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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에세이] 마음의 종소리

작성자
남연아
작성일
2024-12-23 11:15
조회
33

마음의 종소리


  아이를 키우면서 성장하다라는 동사를 매일매일 경험한다. 출산하고 아기가 처음 내 품에 안겼을 때 정말 아기가 작다는 사실에 놀랐다. 2.86kg으로 태어난 아기는 목도 못 가누는 존재였는데 뒤집기를 하고, 기어다니고, 일어서고, 이제 두 발로 걷는다. 아이의 신체적 성장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매 순간 놀라웠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성장의 의미와는 달랐다. 근현대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은 신체적으로 몸이 자라고, 정신적 성숙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우리는 성장을 통해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현대 시대의 성장은 성공을 향한 과정과 노력으로 생각한다. 현대인은 ‘성장’이라는 명목하에 끝이 안 보이는 사다리를 올라간다. 회사원은 이제 월급 이외에 부수입이 필요해 부업을 알아본다. 기술적 공부, 커리어 발전으로 나의 월수입이 증가해야 한다. 상위 1%의 사람들도 더욱더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사고 체계는 육아에도 적용이 된다. 요즘 부모들은 아기를 한없이 연약한 존재로 여기고, 아기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미션을 가진다. 이런 식의 성장 개념으로 육아한다면 모든 성장 과정을 빨리 해치워야 하는 과제가 된다. 하지만, 아이 그리고 사람의 완성은 어디까지일까? 그 아이가 학교 졸업하고, 취업해서, 결혼하고, 독립하면 그때 완성되는 걸까? 현대적 성장 관점은 성장의 순간을 지우며, 성장의 결과에만 집중한다.

  성장에 대한 많은 의문이 생길 때 나는 동화를 읽기 시작했다. 동화 속에서 현대적 성장과는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성장 이야기는 굉장히 익숙했다. 끊임없이 노력해서 어떤 곳에 다다른다. 심지어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성장의 다른 관점을 찾고 싶어 동화를 폈지만, 익숙한 현대적 성장 스토리들이 나의 기억에 남았다. 그중 하나 작품은 바로 「종」이다. 어느 날부터 도시에 아름다운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도대체 종소리가 어디서 나는 건지 궁금해했다. 동화에서는 종을 찾으러 숲으로 떠나는 어른들과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른과 아이의 반응은 상반적이기도 하고, 또 닮아 있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어른들과 아이들은 종을 못 찾고 돌아왔지만, 숲속 끝까지 가서 종을 찾아낸 두 명의 아이들이 있다. 나는 이 두 아이는 어떻게 종을 끝까지 찾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어른의 영혼이 아닌 어른의 몸

  안데르센에게 견신례를 치르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견신례는 14살에 치러지는 세례식이고, 성인식이다. 종에서 아이들은 견신례를 치른 후에 종을 찾아 숲으로 떠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안데르센은 견신례를 받는 아이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의식이 끝나면 아이들의 영혼을 가진 그들은 옳고 그름을 아는 어른의 몸이 되는 것이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전집』, 현대 지성, 312쪽) 여기서 왜 옳고 그름을 아는 ‘어른의 영혼’이 아니라 ‘어른의 몸’이라고 했을까?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은 도덕적 판단이고 영혼의 영역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왜 몸이라고 했을까?

  여기서 안데르센의 삶을 들여다보자. 안데르센은 처음에는 소설로 유명해졌고, 30살에 동화를 쓰기 시작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안데르센은 소설, 희곡, 시도 함께 썼지만, 동화라는 장르를 강조했다. 안데르센에게 동화는 어린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볼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를 발표했다. 많은 비평가에게 왜 이런 글을 쓰냐며 비판을 받았지만, 안데르센은 매해 크리스마스에 동화를 발표했다.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는 민담이 전부였던 시대에 아이를 위한 창작물을 만든다는 건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안데르센은 왜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는 장르를 강조했을까? 물론 동화 작가로 세계적 성공을 거둔 것 또한 그에게 동력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공과 명성만으로 18년 동안 168편의 동화를 발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명해지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지만 동시에 비난을 받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매우 지치고, 오히려 창작에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은 안데르센의 소명 의식에 있다. 동화 작가로서 어른과 아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린아이의 영혼’을 끊임없이 깨워야 한다는 소명이 그를 창조적 에너지로 이끌었을 것이다. 안데르센은 성장의 의례인 견신례에서 ‘어른의 영혼’이 아닌 ‘어른의 몸’을 말했다. 안데르센에게 성장은 몸이 자라고 판단력이 성숙하지만, 영혼은 순수함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이뿐만 아니라 전 연령이 읽는 동화를 썼다.


종을 잊은 사람들

  「종」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영혼이 사라진 존재로 묘사된다. 그들은 종소리를 찾기 위해 도시에서 숲으로 떠나지만, 그들은 숲으로 가면서 우왕좌왕한다. 종소리는 이제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었다. 아무도 종은 찾지 못했지만, 숲에서 빵 장사를 하기도 하고, 숲은 관광지로 변했고, 종이 시의 소재가 된다. 왕이 종소리를 알았을 때는 ‘세계의 종지기’라는 벼슬이 내려지기도 한다. 부엉이 소리가 종소리라고 찾아낸 사람은 결국 ‘세계의 종지기’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도대체 그 소리가 부엉이의 머리인지 몸통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고, 매해 부엉이에 대한 논문을 쓰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어른들의 종소리를 찾아 숲으로 떠났지만, 아무도 종을 찾지 못한다. 심지어 종의 존재조차 잊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종소리가 사라진 도시였다.

  다음은 14살이 되어 견신례를 받은 12명의 아이들이 나온다. 그들은 드디어 종을 찾으러 숲으로 떠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견신례를 통해 이제 옳고 그름을 아는 어른의 몸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명의 아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여자아이는 무도회에서 입을 옷과 신발에 마음이 뺏겨 집에 가고 싶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물질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반대로 한 아이는 물질적으로 가난해서 돌아가야 했다. 주인집 아들에게 빌린 신발을 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떠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조건인 자신의 신발을 갖지 못했다. 마지막 아이는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물질적 유혹에 빠지고, 물질적으로 부족하거나,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아이들은 떠나지 못했다. 그들은 견신례는 치렀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어른의 몸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나머지 9명의 아이들은 숲으로 출발했다. 숲길은 험해서 옷들이 찢어지고, 피가 나기도 했다. 험난한 길 중간중간에서 아이들의 의견은 갈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어떤 아이들은 자신들이 온 곳이 숲의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종은 상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 다섯 아이들은 작은 은종 앞에서 다시 의견이 갈린다. 네 아이들은 이것이 자신이 찾는 종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아이만 이 소리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 아이는 왕자였다. 왕자는 아무리 봐도 그 은종은 작아서 자기가 들은 감동적인 소리를 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아이들은 왕자가 잘난체한다고 생각했다. 즐겁게 종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머물렀다. 10명의 아이들은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 돌아간 아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몇몇 아이는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죄책감을 가졌을 수도 있고, 몇몇 아이는 다시는 그 험난한 숲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결심한 아이도 있을 수 있다. 작은 은종을 보면 종을 찾았다는 성취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 아이들은 숲으로 떠났지만,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종을 잊었다. 이제 그들의 삶에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끝까지 가는 아이들

  종은 여전히 크고, 아름답게 울리고 있었다. 왕자는 종을 포기할 수 없어 혼자 길을 떠났다.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지만, 종을 찾았다며 즐거워하는 소리만 들렸다. 왕자의 마음에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숲속에서 더 큰 종소리가 울렸고, 왕자는 “이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꼭 종을 찾고 말 테야” (같은 책, 312쪽)라며 굳게 다짐한다. 숲속에서 왕자는 도시로 돌아간 가난한 아이를 만난다. 가난한 아이는 종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다시 숲으로 돌아왔다. 왕자는 같이 가자고 제안했지만, 가난한 아이는 자신의 나막신을 내려다보면서 왕자처럼 빨리 걸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둘이 생각하는 정방향은 반대였다. 결국 둘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가난한 아이는 떠나지 못하는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다시 숲으로 향했다. 왕자와 가난한 아이는 조건은 달랐지만, 종을 향한 강한 의지와 열망은 닮았다.

 왕자는 숲속에 다시 혼자 남았지만,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들어간다. 숲속에서는 다양한 생물과 풍경이 펼쳐진다. 못생긴 원숭이들, 이상한 꽃들, 백조, 징그러운 뱀, 개처럼 짖어대는 두꺼비 등등. 안데르센은 숲을 거칠고, 험난하고, 기괴한 생물이 사는 곳으로 묘사한다. 왕자는 여기서 어떤 생물한테도 관심이 없다. 심지어 존재한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친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벼랑 끝까지 올라간다. 결국 꼭대기에 다다르고, 거기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무척 아름답다. 거대한 파도, 눈부신 빨간 노을, 초롱초롱한 별, 꽃과 풀. “이 모든 자연이 하나의 거대한 성당”(같은 책, 312쪽)이라고 말한다. 반대편에서 가난한 아이가 나타났고 둘은 부둥켜안았다. 너덜너덜한 옷과 나막신을 신은 가난한 아이도 자신이 믿는 길을 끝까지 갔고, 결국 그 꼭대기에 도착했다. 왕자와 가난한 아이는 다른 아이들처럼 어떤 유혹과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마음에 종소리를 간직한 채 종에 도달했다. 여기까지 보면 현대적 성장스토리와 굉장히 비슷하다. 많은 유명인은 어렸을 때는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자신의 꿈을 이뤄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런 순간이 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안데르센 동화에서 종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은 딱 두 명의 어린아이뿐이다. 많은 경험을 쌓은 어른들은 다 실패했다. 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몸이 자라는 것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의 맑은 영혼을 간직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현대적 성장과 안데르센의 성장이 갈라진다. 현대적 성장은 다음 단계로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지금을 희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은 엄청난 선행학습이 진행되는데 그 목표는 모두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돈이다. 이런 압박에 요즘 아이들은 무기력하고 꿈이 없다고 어른들은 안타까워 하지만, 어린아이의 영혼을 일깨워주지 못한다. 안데르센은 19세기 산업혁명과 도시화로 계급이 무너지면서 물질이 사람의 영혼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안데르센 또한 작품 활동을 위해 돈이 필요해 후원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에게 돈은 수단일 뿐이었다. 안데르센은 세속적인 현실에도 사람들이 영혼을 지키며 어린 순수한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숲의 성장

  안데르센 성장은 순수함을 강조했고, 현대적 성장은 성숙함을 강조했지만, 둘 다 목적 지향적이다. 19세기 근대화로 인해 2세기 동안 우리는 목적을 향해 달려야 한다는 무의식적 지배를 받아왔다. 그렇기에 19세기 안데르센도 외로웠고, 그의 작품의 주인공들도 외로웠다. 또한 21세기 현대인도 외롭다. 작품 속 왕자와 가난한 아이는 계속 혼자 남아있었다. 그들에게 종이라는 목적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수단이 되었다. 의견이 다른 친구들은 걸림돌이 될 뿐이다. 숲은 종을 향해 나아가는 자신의 배경일 뿐이다. 가시나무 또한 종을 위해 겪어야 하는 성장통일 뿐이다. 다양한 생물들이 숲속에 우글우글 존재하지만, 왕자는 존재 자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앞만 보며 이 세상에 오직 자신과 종밖에 없다. 왕자와 가난한 아이는 같은 목적을 가졌지만, 서로를 돕지도 못하고 각자의 길을 간다. 꼭대기에서 만나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손을 잡았지만, 여전히 외로웠을 것이다.

  내가 육아를 하면서 경험한 성장은 숲의 세계관이다. 숲에서는 관계를 통해 성장한다. 왕자처럼 도착지로 바로 가지 않는다. 주변을 바라보며 어슬렁거리며, 누군가에게 마음을 뺏기고, 머물러야 한다. 나와 다른 존재에게 눈길을 주고, 소리를 듣는 것이다. 만약 왕자가 중간에 지나친 뱀, 원숭이, 백조들과 대화를 나눈다면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만약 왕자와 가난한 아이가 협상하여 함께 꼭대기에 올라가면 어떤 스토리가 펼쳐졌을까? 집을 떠나는 이유는 새로운 존재와의 만남이다. 그들과 대화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렇게 하다가 샛길로 빠지고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는 나침반이 필요하다. 종에서 두 아이에게는 종소리가 목적지였다면, 숲의 성장에서 종소리는 궁금한 마음이다. 새로운 관계를 맺는 힘은 타자에 대한 호기심이기 때문이다. 비록 안데르센의 동화가 목적 지향적일지라도 동화를 읽으며 주인공뿐만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의 마음도 궁금해진다. 이것은 동화를 강조한 안데르센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종소리인 것이다. 성장은 성공의 과정이 아니라 매 순간 겪어진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기 때문에 동화를 통해 마음의 종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동화를 읽으며 오늘도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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