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 전집(5)] 종소리 말소리
숨길 수 없는 소리
주제문 : “종이 떨어진 깊은 곳”에는 감출수록 드러나는 이야기의 역설이 담겨 있다.
종이 감춘 이야기
“종이 떨어진 깊은 곳”은 사회적 금기를 위반한 이야기들의 보존과 유통에 관한 이야기다. 강물 제일 깊은 구간에 떨어진 교회 종에서 소리가 울려 나온다는 도시 전설을 소재로 창작했다. 종이 강물의 정령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리가 공기를 타고 물 밖으로 울려 퍼진다. 임금님 귀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 대나무 숲에 들어가 원 없이 소리친다는 전래 동화와 유사한 소재다.
작품의 공간 설정은 시공간을 연장한다. 우선,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현실 세계의 강이 마을 밖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구간에서 양안으로 시선을 분할한다.(심미적인 화단 정원과 실용적인 채소 정원) 곧이어 강물 가장 깊은 곳으로 이동하여 깊이를 설정하고 강변 수도원의 종탑 꼭대기까지 높이감을 부여한다. 강 바닥은 무문자 사회에서 연원하는 정령의 거주 장소다. 종탑은 기독교 도래 이후 금기 위반의 사연들이 드러난 곳이다. 연장된 장소와 시간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곳이다.
종탑에서 교회 종이 듣거나 목격한 이야기는 세 가지다. (1) 강 건너 수녀를 연모하는 수도사의 가슴속 이야기 (2) 고백 성사를 듣다가 미친 사제의 이야기 (3) 못된 왕을 민중이 살해한 반란의 이야기. 종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의 무게를 못 이겨 거센 바람에 떨어져 강물 속으로 굴러 들어간다.
정령이 사는 강물은 기억의 장소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었던 이야기의 저장소에 종이 합류한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들도 사라지고 건축물마저 흔적도 없지만 이야기는 인류의 무의식에 보존된다. 물의 정령이 하는 일은 종에게 계속 말을 거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야기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보존된다. 이야기는 이야기 행위를 통해서 전달된다. 이야기 행위를 통해 이야기는 동시대인에게 파급되고 후대에 전승된다.
종소리와 말소리
작품은 이야기의 “소리”로서의 특성을 강조한다. 공기가 이야기 전달의 매질이 되므로 공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말한다고 표현한다. 공기는 사람의 몸속까지 들어가 안팎을 넘나들며 깊고 어둡고 감춰진 곳에 있는 사연들을 꺼낸다. 이야기는 숨겨진 것을 드러내고, 비밀을 발설한다. 비밀이 이야기로 드러나는 것이 공기가 폐를 통과하고, 종소리가 물을 통과하는 것과 비슷하다. 글과 인쇄가 발명되기 전부터 이야기는 소리를 통해 전달력을 행사했다.
작품은 소리 이미지로 채워진다. 허공을 가로질러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종소리, 까치와 까마귀 우는 소리, 분노한 군중의 함성, 광인의 노래로 시끄럽다. 한편, 은밀히 속삭이는 고백의 소리, 배신자의 밀고, 억눌린 마음속 소리가 낮게 깔린다. 그러는 한편, 상상할 수 없는 옛날부터 이어져온 정령, 종(사물),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가 계속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조금은 이질적인 목소리 하나가 등장한다.
학교 선생님은 “그건 단지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것”일 뿐 종도 정령도 없다고 ‘가르쳐 준다.’ 학교 선생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있다와 없다, 안다와 모른다가 모두 뒤집힌다. 오덴세의 아이들도 다 알고 공기도 알고 있는 것이 전부 모르고 하는 소리가 된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세상은 진공 속인 듯 소리가 사라지는 것 같다. 정령이 없는 세상은 강물 속 종소리가 없는 세상이고, 그 종소리가 없는 세상은 종의 이야기가 지워진 세상이다. 작품 속에서 울리는 많은 소리들을 소거하면, 세상은 깊이와 높이를 잃고 종과 강은 물건으로 변한다. 할머니와 아이는 못 배운 무식자가 된다.
동화가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소리 내어 들려주는 전달 형식을 유지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동화는 아동을 위한 교육물이 아니라, 이야기 행위 그 자체다. 학교 선생님이 가르치는 이야기와 달리 할머니와 공기(자연)와 강물(무의식)이 전달하는 이야기에 입문하는 통로다. 아이는 이야기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보존한다. 깊은 강물 속에 빠진 종이 소리를 내는 것처럼 때가 되면 기억하는 줄도 몰랐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목소리가 있다. 동화 작가는 말로 들은 이야기를 글로 적는 시대 변화의 산물이다. 그는 민담을 향유해온 사람들과 달리, ‘교육’ 받은 ‘교양’ 있는 작가로서 ‘문법’에 맞게 쓴 글을 책으로 인쇄 출간하는 시대에 등장한다. 안데르센의 작품은 낭송되고 상연되어 부분적으로 소리와 결합되었다. “종이 떨어진 깊은 곳”에서는 이야기 속의 청각 이미지를 통해서 시대와 장소를 넘어 소리를 전달하는 기법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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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생각해 볼 내용
“늪을 다스리는 왕의 딸”의 화자
화자의 겹 쌓기
화자로 가득한 세상 만들기
혼혈/잡종
안데르센 동화에서는 화자들로 겹을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학교 선생님’은 ‘옛날 이야기’를 범주화하고 이야기 바깥의 현실 세계에 대해 가르친다. 작품상 최종적으로 선생님의 이야기가 작가의 목소리 속에 담김으로써 선생님에게 이야기의 바깥은 없다. 그렇다면 최종적인 이야기 화자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는 순간 또 하나의 레이어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