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5주차 수업후기]이승의 말소리가 들리고 이승의 눈물이 떨어지는 저승
이승의 말소리가 들리고 이승의 눈물이 떨어지는 저승
『안데르센 동화전집』 5주차 후기입니다.
『빵을 밟은 소녀』의 주인공은 잉거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못된 잉거는 구두에 더러운 것이 묻는 것이 싫어서 질퍽한 땅에 빵을 던져 빵을 밟고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늪에 빠져 지옥의 세계로 갑니다. 잉거는 지옥 대기실의 기둥이 되어 발에는 거미줄 족쇄가 채어졌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배고픔입니다. 자신의 구두에 빵이 달라붙어 있어도 온몸이 굳어 몸을 숙이지 못해 발에 있는 빵을 먹을 수 없습니다. 잉거는 빵보다 자신의 외모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입에 들어가야 할 것을 밟고 지나가다가 이 사달이 났습니다.
요즘은 수많은 잉거들이 존재합니다. 먹거리는 버려지기 위해 판매되기도 합니다. 포켓몬 스티커와 빵은 함께 포장되어 판매되고 포켓몬 빵은 구입한 후에 바로 버려집니다. 저는 작년 가을에 갑자기 사과가 맛이 없어지면서 비싸지고 유통 물량이 확 줄어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과는 계절에 상관없이 늘 풍족하게 먹던 과일이었습니다. 작년 기후가 사과 재배에 유독 맞지 않았을 수 있지만 늘 인간에게 순수 증여를 강요받던 자연이 멈출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이승과 저승의 구조가 흥미롭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승의 아래가 저승인데 이승의 눈물은 저승으로 내려갑니다. 이승의 말소리가 저승에서 들립니다. 잉거 엄마의 눈물이 잉거에게 떨어지고 잉거 엄마가 잉거에 대해 말하면 그 소리를 잉거가 들을 수 있습니다. 잉거 엄마는 딸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너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슬픔에 빠진 엄마입니다(연아샘 숙제).
그런데 전혀 알지 못하는 소녀가 잉거를 위해 울어줍니다. 잉거가 잘못한 것은 맞는데 용서도 못 받는 것이냐며 잉거가 불쌍하다고 소녀는 웁니다. 이 소녀가 할머니가 되어 죽을 때 지옥에 있는 잉거를 발견하고 다시 한번 울어주자 잉거는 지옥에서 나가게 됩니다. 단 조건부 허용입니다. 자신의 못된 행동을 상쇄할 착한 행동을 해야만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새가 된 잉거가 자신이 밟은 빵만큼 참새들에게 돌려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연아샘은 이것을 질량보존의 법칙으로, 선민샘은 자본주의적 계산법(등가교환)으로 해석했습니다. 안데르센 동화에는 등가교환이 나오고,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에는 증여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선민샘께서는 이 동화에서 ‘빵’은 먹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고 받음의 관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하시네요.
엄마의 눈물에 잉거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소녀의 눈물에 잉거는 반응합니다. 잉거의 영혼은 예상하지 못한 사랑에 압도당하고 자신이 이승에서 했던 행동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인간의 변화는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연아샘 숙제). 저는 성당에 다니지 않지만 성당의 신도들이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비슷한 장면입니다. 소녀가 된 할머니가 잉거를 위해 운 것은 결국 이기적인 것으로 자신의 불행을 생각해서라는 해석이 있었는데, 저는 타인의 불행에 대한 공감은 결국 자신의 불행감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소녀가 된 할머니는 자신이 잉거처럼 용서받지 못할까봐 울었고 동시에 잉거를 위해 울었습니다.
그리고 안데르센 동화에는 죽는 장면이 많습니다. 특히 젊은 친구들이 혼자 죽고, 죽는 순간은 모두 편안합니다. 죽음으로서 자기다움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허남린 선생님께서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얘기해주신 것이 생각납니다. 임진왜란 이후 생존 자체가 어려워진 민중들은 이승에서의 행복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때 유행한 것이 절에 가서 부모님의 천도재를 지내드리는 것이었고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민중은 부모님이 저승에서라도 편안하시길 소망하였습니다. 안데르센의 시대 또한 도시로 내몰린 젊은이들의 삶에 희망은 없었던 것일까요?
선민샘은 안데르센 동화에는 먹는 장면이 거의 없다고 하시네요. 안데르센의 시대가 많이 궁핍했던 모양입니다. 딱 한 장면이 기억납니다. 자신의 아들은 키우지 않고 귀족의 아들을 키운, 그래서 자신도 귀족이라 착각하는, 아네 리스베트가 아들을 맡겼던 집에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먹기 위해 가져간 커피와 치커리를 아들을 키워준 부인과 함께 먹습니다.
안데르센 동화의 이승은 가난, 고통, 음모, 무지, 소외, 결핍이 가득한 곳입니다. 반면 저승은 아름답고 훌륭하고 마음이 풍족한 곳입니다. 안데르센 동화에는 이승과 저승의 견고한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민샘에 따르면 이분법은 철저하게 하나는 긍정하고 하나는 부정하는 문법입니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 제국과 식민지, 젊음과 늙음의 이분법를 보면 한쪽을 이상화하려는 방식입니다. 안데르센 동화에는 저승이 긍정적인 곳으로, 이승이 부정적인 곳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무덤 속의 아이』에 이승과 저승은 거대한 검은 커튼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반대로 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의 밤』의 무대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입니다. 강에 빠진 친구를 구하다 죽은 캄파넬라는 저승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하고, 그때 깜빡 언덕에서 잠이 든 조반니와 꿈속에서 만납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조반니와 캄파넬라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 승선했다가 죽은 어린 남매와 남매의 가정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가정교사는 열심히 어린 남매를 살리려고 애썼지만 작은 구명 보트를 타려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어린 남매를 구명 보트에 태울 수 없었습니다. 가정교사와 남매는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남매는 먼저 죽은 엄마를 만나러 가겠다고 합니다. 저승길에 나섰으니 그저 그 길을 갈 뿐입니다. 미야자와 겐지의 저승은 좋은 곳도 나쁜 곳도 아닙니다.
캄파넬라를 저 세상으로 보낸 후 현실로 돌아온 조반니는 캄파넬라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캄파넬라의 아버지는 캄파넬라가 익사한 지 45분이 지났으니 캄파넬라를 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캄파넬라 아버지의 45분은 심정지를 기준으로 한 죽음입니다. 하지만 캄파넬라의 뇌세포와 몸세포는 살아 있어 꿈을 꾸고 조반니를 만나 은하수를 여행하고 조반니와 헤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