이다. 큰 얌들이 넘치도록 채워진 추장의 창고를 보면서, 산호섬의 토착민들은 포만을 경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