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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

Bronislaw Kasper Malinowski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에세이 – 입체적인 말의 세계

작성자
남연아
작성일
2025-05-06 15:09
조회
28

입체적인 말의 세계


  말리노프스키는 인류학자로서 ‘현지 조사’ ‘참여 관찰’이라는 이론과 연구 방식을 창조하고 확립했다. 그는 인류학 연구의 기반을 다졌고, 유럽 사회인류학자들을 양성했다. 1915년 6월부터 1916년 5월까지와 1917년 10월부터 1918년 10월까지 2년간 서태평양의 트로브리안드 섬에서 연구를 진행했고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 등의 주요 저서를 탄생시켰다. 이번 동화 인류학 세미나에서는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리노프스키만의 독창적인 언어학 관점을 통해 언어와 말을 재정의 내리는 시간을 가졌다. 


인류학자의 임무

  말리노프스키는 인류학자로서 자신의 임무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했다. 자신의 임무가 규범을 세우는 것도,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는 자신을 ‘문화적 언어의 서술자’로서 “토착민의 관점을 유럽인에게 번역해 주어야 한다”(브로니슬로 말리노프스키,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3』, 유기쁨 옮김, 아카넷, 31쪽)라는 연구 목적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한계를 정확하게 인지했다. 토착민의 문화로부터 영어권 독자의 문화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어떻게 토착민 정보 제공자가 제시한 말들을 영어권 독자가 이해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그는 “역설적이지만, 절대적으로 옳은 명제, 곧 한 언어의 단어들은 결코 또 다른 단어들로 번역될 수 없다”(같은 책, 60쪽)라는 주장으로부터 시작했다. 같은 유럽이라고 하더라도 지역, 인종, 문화에 따라서 특정한 측면들이 계발된다. 그렇기에 두 문화 사이의 차이가 클수록 번역의 어려움도 더욱 커진다. 그러므로 말리노프스키는 문법, 해설이 붙은 원문 모음을 묶어서 제시하는 형식이 아닌 ‘연속적 이야기’ 속에서 엮어야 했다. 연속적 이야기를 엮기 위해서는 토착민들의 삶으로 들어가 그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며, 토착민들의 풍부한 해설을 이끌어내어야 한다. 말리노프스키는 직접 주술의 예식에 참석하면서 각각 단계마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석하려고 했다.


화용론이라는 선구적 언어학의 발전

  말리노프스키는 토착민의 말과 행동에서 출발한 ‘현지 조사’라는 방법을 확고하게 정립한 인류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정보를 철저하게 제시했다. 특히 기본적인 개념일수록 수백 번가량 들은 것을 대표해서 제시했다고 한다. 토착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활동인 경작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들판을 걸어가면서 식물의 특징과 땅의 유형에 관해 표현들을 사용하고 배웠다. 또한 훌륭한 구절을 듣게 되면 글로 간단히 기록하거나 기억해서 나중에 반드시 정보 제공자를 만나서 그 말을 되풀이하도록 유도했다. 토착민 언어의 자료는 유능한 정보 제공자들로부터 얻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질의응답 방식으로 작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토착민들은 말리노프스키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확실한 정보를 전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현지 조사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언어학과 이론서들을 광범위하게 읽었다. 언어심리학, 문법 철학, 인도-유럽의 비교언어학 등을 섭렵하면서 언어학 이론을 넓혀갔다. 현지 조사와는 대척점에 있는 것 같은 언어학 이론을 왜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현지 조사를 하면서 토착민들이 제공하는 언어적 자료의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폭넓은 언어학적 소양과 비례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좀 더 간결하게 만들려는 어떠한 유혹에도 저항했다”(같은 책, 40쪽)라고 말한다. 말리노프스키는 언어학자가 아니었지만, 철저한 현지 조사와 폭넓은 언어학 이론을 바탕으로 ‘화용론’이라는 자신만의 언어학 이론을 정립했다. 화용론은 맥락 위에서 말이 번역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말에는 화자의 태도, 정신, 삶, 문화적 배경 등등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가 정신적 과정과 나란히 대응하거나 되풀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말했다. 말이 주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소통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하지만, 말리노프스키는 다르게 봤다. 말의 기능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발생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말은 수동적 대응이 아닌 능동적 역할을 수행한다.


말과 행동은 동등하다

  우리는 대부분 말과 행동은 분리되고, 말은 행동보다 더 가볍고, 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리노프스키는 화용론을 논할 때 “말과 행동이 동등하다”라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말리노프스키는 트로브리안드에서 경작지 주술을 관찰하면서, 말의 무게감을 행동과 동일하게 생각했다. 주술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주문, 대상, 몸짓이다. 현대인은 말 따로 행동 따로라고 생각하는데, 몸짓이 빠진 말은 대상과 동일시한다. 세미나 시간에 이런 언어학적 사고를 달님은 ‘재현 언어’라고 정의했다. ‘재현 언어’는 맥락과 상관없이 똑같은 말이 반복된다. 글자 그 자체로 보면서 누가 말하든, 어디서 말하든, 똑같은 말은 반복된다. 다른 말로 하면 누가 말해도 상관없다. 그러면 여기서 사람의 고유한 맥락은 사라진다. 

  말리노프스키는 주술에 ‘몸짓’이 포함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고, ‘재현 언어’를 뒤집어 버리는 ‘화용 언어’라는 선구적인 언어학을 발전시켰다. ‘화용 언어’는 맥락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말이 다른 사람의 입으로 반복될 수 없다. 오직 그 목소리, 오직 그 몸짓, 오직 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 말은 행동의 일부분이며, 실질적 효과와 결과를 이끌어낸다. 그러므로 아무나 주술사가 될 수 없다. 인생을 걸쳐 수많은 정신적 그리고 신체적 수련을 거쳐야만 주술을 읊을 자격이 부여된다. 말리노프스키의 가장 유능한 정보 제공자인 주술사 바기도우는 “토착 전승의 보고였고, 지성적이었으며, 총명했고, 기억력이 탁월했다.” (같은 책 1권, 222쪽) 또한 주술사는 다른 토착민들과 마찬가지로 날마다 자신의 경작지에서 일해야 하며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그는 폐병이 많이 진행되어 있었지만 모든 경작지 활동과 주술을 몸소 계속했고, 예식들을 수행했다. 또한 주술사는 말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인지 그 목적을 명확하게 안다. 바기도우는 “담배로 매수되기보다는 본인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움직였다.” (같은 책 1권, 222쪽) 그는 자기 행동 하나하나가 곧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고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인지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주술 문구를 통해 말과 행동이 동등하다는 주장을 자세하게 살펴보자. <문구 1>에서 주술사가 “이것은 우리의 공물입니다. 오 노인들이여, 나는 이것을 내려놓습니다”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행동을 말한다. “내일, 우리는 우리의 경작지에 들어갈 것입니다. 유념하십시오! 오 비키 타, 오 이야바타, 우리의 신화와 주술의 원천이시여, 해충들, 곤충들, 유충들을 쫓아내십시오” 다음은 액막의 문구인데 유충들에게 쓴다, 분다, 몰아낸다, 내보낸다, 쫓아낸다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문구들은 해충에게 행동을 명령하며 반복적으로 말한다. <문구 2> 바투비 주문인데 “길을 보여주소서”를 반복하며 외치고, 다음에는 조상들의 이름을 읊는다. “경작지의 배가 부풀어 오르네/올라오네/가라앉네/ 자라네/굽어지네/솟아오르네” 경작지를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며 움직임을 묘사하고 있다. 주술사는 주술 문구는 주술사 자신의 행동, 명령, 자연의 움직임을 읊고, 이렇게 문구를 읊는 과정 자체가 바로 언어 행동이라고 봤다. 이렇게 말의 효과를 이끌기 위해 주술사는 의례 중에는 금식한다. 주술사의 말은 자기 신체 행동을 해설하고, 특정한 힘을 풀어놓으며, 자연의 흐름과 인간의 행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행동이다.

  말리노프스키가 이렇게 말과 행동의 동등함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협력’이다. 말을 통해 신체적 행동이 연결되면 공동체가 함께 협력하고, 그들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말과 행동이 동등하다’라는 말리노프스키의 관점은 신체적 행동에 대한 섬세한 관찰, 협력의 목적, 사회학을 재구성하면서 더욱 풍부한 해석이 가능하다. 주문을 통해 공동체의 힘이 생기고, 주술 예식에 참석하는 토착민들은 성스러운 행동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요즘 현대사회는 말이 생각, 감정, 관심사를 소통하는 것이 목적으로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협력보다는 서로의 차이점을 더욱 강조한다. 사회는 다양해졌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서로를 이해하는 폭은 더욱 좁아졌다. 풍부한 화용론적 관점과는 다르게 재현 언어의 사고에 갇혀 단편적인 말만 복사해 붙이며 퍼져나가고 있는 현실이다.


점진적인 번역

  말리노프스키는 화용론 관점에서 ‘불가능한 번역’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화용론의 관점에서 단어는 고립되지 않았고, 사전이나 민족학자의 노트에 갇혀 있지 않는다. 단어를 문화적 맥락 속에 놓음으로써 점진적으로 번역한다. 말리노프스키는 점진적 번역의 세부적인 단계를 보여준다. 용어를 유사한 어원이 표현과 나란히 놓고, 용어의 반대 말들과 대조하고, 사회적 관계를 관찰하며 문법적 분석을 하고, 잘 관찰한 수많은 사례를 통해 용어를 정의한다. 경작지를 어떻게 번역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점진적 번역의 과정을 살펴보자. ‘garden’ 영어단어는 소구획, 공원, 농지, 과수원 어떤 것도 암시할 수 있지만, 트로브리안드어로 번역될 수 없었다. 그는 두 언어 사이에 심각한 ‘공백’을 마주했다. 트로브리안드어에는 바굴라, 부야구, 타포푸, 카이마타, 카이무그와, 발레코 같은 단어가 있다. “그것들은 각각은 ‘garden’의 특정한 유형과 종류를 서술한다. 그러나 이러한 토착 용어들은 영어 단어와 동일시해서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일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같은 책, 66쪽)고 말한다.

  말리노프스키는 민족지 서술을 참조했고, 언어학적 용법과 부가적 정보를 보충했다. 부야구를 예를 들어본다면, 이 단어가 사용되는 큰 그림을 독자에게 그려줘야 한다. “즉 경작 가능한 땅을 다음 해의 경작지로 표시하고 ‘미래의 경작지’로 인정하게 만드는 사회적, 법적, 그리고 기술적 협정을 지적했다”(같은 책, 66쪽) 그런 다음에 일반적인 표현인 ‘경적지 부지’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우회적 표현들의 의미도 함께 서술한다. 예를 들어 ‘경작할 예정인 토지’, ‘공동 울타리 안의 모든 토지’ 등으로 다시 정의된다. 우회적 표현을 독자가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들이 ‘공동 울타리’를 중심으로 공동 경작지가 설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야구라는 용어를 정의할 때 트로브리안드의 경작지는 울타리에 의해서 물리적으로 경계 지어진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그려줘야 한다.

  그다음은 부야구(경작지 부지), 오딜라(덤불) 요세워(외부의 모든 땅/경작지 부지 바깥의 잘려나가지 않은 덤불)라는 단어와 대조하며 부야구라는 용어를 더욱 정밀하게 정의한다. 또한 어원이 같은 용어인 바굴라, 발레코, 크와빌라도 마찬가지로 문화적 맥락에서 그 단어의 예시를 분석해야 한다. 토착민 정보 제공자들은 단어를 정의할 때 상황의 맥락을 재현한다. 경작지의 경계는 잘려 나가지 않은 덤불과 경작지 부지로 나뉘며 토착민은 양손에 반대말을 하나씩 들고 구체적인 상황을 보여주면서 용어를 정의한다. 이를 통해 부야구는 개간과 관련해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여기까지는 물리적 맥락을 살펴봤다면 다음은 사회적 맥락을 살펴볼 수 있다. 부야구는 경적지 전체를 의미하는데 소유대명사 ‘his’를 부야구에 붙이면, 주술사 관점에서 모든 경작지 부지에 대한 반쯤 경제적이고 반쯤 법적인 주장을 의미한다. 반대로 바굴라는 개별적으로 소유되는 부분인데 여기에 ‘his’는 명확한 경제적 의미가 있다.

  점진적 번역을 ‘경작지 부지’라는 일반적인 정의에서 출발해 ‘미래의 경작지’ ‘울타리 안의 경작지’ ‘주술사의 경작지’처럼 다층적인 해석으로 연결된다. 이런 번역 과정은 그가 주장한 ‘연속적 이야기’를 엮는 방법이다. 말리노프스키는 이 방법이야말로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언어적 번역 방법은 “독자와 저자 모두에게 일종의 고통을 수반한다”라는 점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정신적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저자로서 어디까지 세부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인류학자의 임무인 ‘언어 서술자’임을 더욱 확고하게 기억하며 토착민 언어를 더욱 세부적으로 파고들었다. 

잃어버린 생동감을 찾아서

  독자로서 우리가 말리노프스키의 고통스러운 번역 작업에 함께 참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말리노프스키는 과정이 언어학적 연구의 과정이 ‘구체적인 생동감’을 전달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말은 사전 속에 갇혀 있지 않다. 말은 부차적인 기능이 아니라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인간의 행위이다. 고유함을 가진 말은 자유로운 담화 속에서 발화되며 이것은 인간 활동을 연결하고, 물질적 환경과 문화적 토대를 창조한다. 말리노프스키는 영상에 대한 부분을 언급했다. 만약 경작지 활동을 찍은 유성 필름을 가지고 있다면 그 효과는 무엇일지 예상했다. 시각적으로는 별다른 설명 없이 명백하게 민족지적 해설이 가능할 수 있지만, 거기에 실린 소리는 이해가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영상을 찍더라도 다층적이고 수고스러운 언어학적 분석은 필수적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영상과 이미지를 바라보지만, 풍부한 언어학적 분석은 상실했다. 현대사회는 디지털의 발달로 시각적 자극에 압도되어 밈과 숏폼 영상으로 무한 반복되는 말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는 재현 언어에 갇혔다. 영상을 볼 때 우리의 몸을 살펴보자. 스크린 속 영상을 바라보면 몸은 굳으며 엄지손가락만 까딱거릴 뿐이다. 재현 언어 속에서 몸짓이 사라졌고, 협력이 사라졌으며, 인간의 고유함이 사라지고 있다. 말리노프스키의 언어학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명확해졌다. 말리노프스키가 ‘불가능한 번역’이라는 현실에서 출발해 점진적 번역을 가능하게 만든 것처럼 현실을 인정하면서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풍부하게 맥락적 언어를 해석하며, 어떤 몸짓을 만들고, 어떻게 고유함을 지켜나갈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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