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수업 후기 “진짜 세계”와 주술 언어
동화인류학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4/23 수업 후기 2025-4-28
진짜 세계와 주술 언어
이날 수업을 준비하면서 달님은 말의 무게를 느끼는 시간이었다고 돌아봤다. 후기를 쓰려고 필기한 것을 살펴보면서 말이 사람을 휘감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의 표정이 바뀌고 지향이 변한다. 유지가 안 되지만 말이다. 이번 수업을 통해 말의 주술적 차원에 대해 시야가 열리는 느낌이다. 더 많은 주술을!
〇‘맥락만이 번역될 수 있다’
말리노프스키와 경작지 주술사 바기도우는 주술의 말을 옮기고 해설했다. 이들은 주술의 말을 통해서 ‘두 세계를 이어보고 싶은’ 지적 열망과 능력을 나누었다. 주술은 말이다. 그러나 ‘말로서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없다.’ 불가피하게 ‘문자로 말을 죽여야 한다.’ 책이란 마치 바기도우가 주문을 실어나르는 숨을 봉인하는 덮개를 닮았다. 그런데 맥락으로부터 찢어낸 주술의 말들이 유럽에 가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말리노프스키가 자신의 방대한 자료와 서술을 통해 맥락을 옮기려고 시도한다. 그는 맥락 안에서만 주술의 말이 효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말리노프스키와 바기도우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텍스트를 번역하거나 어휘 사전을 만드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것과도 다른 일이었다. 그들이 한 것은 말이 놓일 자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부재하는 맥락을 만드는’ ‘미래 기투적인 작업’이었다.
‘아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일이다. 아이디어는 떠오르고 찾아오지만, 말은 몸으로 한다. 아는 것을 말로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몸부림’ 쳐야 한다.
그런데 ‘미래 기투적’이라는 낯선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을 알려면 우선 언어가 관계하는 ‘진짜 세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〇일상과 상상, 어느 쪽이 진짜 세계일까?
우리의 관점에서는 주술의 목적이란 것이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라고 결론지어도 되는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461)
“절대로 그렇지 않다”라는 말은 접속사 기능을 한다. 다음에 나오는 말에 집중하라는 신호다.(달님 독법 응용)
주술은 나름의 고유한 세계에서 생겨나는데 이 세계는 토착민들에게 진짜 세계이다. 그러므로 주술은 그들의 행위에 깊은 영향력을 발휘하며, 결과적으로 인류학자에게도 진짜이다. 주술의 상황, 즉 영향력과 공감적 친화력이 충만하여 마나가 스며들어 있는 행동의 현장이 곧 주문의 맥락이 된다.(462)
주술이 힘을 갖는 행동의 현장이 토착민들에게 진짜 세계이고, 그러므로 인류학자에게도 진짜 세계이다. 주술의 말의 발화는 진짜 세계에 스며 있는 영력(마나)을 생산하고 키우고 전달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인류학자는 토착민들의 믿음으로 생겨난 주술의 맥락, 즉 “진짜 세계”에 들어가고자 노력한다.
달님은 ‘리얼하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달님의 질문에 동어 반복이 아닌 대답을 하려면 머리를 쥐어짜야 한다. 리얼하다는 것은 언어와 관계있다. ‘내가 리얼하다고 말할 때 그 리얼한 것은 어떤 것이냐면’하고 말을 이어 간다. 단, 언어는 하나이지 않다. 우선 우리에게 익숙한 재현하는 언어가 있다. 재현하는 언어는 말과 현실이 일치할 때 그것을 사실이라고 판정한다. 그렇다면 재현하는 언어는 말과 현실이 일치한다고 전제함을 알 수 있다. 이와 다르게 주술 언어는 ‘아직 아닌’ 세계와 관계한다. 주술 언어에서 ‘아직 아닌’ 것은 이상하지만 리얼한 것이다.
경작지 주술사 바기도우는 ‘힘을 아직 아닌 세계로 옮기는’ 일을 한다. 아직 아닌 세계 속으로 자기 목소리와 몸짓을 밀어 넣는다. 이것을 달님은 미래 기투적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달님은 세 가지 ‘리얼’한 것에 대해 말했다. 첫째는 현상과 말이 일치하는 재현적 사실이다(얌(타이투)을 가리키며 ‘이것은 얌이다’라고 할 때). 둘째는 이미 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고 감지되지 않은 잠재태로서의 리얼함이다(얌을 심을 밭을 가리키며 ‘이것은 얌 밭이다’라고 할 때?). 셋째는 아직 안 온 것이지만, 도래할 현실로서의 가능태적 현실이다(“[죽은] 할아버지가 그대를 껴안을 것이네, 오 타이투여, 그는 십자로에서 그대와 함께 춤을 출 것이네.” 『산호섬』3권 347쪽). 주술이 관계하는 것은 바로 이 세 번째 차원이다.
그런데 세 가지 종류의 현실을 분리하는 것은 우리의 시간 관념이다. 여기도 언어가 문제가 된다. 근대에 동사의 시제가 개발되면서 우리 사고 속에 처음과 끝이 설정되고 불가역 법칙이 적용된다. 시간의 틀이 뒤틀린 표현은 거짓말이거나 상상이거나 오류가 된다. 그러므로 재현하는 언어는 인과를 따르는 하나의 시간 선을 제외한 나머지를 누락시킨다. 재현 언어가 관계하는 세계 이외의 세계들은 잠재태나 가능태로서 부재하는 맥락이 된다.
〇주술 언어의 관심
트로브리안드인은 자신의 믿음이나 관습의 일반적인 근거를 대려고 할 때를 제외하고는 기원을 캐는 데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는 혈통의 정확함이나, 주문과 의식을 충실하고 신중하게 전수하는 일에는 정말로 관심이 있다.(466)
이날 달님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래와 같다. 예기치 못하게 발생한 일에 대한 태도는 두 갈래로 갈라진다. 기원을 캐거나, 주문을 행하거나이다. 기원을 캐는 사고는 제일 먼저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라고 묻는다. 답이 없는 채로, ‘이미 아는 것들을’ 더듬어 원인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러한 ‘사고 회로’는 사실상 ‘사고를 가둔다.’ 왜냐하면 벌어진 사건은 겪어봤거나 계획했거나 예상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아는 것들 바깥에서 도래한 현상에 대해 ‘1대1로 대응’하는 재현 언어를 가지고 있을 리 없다.
이에 비해 주술적 사고는 ‘지금 어떤 주문이 필요한가?’를 묻는다. 주문의 효과는 보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주문을 걸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바깥으로 열어서 모르는 것을 향해 간다. ‘열린 곳으로 자기를 보내는’ 사고 회로다. 달님은 ‘수련하기 전에는 수준 있는 주술사임을 확인할 길이 없다’고 했다.
계속 밖으로 열려간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농경은 주기적 시간관에 뿌리내리고 있어서 같은 주기가 반복된다. 그러므로 매년 농경에는 시작과 마감이 있다. 그러나 ‘올해에는 올해의 얌이 온다. 올해는 다른 방식으로 예쁘다.’ 매년 같은 것이 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정주한 농경민의 밭에 매해 다른 것이 도래하는 것은, 이주하는 인간이 매번 다른 곳에 도달하는 것과 닮았다. 그러나 재현 언어에 익숙해지고 일상에 매몰될 때 인간은 걷기를 멈추는 셈이 된다.
〇세계는 완전하게 사유는 무능하게
아이가 이름을 받고 진입하는 언어의 세계는 삶에 한계를 긋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름의 주문’이 걸리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라’하는 ‘저주’의 말에 묶인다. 말이 그렇게 힘이 세다고? 그렇다. 그렇다면 사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말이란 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책임 있게 사용하고 세심하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경우와 때를 가려서 말을 사용하는 훈련 과정을 통해 어른이 되는 것이다. ‘경우와 때란 삶 자체다.’ 노동에도, 제의에도, 우정에도 때와 경우에 맞는 언어 수련이 병행된다.
오마라카나 농경 지구에서 모두에게 효과를 일으키는 공적 주술의 말은 단 한 사람만이 발화할 수 있다. 축복하고 힘을 선언하는 주술의 말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발언의 자유를 권리로 보장하는 근대에도 이것은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주제다. 공적 주술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은 모두가 저마다의 관심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관심을 희망적으로 통합해가는 말을 발견하는 일이다.
본질적으로 주술은 인간의 희망과 확신을 표현하며, 미래를 향한 도덕적으로 통합된 태도의 필요성을 표현한다. 나는 그것이 거의 주술의 생리적인 본질이라고 말하고 싶다.(523)
인간은 말을 통해 어떤 효과를 보고자 하는가? 오로지 개인의 쾌와 불쾌를 표현하기 위해서도, 개인의 쾌를 늘리고 불쾌를 줄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런 것은 유아의 말이다. 인간은 말을 통해 개인을 넘어서고자 한다. 개인 차원에서 저마다 느끼고 희망하고 고대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 그치거나, 개인을 과거에 묶어 두거나 감정을 되풀이하는 사고 회로에 갇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간은 개인들이 고대하고 꿈꾸는 것들을 미래를 향해 도덕적으로 통합해가는 말에 관심이 있다.
미래 기투적인 말은 세계를 창조하는 효과를 본다. 세계는 창조에 열려 있는 한 결핍이 없다. 인간의 사유만이 불완전한 것이다. 사유의 한계에 대한 인간의 지(知)는 경우와 때에 맞는 발화를 훈련하는 주술 언어의 차원으로 인간을 밀어 넣어 창조에 참여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