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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에세이 2] 사다리 타기

작성자
coolyule
작성일
2024-12-23 13:59
조회
41

에세이 / 동화인류연구회 2024-12-23 김유리

 

사다리 타기

『안데르센 자서전』을 읽고

 

 

안데르센은 자기 인생을 가난하지만 재능과 노력으로 시련을 이겨낸 유명 작가의 성공담으로 그린다. 『안데르센 자서전』은 “나, 안데르센”이 작가적 성공을 향해 가는 길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나”의 관점에서 다룬다. 그의 자서전은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주석이자 자기 인생을 소재로 한 장편 동화다.

 

작고 누추한 방에서 태어나

 

안데르센의 인생 동화(원제가 “나의 인생 동화”다) 『안데르센 자서전』의 첫 페이지는 작가의 탄생을 둘러싼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1805년 덴마크 오덴세의 “작고 누추한 방”에 앳된 얼굴의 신혼 부부가 살고 있다. 스물두 살 구두 수선공은 귀족의 관을 얻어다가 손수 침대를 만들었다. 이 침대에 귀족의 시신 대신 “바로 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뉘어진다.

가난에 찌들어 사는 안데르센 가족은 좀처럼 궁핍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삶에 대한 불만은 집안 남자들의 몸과 마음을 무너뜨린다. 농부였던 안데르센의 할아버지는 거듭된 불행을 이기지 못하고 미쳤다. 적성에 맞지 않는 구두 수선 일을 했던 아버지는 우울했고, 심각한 병을 얻어 안데르센이 열한 살 되던 해에 숨진다. 삼대의 발목을 잡은 가난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뿌리 뽑힌 채로 도시로 흘러들어가 빈민으로 생을 마치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는 걸까? 안데르센은 예술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기로 한다.

 

인생의 사다리 오르기

 

안데르센은 “가난한 꼬마 주제에”(36) 감히 성공으로 가는 “인생의 사다리”(74)에 올라탄다. “가파른 언덕을 한 걸음씩 힘겹게 기어올라 마침내 정상에 올랐”고 “덴마크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작가로 문학계에 나만의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른다(332). 그의 나이 38세의 일이다. 정상의 자리에서 본 풍경은 아름다울까? 당시 낭만주의 사조의 작가상은 높은 산에 올라 파도치는 바다를 굽어보는 시인의 초상으로 표상된다. 낭만주의 시인의 마음 안에 그가 보는 풍경과 마찬가지로 숭고하고 장대한 내면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에 선 안데르센의 시선에 비친 풍경은 금이 간 거울에 비친 이미지처럼 갈라진다. 안데르센은 정상이란 “아름다움과 약점 모두를 간직”한 곳이라고 말한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길이지만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지르는 비명으로 으스스하다. 안데르센은 빨리 작가가 되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129). 부정적인 평가를 유발할 수 있는 빌미를 보완하라는 지인들의 권고를 잘 듣지 않았다. 정상에 선 작가가 되는 과정에서 유명세를 치르느라 비난도 많이 받았다. 안데르센은 비난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채찍을 맞는 것 같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안데르센을 아끼는 지인들은 작가가 작품을 읽어주는 소리만이 아니라 비명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그들은 작품에 대해 의견을 내랴, 마음의 상처를 받은 작가 달래랴 그와 함께 산고를 치렀다.

 

사다리의 끝단에서

 

환갑이 지난 안데르센은 고향 오덴세의 명예시민으로 추대되어 성대한 행사에 초대받는다. 행사는 “국왕 폐하 부부가 왔을 때만큼 대단했다.”(873) 행사 장면 서술은 안데르센의 목소리가 아닌, 오덴세 지역 신문의 자세하고 긴 기사로 갈음된다. 안데르센은 신문 비평을 “대중적인 활자 매체가 권력의 채찍을 휘둘러 나를 자기 권위 앞에 무릎 꿇리려 했”고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비판해왔다(283). “지각없는 기자들”의 기사로 인해 억울하게 비난을 받는 것도 경계했다(284). 그런데 인생 사다리의 끝단은 신문의 상찬으로 장식된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던 소년이 왕처럼 고귀하게 되어 돌아왔다”(873)는 칭찬의 종소리가 전국에 울려 퍼진다.

유명 작가로서의 성공을 찬양하는 종소리 아래로 작가는 고통의 선율을 흘려 넣는다. 행사장에서 왕 못지않은 명예를 누리는 내내 단상의 안데르센은 치통을 앓는다.

 

인생의 정상에 선 기쁨을 제대로 만끽할 수가 없었다. 치통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창문으로 찬 공기가 들이치자 통증은 이 기쁜 순간들을 즐기기는커녕, 앞으로 부를 노래와 시들의 제목을 바라보며 얼마나 더 기다려야 찬 공기가 가하는 참을 수 없는 그 고통에서 자유로이 놓여날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했다. 고통의 절정이었다.(873)

 

영광의 절정이자 고통의 절정이다. 이 무슨 인생의 아이러니인가? 그런데 작가는 하필이면 왜 이 장면에서 이렇게 치통을 강조하는 걸까? 원하는 것을 이루는 과정이 “무시무시한 통증”(872)을 수반한다는 설정은 안데르센이 쓴 이야기들을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을 방해한다. 한걸음씩 걸어서 길의 끝에 도달했는데, 고통이라는 길동무와 헤어질 방법이 없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왜 상이 아니라 벌을 받는 상태가 되었을까? 가난을 벗어나 유명해지겠다는 꿈을 품은 것이 잘못인가? 작품은 그렇다고 답한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다른 가능성을 모두 지우는 것은 최상의 장미꽃을 얻기 위해 다른 꽃봉오리를 솎고 가지를 치는 인위적인 행위라고 시사한다. 장미꽃이 너무 아름다워 보여서 그 길을 가는 것을 스스로 멈추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런 길을 다음 세대에 추천할 수 있을까?

가난을 벗어나려는 욕망을 따라간 끝에 도달한 곳은 궁핍에 대한 공포와 혐오라는 새로운 감옥이다. 근대 세계에서 부각되는 내면 정서는 근현대인의 삶의 판단 기준으로 부상했다.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에 정서만은 자기 것으로 보장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를 확인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빼앗기지 않는 도구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감정도 세상 못지않게 흔들린다. 꽉 붙들수록 더 불안해진다. 흔들리는 거울면에 비친 내 얼굴은 안정이 안 된다. 나는 추한가, 아름다운가? 남들의 인정을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허영인가, 아니면 좌표를 수신하고 싶은 표류자의 간절한 구조 신호인가? 불안이 해소되지 않고 만성이 되면 병적인 감정의 늪에 잠식당할 위험이 있다.

 

휘청이는 사다리

 

삶을 지탱하던 확고한 기반이 흔들리는 시대에 취약한 계층의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내몰리게 된다. 당장 무엇을 먹어야 하나, 추위를 피해 어디서 잠을 잘 수 있을까를 걱정하면서 마지못해 원치 않는 일들을 하지만 삶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가난이 죄가 되는 시대는 악하다. 가난을 불행으로 여기고 멸시 하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은 몸과 마음의 온전함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하는 처지로 떠밀린다. 안데르센은 할아버지처럼 정신이 붕괴하거나, 아버지처럼 단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항상 불안했다. 한 장소에서 평생을 살아갔던 선조들의 삶의 방식에서 떨어져 나와 광폭의 세계에 걸쳐진 채로 삶을 꾸려가야 했다. 그는 살기 위해, 정서적인 안정을 찾아 항상 “밖으로 나돌아다”녔다.(“생존”하기 위해 여행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643쪽 참조) 하지만 작가로서 펜을 놓은 적은 없었다. 광폭의 행보와 내면의 동요라는 조건에서 그는 쉼 없이 썼고, 쓴 것을 독자들과 공유했다. 그리고 독특한 동화의 형식과 스타일을 완성했다.

안데르센이 탄 인생 사다리는 높이 올라가는 사다리지였다. 그런데, 그 사다리는 덩굴강낭콩의 넝쿨처럼 360도로 허공을 휘저으며 붙잡을 곳을 찾는 회전 사다리였다. 거기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내면 풍경을 떠올리면 상상만 해도 멀미가 날 것 같다.

 

 

H. C. 안데르센 지음, 이경식 옮김, 『안데르센 자서전』, 휴먼앤북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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