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자서전(2)] 왕과 나란히
재미있다는 것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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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인류 연구회 / 『안데르센 자서전』(2) / 2024-12-11 김유리
국왕과 나란히 마차에 앉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은 자서전을 썼다. 세 번에 걸쳐 길게 썼다. 첫 자서전 발표 이후 9년이 흐른 뒤, 두 번째 자서전을 출간했다. 마흔 두 살부터 십년에 걸친 기간을 회고한 이 글의 제목은 “스칸디나비아의 이름으로”이다. 전쟁, 콜레라, 정치와 사회 변화, 19세기 기술 문명과 대형 참사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펼쳐진다. 이 배경막 앞에서, 1편에 이어 여행하고 유명인사들을 만나고 문학계에 자리를 잡아가는 동시에 몸과 마음의 병을 앓는 작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는 계속 내 인생의 기록들을 새로 정리하고 지나치게 자세한 것들은 가지치기를 해왔다. 온전하게 된 자서전을 내고 싶었다. 내가 느끼고 기뻐했던 모든 걸 담고 싶었다. 내가 걸어온 길에서 만났던 수없이 많은 유명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사건들이나 환경에 대한 인상을 담고 싶었다. 그리고 신이 내게 고통을 주고 또 극복할 힘을 주었던 모든 것들을 담고 싶었다. 또, 내가 살았던 시간 속에서 흥미가 있을 법한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싶었다(621-22).”
안데르센은 항상 글을 쓰고 있었다. 전업 작가란 글쓰기를 일로 하는 사람이다. 글 쓰는 사람들은 마치 글을 쓰기 위해, 그러니까 소재를 찾기 위해 경험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경험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쓰는 순서가 아니고, 글을 쓸 거리를 찾아서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가 아파도 거의 쉬지 않고 여행하고 저녁 초대에 응하는 것을 보며, 일화를 수집하기 위해 취재하러 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일화의 주요 등장 인물은 작가 본인이다.
성장의 이야기들은 주인공의 실패 일화를 다룬다. 실패를 통해 미숙함을 벗고 자기 변화와 세계관의 변화를 이루어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고대) 비극은 완벽하고 고결한 자의 추락을 다룬다. 희극은 낮은 수준의 사람들을 등장시키지만 그를 성장시키지는 않는다. 안데르센의 자서전은 성장담이다. 남들보다 못한 처지에서 도움, 노력, 행운, 장애와 훼방을 거쳐 발전해간다.
안데르센의 자서전에서 그가 겪은 명예로운 일과 수모가 모두 글감이 된다. 자기에게 유리한 내용만 골라서 쓰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남과 나의 언행도, 그로 인해 불러 일으켜지는 속 생각도, 감정적 동요도 쓸 거리가 된다.
감정을 쓴다는 것은 단지 외적 사건만 서술하는 것과 달리,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면이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슬픔과 기쁨 앞에서 공감하지 못할 경우에는 매우 난처하고 부담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이를 알기에 사람들은 자기의 1차적인 감정은 숨기고 비밀 일기나 익명이 보장되는 곳에서만 욕설이나 짝사랑의 감정 등을 드러내곤 한다. 그러면 감정은 글감으로 부적절한가?
감정을 다루는 방법에도 여러 층위가 있을 수 있다. 안데르센이 자서전에 인용한 영국의 한 비평을 보며 구분해보자.
“감상주의에 대한 반감을 새로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릇되고 병약한 것은 아무리 우아하고 매혹적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보려고 하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으며, 또한 보고 듣는다 하더라도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감상주의는 다르다. 피 끓는 감정보다는 덜 뜨겁고, 열정적인 신념보다는 덜 깊고, 천재성이 눈부시게 번쩍거리는 그 광활함보다는 어떤 정서 체계인 이 감상주의에는 누구나 조금씩은 이끌린다. 감상주의에 기초한 기묘함과 익살스러움에 대해서는 안데르센의 작은 이야기들이 독보적이다(574).”
‘덜 뜨겁고, 덜 깊고, 덜 번쩍거리는’ 정서 체계로서의 감상주의가 안데르센이 다루는 감정의 영역이다. 병적인 감정은 아닌 상태다. 그런데 이 영역은 다른 작가들이 잘 다루지 않는 ‘독보적인’ 영역이고, ‘누구나 조금씩은 이끌’리는 그런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문학을 추구하는 경우에는 선호되지 않겠지만,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해도 항상 위대할 수만은 없는 것이 사람이다. 우리 모두가 이미 극복했다고 여기지만 실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안데르센의 동화의 감상주의가 담고 있는 것 같다. ‘유아적’이거나 ‘천박’하거나 ‘감상적’이거나 ‘사소’하거나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착하거나 여리며, 자기 몰두적이라고 칭해지는 그런 부분이다.
안데르센은 극작 부문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작가의 입장에서 극장은 돈이 도는 곳이고 따라서 경쟁과 견제가 심했다. 극작과 각색의 영역에서 경쟁하기에 안데르센의 스타일, 소재, 출신, 교육의 정도가 모두 비난의 표적이 될 만한 약점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가 이야기, 또는 작은 이야기라 칭한 동화에서 덴마크 문학계를 넘어선 큰 성공과 영예를 거머쥔 데에는, 그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영역을 개척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독보적’이라는 평가는 그가 남들이 다루지 않는 소재와 형식을 선택했고, 경쟁자가 많지 않은 독자 대중을 형성해간 까닭일 것이다. 기존 지식과 문화 향수 계층 바깥의 농부, 노동자, 여성, 어린이를 포함한 독자 대중 말이다. 이것은 경쟁이 심한 문학계에서 서식할 틈새를 발견하는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안데르센의 영어 번역자였다가, 냉혹한 비판자로 돌아선 메리 호위트의 비평문은 안데르센이 자기에 빠진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이 내용은 자서전에서 안데르센이 자기 손으로 인용했다.
“안데르센이 그후에 내놓은 작품들은 모두 실패작이다. ······ 그의 작품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어린아이 같은 성정은 왕자와 공주만을 좇는 허망한 꿈이라는 구조 속에서 놀라운 상상력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시인은 자기중심주의 혹은 자존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 그는 늘 자기 자신을 얘기한다. 자신의 생애를 이야기하고 자기 느낌을 얘기한다. 이런 그의 특징은 처음엔 무척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두 번째 다시 만나면 신선함을 느낄 수가 없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나면 정말 가당치도 않다는 걸 깨닫게 되다. 그것은 단순한 변주의 반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571-72).”
안데르센의 자기 몰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문자 사회의 신화와 민담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동화가 근대에 이르러 문자로 기록되고 개별 작가의 국민 문학으로 창작되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림동화를 비롯해, 안데르센이 구전 민담을 각색한 동화에서 주인공은 자기에 몰두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 안데르센의 창작 동화는 주인공의 내면 정서를 다룬다. 슬픔, 억울함, 우울감, 유쾌함, 자기 파괴적 열망, 당혹감, 의지에 찬 다짐, 경외감, 경탄, 부끄러움, 자포자기하거나 신랄한 냉소 등이 나타난다. 내면의 등장은 구전 민담과 창작 동화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된다. 안데르센 동화에서는 왜 내면이라는 장소가 설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안데르센의 내면 장소는 감정들이 표현되는 무대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일어난 서로 다른 감정들이 마치 등장인물처럼 이어서, 또는 동시에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다. 특히, 안데르센의 자기 인식에 다성적인 동요가 있다. 정신분열적이라고 해야 될까? 빠르게 여러 인식이 교차하며 공존한다. 좋은 평가를 받으면 기쁘다. 그러나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만약 그럴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게 허영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잇따른다. 혹평이나 비방을 받는다고 하자. 그러면 상처를 입고, 대체 왜 나에게 그렇게 부당한 평가를 할까 묻는다. 이유를 알 수 없을 때는 감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고뇌하거나 무슨 수를 내야겠다며 편지로 직설적으로 묻거나, 익명으로 작품을 발표해 정당한 평가를 받아보는 극복할 방법을 찾아 애를 쓴다. 감정에 시달린 끝에, 거리를 두기 위해 여행을 가기도 한다. 그러는 내내 그 자신에 대한 인식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급작스럽게 불안해한다.
“(스웨덴 여행 중에) 스톡홀름 사람들은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내게 경의를 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럴 경우 덴마크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시기하고 공격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파티장에서 내가 집중적으로 화제의 인물이 되거나 사람들이 나를 위해 건배할 때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두려워했다. ······ 카를렌 부인이 함께 산책하자고 했다. 보는 사람이 많지 않아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감히 두려워 정원으로 나서지 못했다. 사람들이 내게 경의를 표하려 한 건 선의의 배려였지만 뒤이어 닥칠지 모르는 비난과 조롱이 두려웠다. 상상만으로 그 모든 걸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548-49)”
1차적으로 안데르센에게는 실제로 조롱과 비아냥이 따라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무시와 조롱이었는지 모르지만, 점차 유명세를 치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느 때는 과장된 면이 있을 정도로, 명예와 칭찬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거리의 불쌍한 부랑인일 뿐이고 지나가던 왕이 불쌍히 여겨 망토를 덮어준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422).”
위 인용문은 그가 커리어를 쌓아 올라가는 과정이 쓰여진 자서전 1부의 말미의 자기 인식이다. 자서전 전체는 이런 힘들고 괴로운 상황을 벗어나는 과정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2부에서 작가는 자신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인 명예와 인정의 징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성공은 작가로서의 그의 노력과 성공으로 완수된다.
안데르센은 여러 계층, 여러 연령의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다. 여러 왕들이 안데르센을 좋아했다. 덴마크 왕은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그에게 동화를 읽어달라고 청한다. 다른 왕실과 귀족들이 여흥의 자리에서 동화를 읽어달라고 청한다. 사람들은 혼자 읽는 것보다 누군가 읽어주는 것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 걸까?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고, 이미 아는 이야기를 다시 듣기를 청하는 것은 왜일까? 어떤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을 만나는 것은 이야기가 수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임무다. 나에게 와닿는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것은, 생활인인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과의 처리와 관계나 일에서의 시행착오를 다시 반추하며 의미를 찾아보는 작업이다. 그것은 어린 아이이거나 농부이거나 왕이거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하는 것은 어른들이 문자 읽기 노동의 장벽 없이 이야기와 만나는 방법이다.
안데르센은 왕들이 좋아하는 시인이었다. 왕의 시인이라니, 안데르센은 명예욕이 이끌리는 자인가? 구두쟁이와 세탁부의 아들 안데르센은 계급을 배신한 비굴한 시종인가? 먹고 살려고 그런 것일까? 안데르센은 나랏돈에 기생하는가? 모두 예상 가능한 비난들이다. 실제로 그런 비난을 받았고, 의식했다.
안데르센은 왕의 시인이었다. 자서전 2부에서 뮌헨 여행 중 국왕 막스가 “친한 손님으로”(하인이거나 백성이 아니라) 자신을 맞이했다고 적는다. 왕과 함께 지붕 없는 작은 마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드라이브를 한다. 여권 검사를 받기 위해 제지 받지도 않았고, 농부들은 길가에 서서 자기들의 왕에게 인사를 했다. 마주친 다른 마차들은 왕의 마차가 지나갈 때까지 멈춰 서서 기다렸다. 드라이브 중에 왕은 안데르센에게 자서전 1부를 읽었다면서 궁금한 것을 묻는다.
“왕은 ······ 그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을 때 느낌이 어땠는지 물었다. ······ 가난하고 외로운 게 어떤 건지 그리고 화려한 물건으로 가득 찬 방에 있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알았다. 조롱을 받는 것과 존경을 받는 게 어떤 건지도 알았다. 그런 얘기를 왕에게 다 했다(627).”
안데르센은 사람들이 가장 알고 싶은 것에 대한 이야기 거리가 있다. 사람들의 고민은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든가, 나만 힘든 것일까, 한다고 하는데도 쏟아지는 이 모든 오해와 비방들은 감수할 가치가 있을까, 극복할 수 있기는 한 것인가? 안데르센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동화 나라에서는 그런 마음을 가진 존재들이 살고 있어서다. 그리고 그 동화 나라 백성들의 심정을 두루 알아주는 사람이 안데르센 자신이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은 동화 나라의 임금님이었던 것일까?
안데르센의 자서전 2부 결말의 내용은 ‘드디어 덴마크도 나를 인정했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중년에 이른 안데르센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형식을 완성했고, 지위를 얻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너 같은 자가 있을 자리가 없다’고 여긴 문학계에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시간과 노력이었다. 안데르센은 <덴마크 문학월평>에 실린 그리무르 톰센의 비평을 인용하며 자기가 의도한 바를 명쾌하게 표현했다고 평가한다.
“이들 작품이 강이라면 이 강에는 두 개의 흐름이 있다. 위대한 것과 변변찮은 것들을 흥미진진하게 교차시키고 대비시키는 게 강물 위쪽의 흐름이라면, 강물 아래쪽 깊은 곳에서는 모든 사물이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인도하는 진실이 도도히 흘러간다. 이게 바로 안데르센의 유머이다(632).”
모든 사물이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인도하는 진실의 흐름이란 무엇일까? 역사인가? 시간인가? 변변찮으면서도 위대한 인간 존재의 복잡성의 효과인가? 그런데 이 인용문에서 가장 의외의 것은 “안데르센의 유머”라는 표현이다. 왜 나는 안데르센이라는 작가를 인어공주의 고통, 성냥팔이 소녀의 비참함, 못 생긴 아기 오리의 난감한 처지에 동일시한 것일까? 안데르센의 ‘감상주의’에 시선이 팔려, (맨처음 인용한 비평에서 언급되었던) 기묘함과 익살스러움을 무시해온 것 같다. 감상적인 것은 독자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감상주의야말로 작품이 독자의 코를 꿰는 도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열네 살의 안데르센이 자의식 과잉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바보 같은 순진한 희망과 자신감에 차서 넓은 세상으로 나갈 때를 떠올려 본다. 그 소년을 자기 살던 집에서 끌어내 뿌리를 뽑은 사회적 상황이 분명 있다. 그런데 이 소년이 품은 상상력과 표현력이 세계 속에서 고유한 간섭 무늬를 그려낸 것이다. 그는 상류 사회와 문학계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때론 불안하고 때론 신랄해졌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자서전을 읽다보면, 그의 동화적 상상력은 그를 동화 나라의 주인공 자리에서 한 번도 내쫓은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