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전집(2)] “눈의 여왕” 세계관
『안데르센 동화전집』(2) / 동화 인류 연구회 2024-9-25 김유리
“눈의 여왕” 세계관
“눈의 여왕”은 가난한 두 아이가 사는 좁아터진 다락방을 세계 끝까지 확장시키는 신비로운 요정담이다. 두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얼마나 많은 차원의 존재들이 개입되는지 들려준다.
아이들이 세상의 끝까지 다녀오는 동안 그들을 실어나르는 탈것들만 살펴보아도 파란만장하다. 썰매를 타러 나간 소년 카이가 눈의 여왕에게 납치되어 실종된다. 소꿉친구를 찾아 나선 소녀 게르다는 빨간 신을 신고 길을 나선다. 게르다는 소중한 신발과 작은 배를 바꿔 타고 강따라 흘러가다가, 망각의 꽃밭에 붙잡혀 있다가, 까마귀의 비밀스러운 안내로 왕궁에서 다다른다. 화려한 장화를 장만해 신고 금빛 마차를 타고 호기롭게 출발했다가 도중에 도둑떼을 만나 위기를 겪지만, 순록을 얻어 타고 북쪽으로 향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맨발에 맨손으로 눈의 여왕의 황량한 성으로 걸어 들어가 버려져 동사 직전인 카이와 재회한다.
카이를 찾아가는 게르다의 여행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진다. 도중에 만나는 “사람이며 짐승이며” 모두 게르다를 돕는다. 게르다의 힘은 도움받는 힘으로 카이가 살아있을 거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자기의 사연을 지칠 줄 모르고 반복한다. 게르다는 이야기꾼이다.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게르다를 돕는다. 이야기하는 행위와 게르다의 공손한 태도는 타인의 마음을 연다.
흰색과 붉은 색의 강렬한 대비가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조직한다. 차갑고 따뜻함이라는 촉각 대비와도 연계된다. 차고 하얀 눈의 여왕은 죽음으로 이끄는 강력한 힘이다. 얼어붙은 유리창, 눈보라, 황량한 얼음 벌판, 눈의 군대, 악마의 거울, 이성과 기술은 시각을 왜곡시키고, 심장을 차갑게 식히는 차고, 눈부시고, 외롭고, 얼어붙게 만드는 죽음의 기운이다. 이에 비해 두 아이의 고향집 화분에서 자라는 붉은 장미는 생명과 부활을 상징한다. 게르다의 붉은 신발, 궁정의 붉은 침대, 순록이 도달한 붉은 열매의 관목, 핀란드 여자의 사우나, 그들의 입맞춤으로 돌아오는 핏기가 모두 부활을 약속하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카이와 게르다의 분리는 속도의 차이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오만으로 과도하게 죽음의 세계로 넘어가버린 카이를 찾아가는 게르다의 여정은 오래 걸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해야 하지만, 급하다고 해서 시간을 단축할 수도 없다. 실수하고 만회하고, 망각하고 기억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어찌나 여러 번 반복해야 하는지……. 그런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관계가 늘어난다. 관계가 늘어날수록 이야기도 길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늘어난 관계들이 이어져 게르다를 멀리까지 보내준 것이다. 인간이 얼어 죽는 병(외로움, 단절)을 고치기 위해 여러 짐승(탈 것)이 생명의 불을 이어달리기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짐승들이 릴레이로 불을 훔친다는 북미 인디언 신화의 모티프가 연상된다. 죽음의 땅을 여행하고 돌아오는데 성공하는 이야기는 샤머니즘의 반영이다.
눈부신 빛에 오히려 눈이 멀 수도 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똑똑해진 카이는 춥고 외로운 장소에서 혼자 힘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카이를 혼자 두지 않기로 결정한 게르다 덕분에 이들은 재회한다. 중중무진의 인류의 경험과 무의식이 간직해온 온기 덕분일까, 다시 한번 소년은 생명과 성장의 기회를 얻게 된다.
일상의 반경은 협소하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꽃이 피고 지는 가운데 부활하는 생명력은 그냥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우주적인 사건이고, 영원한 이야기다. 동화의 관점에서 보면, 하루하루는 사악한 것들의 개입과 그것을 막으려는 우주적인 전투에서 기원해, 말도 안 되게 오래되고 초라한 노파들의 요술과, 망각을 일으키는 자기중심주의와, 종잡을 수 없는 환영과, 길들지 않는 거친 존재들이 펼치는 드라마다.
『안데르센 동화전집』(현대지성 2024년 2판8쇄)
『신의 가면 1 : 원시신화』(조지프 캠벨, 까치글방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