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에세이] 작가 소개를 겸해
동화인류연구모임 에세이(작가 소개) 2024-12-18 김유리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고
(안데르센 소개글)
동화인류연구회에서 지난 넉 달 동안 안데르센의 동화와 자서전을 읽었다. 모임에서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과정은 두 세계의 여행이었다. 동화 전집을 읽으며 이야기에 나오는 세계를 만날 수 있었고, 자서전을 읽으며 이야기가 소통되는 세계를 알 수 있었다. 안데르센은 동화를 썼고, 자신이 쓴 동화를 사용하는 방법을 독자 공동체에 안내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구연(口演)의 재료를 썼다. 그의 동화는 구연으로 완성된다.
1.동화가 구연될 때
안데르센의 동화는 구연의 재료다. 안데르센은 30세부터 거의 매해 크리스마스에 맞추어 동화집을 발표했다. 이 책은 집에 친지를 초대해 여는 연말 모임에서 구연하기 좋도록 쓰여진 이야기 모음집이다. 1프랑 정도에 판매되었다는 이 책으로 각 가정에서는 구연자가 마음에 드는 내용으로, 적당한 길이의 이야기를 고를 수 있다.
안데르센은 각색이 장기다. 각색이란 어떤 이야기를 무대에서 연기할 수 있는 형식으로 바꾸는 문학 작업이다. 안데르센은 자기가 듣거나 지어낸 이야기를 구연에 알맞게 각색한다. 안데르센 동화는 구연으로 완성된다.
구연이란 1인극의 형식이다. 구연자는 1인 다역 배우처럼 하나의 극에 등장하는 여러 역할의 목소리를 연기한다. 국어책 읽듯이 단조롭게 읽거나 웅변조로 연설하듯 말하지 않고 평소에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인 것처럼 연기한다. 구연은 화자의 서술과 인물의 대사(대화, 혼잣말, 속으로 하는 생각)를 포함한다. 그 외에 음향 효과도 입으로 내야 한다. 무대장치라고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적 배경도 말로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소품을 사용하거나, 표정과 몸짓 연기를 할 수 있다.
구연은 역할 놀이다. 동화 구연은 아이들의 인형 놀이와 소꿉장난과 유사성이 깊다. 구연자는 역할 놀이하는 아이처럼 혼자서 여러 역할을 다 한다. 그는 엄마도 되고 아빠도 되고 왕도 되고 공주도 된다. 동화에는 역할 놀이의 유희의 요소가 들어 있어 어린이 친화적이다.
인간 발달 과정은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에 걸쳐 있다. 아기는 이야기를 듣고 자라, 역할 놀이를 하다가, 문자의 세계로 들어간다. 아기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음향과 대화와 몸짓으로 이루어진 구연이다. 아기가 혼자 놀기 시작하면 인형놀이나 소꿉장난을 하며 역할을 흉내 내고 감정을 표현하다. 아이는 이야기가 구연될 때 이야기 속으로 푹 잠긴다. 아이는 구연자로서의 나, 청취자로서의 나,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 등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이야기 밖을 잊는다. 아이 자신이 배우이자 연출자이자 향유자인 것이 역할 놀이의 세상이다. 역할 놀이의 세상에 문자가 들어오면, 이야기와 현실이 무대와 객석 사이와 같이 양분된다. 무대와 객석의 이분법을 수용하면서 아이는 문자 인간으로 바뀐다.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면 관객은 수동적인 소비자 역할을 받아들인다. 문자를 받아들인 인간은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침묵 속에서 따라가는 훈련을 받는다. 무문자 인간일 때 아이들은 이야기의 일부였다가, 문자 인간이 되면서 이야기에서 점점 분리되어 나온다. 그 이행 시기에 아동을 위한 구연 동화가 아동의 이행을 돕는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전개 발전시킨 동화를 구연하는 장에 즐겁게 참여한다. 동화는 학교보다 앞서서, 학교보다 부드럽게 문자 인간을 만드는 초급 교재로 활용될 수 있다.
동화가 소통되는 세계에서 무대와 관객 사이의 분리선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아니다. 누구나 넘나들 수 있는 낮은 벽이다. 구연을 잘 하면 누구나 다른 사람 앞에서 동화를 재미나게 들려 줄 수 있다. 아이를 키우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데 알고 있는 이야기가 동이 났다면 동화책을 뒤져서 더 찾아내면 된다. 안데르센 동화는 구연의 재료이며 구연자의 각색에 허용적이다. 듣는 사람과 기타 사정에 맞춰 더 재미나게 할 수 있다면 덧붙이거나 빼거나 바꿀 수 있다.
안데르센 동화는 구전 민담의 각색에서 출발해 창작으로 넘어간다. 그는 구전되는 민담을 활용하지만, 그것을 수집하는 일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이야기든 구술될 수 있도록 각색하는 작가다. 그는 떠도는 많은 이야기와 고전과 자기의 인생 경험 중에서 동화가 될 만한 것들을 줍고 선별하는 데 유능한 ‘편집자’이고, 구연 동화에 적합하게 창조하는 ‘각색자’이며, 직접 구연하는 ‘연출자 겸 배우’다.
안데르센 동화는 파티용 이야기다. 안데르센 동화를 향유하는 방법은 아래와 같은 순서로 이루어진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새로 나온 그의 동화책을 산다. 먼저 혼자서 읽고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고른다. 파티를 준비하며 친지와 가족들이 기뻐할 수 있게 구연하는 연습을 한다. 이 과정은 당일 파티 참가자들 앞에서 구연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구연 장면을 상상해본다. 구연이란, 목소리, 표정, 몸짓 연기로 이루어진다. 관객과 눈빛을 맞추고, 호응을 유도한다. 구연 도중에 관객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구연을 위한 동화는 유연하다. 구연의 길이가 너무 길면 아이들이 집중을 못할 수도 있으니 줄인다. 너무 짧으면 아쉬우니 여러 편 준비한다. 너무 내용이 유치하면 어른들이 지루해할 수도 있으니 통찰이 요구되는 현실적인 질문거리도 담는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떠들고 싶어도 자제해야 한다. 동화 구연은 아이들이 어른과 섞여 예의범절을 익히는 과정이다. 아이들의 눈과 귀를 구연자에게 향하게 하는 방법으로, 안데르센은 종이 오리기 공작을 하면서 구연을 하기도 했다. 구연이 끝나면, 그의 종이 공작은 장식품이자 기념품으로서 선물된다.
구연은 눈과 귀가 집중되는 무대에 서는 일이다. 그러나 이 무대와 관객 사이를 가르는 분리의 정도는 약하다. 동화가 소통되는 장소는 본래, 가난한 집안의 가정이거나, 부자 집안의 육아실이다. 동화는 아기를 돌보는 엄마, 할머니, 유모가 아이를 품에 안고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아기는 양육자의 음성과 온기에 접촉하며 울음을 그치고, 이야기가 인도하는 상상의 세계를 발견하면서 진정한다. 아기가 시작하는 인생은 꿈과 환상의 세계 안에서 여러 정체성들을 자기로 체험하면서 시작된다. 아기는 나비와 벌에 업혀 다니는 작은 부스러기였다가, 두꺼비의 신부감이었다가, 용감한 꼬마 병정이었다가, 회초리를 맞는 공주였다가, 사나운 바람 형제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더 크고 거칠고 사나운 할머니의 보호를 받는 조그만 아이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동화를 통해 이분법의 세계에 적응해간다. 엄마의 품과 할머니의 발치에서 열리기 시작한 구연의 무대는, 가족 모임이 열리는 응접실의 크리스마스 트리와 벽난로 앞으로 확장된다. 얌전히 앉아 이야기를 듣는 언니 오빠와 다르게 막내는 자기도 모르게 구연자에게 다가가 급기야 구연자에게 몸을 기대고 이야기를 듣는다. 사람들은 그런 아이를 보며 미소 짓는다. 이는 익숙한 풍경이다. 이 아이가 더 자라면 어른들만 갈 수 있는 극장에 숨어 들어가 시간을 잊고 빨려들듯이 공연을 경험하게 된다. 숨 죽이고 지켜본 공연에 아이는 온 마음을 빼앗긴다. 아이는 집에 돌아와서 며칠이고 배우의 분장, 대사, 연기, 노래를 되풀이하며 논다.
공연에 빠져 무대 위에 올라가고 싶었던 세상의 아이들 중에 어린 안데르센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혼자 놀면서 인형을 만들어 역할 놀이를 하던 안데르센은 일하러 공장에 가서도 동료 노동자들 앞에서 일인극을 펼쳤다. 사춘기 안데르센은 꿈에 부푼 배우지망생으로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간다. 그가 무대에 서기 위해 춤을 배우고 노래를 배우며 짜투리 배역을 수행한 과정이 자서전에 기록된다. 그가 극장 무대에 오르는 길은 끝내 막히지만, 이야기를 무대용 노래와 대사로 각색하는 길이 조금씩 열린다. 그리고 30세부터 출간하기 시작하는 구연용 동화는 덴마크를 넘어 유럽 이웃 나라에서도 환영받는다. 안데르센은 모든 가정과 파티장에 구연의 무대를 열었다.
2.동화 기차가 아이들을 실어가는 곳
유럽에서 어린이를 위한 동화는 구전 설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구전 설화는 민중이 향유하는 옛이야기이고, 아이를 돌보는 보모(유모)와 상층 계급의 아이들 사이에서 유통되었다. 구전 설화가 문학으로 출판되는 경우는 책 행상들이 농민층과 하층 계급에게 저렴하게 판매하였다.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은 구전 설화를 멸시했다. 이러한 멸시가 사라지는 것은, 유럽에서 구전 설화에 토대를 둔 문학 작품들이 창작되어 궁정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였다. 궁정과 상류층의 살롱을 출입하면서 동화 장르는 하층민의 이야기라는 딱지를 떼고 상층부에서 받아들여진다.
왕실이 먼저 동화 장르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구전 설화에 담긴 ‘망측한’ 내용이 예의범절에 맞게 편집될 수 있었던 점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 이유는 동화에서 이야기되는 세상이 왕과 농부가 있는 오래된 세상이라는 점이다. 후기 봉건 사회에서 구체제의 사회는 해체되고 있었고 당대 문학계에서는 부르주아의 이념들을 차용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반면, 동화는 왕실에서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옛 사회 관습에 따르는 세계를 그린다. 동화가 왕실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이 동화에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후, 동화는 이후 당대의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수용했고, 점차 안데르센 동화는 ‘덴마크적인 것’을 담기 시작한다. 동화는 이제 봉건 사회가 아니라, 국민 국가의 세계관을 담기 시작한다. 안데르센 동화는 덴마크의 모든 계층을 아울러 아이들에게 덴마크라는 하나의 국가라는 신질서의 세계와 만나게 해준다.
이와 같이, 구전 설화의 전통에서 비롯된 유럽의 동화 장르는 구 세계가 붕괴되는 시기에 출현했다. 후기 봉건 사회에서 동화는, 당대의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사회에 적합한 존재로 아이들을 무난하게 실어 나르는 역할을 수행하는 할 수 있도록 기대되었다. 유럽의 동화는 그러한 역할을 수용하면서 전 계층에 받아들여졌다.
정리하면, 안데르센 동화가 구연되는 무대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질적으로 변화되었다. 기본적으로 각 가정의 모임 자리에서 출발한 구연의 장소는 계층적으로는 농부의 가정과 상류층의 육아실에서 출발해, 왕실을 거쳐 상층의 응접실(살롱)까지 확대되었다. 또한, 덴마크 국경을 넘어 유럽의 이웃 나라로 확대되었다. 아니, 이웃 나라를 거쳐 덴마크에서 수용되었다고 하는 것이 순서상 맞을 것이다. 안데르센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구연이 이루어지는 무대가 소규모 모임 장소를 벗어나 대중 회합으로 확대되었고 안데르센 자신도 이런 변화에 적응해야 했다.
3.안데르센의 불안
무대와 관객의 이분법으로 인해 발생하는 효과가 있다. 무대와 관객이 분리되면 시각이 주요 감각으로 부상한다. 이 시각은 일방적이다. 관객들은 어두운 객석에서 하나의 밝은 무대를 본다. 이분법의 세계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를 분리하고, 둘 사이의 관계는 시각에 집중된다. 시각이 부각되면 세계는 액자처럼 생긴 무대 프레임에 갇힌다. 세계는 걸어 들어가 모험하는 곳이 아니라, 전체 틀을 파악할 수 있는 거리에 떨어져 관람하는 곳이 된다. 그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은 세계 속을 모험하는 나 자신이 아니라, 그를 보면서 평가하고 해석하는 비평의 대상이 된다.
시각화한 세계에서 정체성은 “보여지는 나”로 경험된다. 보여지는 나라는 시각적 정체성에 집중하면, 지금 내 모습이 보이고 있는지, 보인다면 어떻게 보이는지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이미지 자체도 분열되어 나의 이미지는 내가 떠올리는 내 이미지와, 나를 보는 사람의 시선에 비친 내 이미지 사이에 가늠되지 않는 미지의 불확정적인 거리가 발생한다. 무대라는 조건은 이 관계를 일방적인 것으로 만든다. 일방적으로 시선의 대상으로서만 서야 할 때 무대에서 보여지는 나라는 자기 정체성에 매달리는 것에는 위험하다. 공연 끝에는 환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야유가 따라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안의 정서를 유발한다. 불안은 보여지는 나에 관심이 집중될 때 일어나는 정서 반응이다.
보여지는 나라는 것은 이미지다. 이미지는 환영처럼 곧 사라진다. 관객을 전제로 하기에 평가에 따라 이미지가 흔들린다. 연출한 대로 수용되지 않을 위험이 늘 있으며, 비난이나 오해로 인해 생겨난 이미지가 그대로 굳혀질 위험도 있다. 이미지, 즉 보여지는 나라는 것은 자기정체성으로 삼기에는 부적당해 보인다. 그러나 공동체가 붕괴되어 뿌리 뽑힌 자들은 자기 정체성을 보여지는 나에서 찾는다. 그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초대장 없이 문을 두드리면 행색만 보고 문전에서 박대당하는 것과 같아, 옷부터 갖추어 입게 되는 원리다. 사춘기부터 평생에 걸쳐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입증해야 하고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근대적 현상이다.
안데르센의 전기의 결말은 안데르센이 “란”이라는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란은 장갑 만드는 기술로 돈을 벌어, 가난한 아이들이 교실과 옷을 지원한 오덴세의 빈민 출신 상인이다. 안데르센도 란과 같이 사회적 인정을 받고 성공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모델이 되어, 뿌리 뽑힌 빈곤 계층의 아이들이 자기를 다시 ‘심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최소한의 존엄을 갖출 수 있는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도울 수 있게 되었다. 란을 기리는 축제장에서 안데르센은 그의 이야기에서 자기를 발견한다.
안데르센은 결국 자신이 받은 축복은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 평생 “나 자신”이 뿌리 내릴 곳을 찾아 온 미혼의 독신 여행자 안데르센의 삶의 이야기는, 사회에 진입하는 이행 과정이 이토록 길게 요구되는 새로운 사회 질서 속에서 생겨난 인생 이야기다. 안데르센이 자서전에서 자기 손으로 쓴 자기 삶의 동화에서 주인공은 낙관적일지언정 불안에 시달리고, 혼자이고, 발은 대지에서 떼어져 언제나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있다.
참고도서
마셜 매클루언 『구텐베르크 은하계』 72~85쪽
잭 자이프스 『동화의 정체』 1~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