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에세이/ 이기심과 절제
동화인류학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에세이/25.5.6/오켜니
이기심과 절제
주제문 : 트로브리안드인들의 육체적 포만감과 정신적 만족감은 관계에서 나온다. 주술적 세계관으로 우주와 나의 관계가 설정되고, 부거제와 외족혼을 바탕으로 한 의무적인 증여 관계 속에서 이기심이 조절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배부름은 행복의 근원이다. 육체적 포만감을 기본으로 정신적 만족감이 따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자들은 금식을 통해서 종교적 성취를 향해 가니 육체적 포만감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이지만 말이다. ‘모든 행복은 위장으로부터’라는 신조를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자주 말한다. 카야사(수확물 전시 경쟁)를 끝내고 자신의 마을로 돌아온 젊은 토착민은 ‘삶의 바람직한 모든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씹을 겁니다, 우리는 먹을 겁니다, 우리는 낮에 토할 겁니다, 우리는 밤에 토할 겁니다,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은 비계가 있습니다.”(말리노프스키,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아카넷, p472) 그는 행복은 육체적 포만감으로부터 오므로 많이 씹고 토할 때까지 먹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이들의 신조는 우리 시대의 신조인 돈을 많이 벌겠다, 부자가 되겠다와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1910년대의 트로브리안드인들보다 훨씬 풍요로운 시대를 살지만 걸신들린 듯 먹거나, 남이 먹고 있는 동영상을 시청한다. 요즈음 과식을 넘어 폭식, 먹부림(먹다+몸부림), 먹방, 맛집 순례의 먹는 문화는 번성하고 있다. 우리는 많이 먹지만 덜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아서 많이 먹는 것일까? 우리의 육체적 포만감은 정신적 만족감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반면 ‘행복은 위장으로부터’라는 신조를 가진 트로브리안드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음식 섭취에는 절제를 보인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가 증여의 기반에 놓여 있다는 확신 속에서, 풍요의 물질적 형상(식량 전시, 창고에 가득 채워진 타이투)을 직접 바라보면서 위장이 만족하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들이 많이 먹지 않지만 배가 부른 이유를 찾아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적은 양의 식사
일상에서 그들의 식사량을 보자. 그들은 아침 일찍 경작지로 가는데 전날 저녁식사에서 남긴 차가운 음식을 조금 먹고, 낮에는 과일이나 코코넛 밀크를 마신다. 해질녁 가족들이 일을 마치고 귀가한 후에 불을 사용하여 요리된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 작은 얌이나 타이투를 먹거나 생선이나 들새나 돼지고기로 맛을 낸 ‘약간의’ 타로가 마련된다.
날 것의 식량과 익힌 요리
책에는 ‘축제에서 토할 때까지 먹겠다’라는 상용어구 같은 표현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축제는 식량의 주인이 계속 바뀌는 현장이다. 우리에게 축제는 음식을 먹으며 행사를 즐기는 것이라면 그들은 축제에서 음식을 나누지만 가족들끼리 소수로 모여 먹는다. 그들 문화에는 ‘요리’와 ‘쌓여 있는 식량’에는 대립이 존재한다. 추장의 집과 그의 브와이마(창고)가 있는 마을 안쪽에서 요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마을 바깥쪽 즉, 공동체 일원의 숙소와 창고가 있는 곳에서만 요리를 한다. 마을 안쪽은 공공의 공간이며 공공의 공간에서는 익힌 음식이 아니라 식량이 오고 가는 현장이 된다. 예전 우리나라의 마을에서 결혼이나 제사와 같은 행사가 있으면 풍성하게 요리를 준비하여 가난한 사람까지 먹을 수 있게 준비가 되었다면 그들은 풍성한 식량의 의무적 거래로 대신한다. 오고 가는 식량의 증여 속에서 그들은 풍성함과 부를 느끼고 연달아 열릴 부족 행사의 즐거움을 상상한다.
겉은 허영, 속은 의무적인 증여
그들은 그들의 에고(자기 중심적인 마음)를 마음껏 발산한다. 자신의 경작물을 자랑하고 경작물의 크기를 서로 비교하고 너희 공동체에 식량이 있느냐로 시작하는 공동체 간의 싸움도 종종 벌어진다. 개인 간에, 공동체 간에 위세 게임은 기세등등하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이기적인 모습 안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 이들은 자신의 경작물을 자신의 가족을 위해 쓸 수 없다. 경작지를 할당받은 남자를 중심으로 아내와 아들이 함께 일하지만 이들 노동 결과물의 50% 이상은 남자 누이의 집으로 보내진다. 그리고 이 집은 아내의 남자 형제들이 보내준 경작물로 살아가게 된다. 아무리 경작자가 자신의 농작물을 자랑하더라도 그 농작물의 최종적인 도착지는 경작자 누이의 집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누가 누가 많이 주었는가를 두고 설전을 벌인다. 이들의 언어에는 ‘주다’와 ‘선물’과 관련된 단어들이 많다. 주었으면 분명 받은 사람이 있을 터인데 이들의 관심은 ‘주다’에 초점이 있다.
경작자로서 그의 명성은 수확물 가운데서도 누이의 가구에 증여할 농작물의 크기와 품질에 달려 있다. 우리구부(의무적으로 증여해야 되는 수확물)를 증여하는 일은 허영의 감정을 만족시킨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씨족의 이방인인 매부에게 증여하며, 이러한 선물을 자랑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누이를 위해서, 자신의 후손인 외조카를 위해서, 미래에 그를 위해 일하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종족의 영광을 위해서 식량을 제공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마음은 저절로 움직인다. 그래서 우리구부 선물은 자랑하고 전시하고 비교하기에 알맞다.
반면, 자신의 가구를 위해 사용되는 타이투는 슬며시 감추어진다. 감추어서 많이 쟁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지 않고 경작자의 창고에 저장된다. 자신과 가족을 먹이는 일은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한다. 마을 공동체를 위한 추장의 창고는 마을 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있고 안에 있는 타이투가 밖에서 보이게 전시되지만, 개인을 위한 창고는 미적인 감각을 더하지 않고 실용적이게 만든다.
식욕에 영향을 미치는 주술
빌라말리아 주술은 타이투 수확 후에 브와이마(창고)를 채우면서 행해지는데 타이투가 상하지 않고 오래 남아 있도록, 마을이 풍요로 가득 차게 하려고 수행되는 것이다. 이 주술은 겉으로 보기에는 얌 창고와 그곳에 쌓인 식량을 향하고 있지만 진짜 목적은 인간의 배에, 식욕에 영향을 미친다. 이 주술이 행해지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은 식욕을 억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하나의 덕목이다.
주술적 세계관의 겸손
그들은 주술적 세계관 안에서 삶의 불확실성을 주술에 의존한다. 주술은 완벽한데 개인은 불완전하다. 자신의 책임을 온전히 다하면서 결과는 주술에 맡긴다.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지금의 가치관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