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예의가 필요해
예의가 필요해
미야자와 겐지의 「주문이 많은 요리점」에서는 두 명의 젊은 신사가 길을 안내해주던 전문 사냥꾼과 백곰 같은 개 두 마리와 함께 사냥을 왔다가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는다. 산속이 얼마나 험하고 복잡한지 전문 사냥꾼도 길을 잃고 사라지고, 개들은 현기증을 일으키며 죽어버렸다. 두 신사의 공통점은 복잡한 길을 안내해주는 직업 사냥꾼과 사냥을 도와 줄 개, 사냥감으로 잡으려 한 토끼, 산새도 모두 돈으로 셈하며 이해득실을 따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계 맺음에서는 사람도 동물도, 번쩍이는 총도 모두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이용할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생명에 대한 경의와 타자에 대한 존중, 예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상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빠르게 총으로 사냥하려던 신사들의 태도와 눈앞의 사태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해석한 결과 살쾡이의 유인책에 걸려 도리어 동물의 먹잇감이 될 위험에 처한다. 동물들도 타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숲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인간들만의 셈법과 태도가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료도 사냥감도 잃어버린 신사는 이제 육체의 허기를 느낀다. 참을 수 없는 허기에 산속을 헤매다 두 신사는 ‘서양요리점, 살쾡이의 집’을 발견한다. 이런 깊은 산속에 음식점이 있다는 점이 이상하긴 했지만, 배고픔 때문인지 이들의 생각은 깊이 이어지지 않는다. 음식점에는 하얀 벽돌로 꾸며진 멋진 현관에서부터 유리문과 복도를 지나 다시 하늘빛 페인트로 칠해진 문 등 여러 문들을 지나게 된다. 각 문에는 이러한 문구들이 씌어있다. ‘누구든지 들어오십시오, 절대 사양하지 마십시오.’, ‘이곳은 주문이 많은 요리점이므로 부디 그 점은 양해 바랍니다.’라든지, ‘손님 여러분, 이곳에서 머리를 단정히 빗고, 그리고 신발의 흙을 털어주십시오.’ 등이 적혀있었다. 산속 요리점에는 통과해야 할 문도 그 문 앞에서 지켜야 할 주문도 많았다. 문을 통과할수록 두 신사도 점차 의아함을 느꼈지만, 주문대로 몸에 걸친 의복과 총, 안경, 지갑 등을 내려놓고, 음식점에 준비된 크림과 향수를 뿌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지막 문 하나와 그 문 뒤쪽의 살쾡이들을 앞두고 그들은 드디어 자신들이 서양요리의 재료였으며, 지나온 문들은 살쾡이들의 먹잇감이 되는 준비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요리점의 살쾡이들은 그들의 먹잇감을 앞에 두고도 전혀 서두르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자기들의 사냥 방식을 점검하며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사냥감을 기다리며 예의를 갖춘다. 과연 두 신사에 비해 배가 고프지 않아서일까? 살쾡이들의 먹잇감을 향한 마지막 구애 장면을 보자. ‘손님들, 어서 들어오세요. 저희가 접시도 씻어 놓았고, 채소도 소금에 잘 절여 두었습니다. 남은 건 당신들을 하얀 접시에 담는 것뿐입니다.’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도 달려들지 않고 기다리며 그들을 존중하려는 살쾡이들의 태도가 돋보인다. 반면에 자신의 욕망과 근시안에 사로잡혀 먹잇감으로 존재하게 된 두 신사의 처지가 딱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비단 두 신사의 처지만이 아님을 알기에 등 뒤가 서늘해진다. 잠시 사냥감의 위치에 처했다고 상상해 보자. 만약 누군가의 사냥감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누구나 타자의 이해득실 대상이나 유희 거리가 되기보다 절차와 예의, 웃음이 있는 살쾡이의 먹잇감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미야자와 겐지는 이는 모두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예의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직 동화의 하이라이트가 남았다.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은 두 신사는 열리지 않아 도망칠 수 없는 지나온 문들과 살쾡이들 사이에서 울고만 있었다. 그때 자신들의 사냥을 도와주려 했던 백곰 같은 개 두 마리가 문을 뚫고 나타난다. 두려움에 떨며 울던 그 방과 살쾡이들은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길을 잃고 사라졌던 전문 사냥꾼이 그들의 허기를 달래줄 경단을 들고 나타났다. 단지 이해관계로 생각했던 동행자들이 두 신사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더욱이 산세가 험해 현기증을 일으키며 죽어버렸던 개의 부활이라니? 깊은 산속의 기세에 눌려 죽은 개들이 그들도 나름의 숲속 통과의례를 거쳐 백곰의 기운을 얻어 성장했다는 말인가? 살쾡이가 인간을 먹이로 얻기 위해 인간의 말을 배워 온갖 방식의 유인책과 의례를 만들어 낸 세계에서라면 이 또한 상상하지 못할 것은 무언가? 라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은 만물과 더불어 살아가며 통과 의례를 거쳐 배우며 성장한다고 하는데, 두 신사도 과연 죽을 위기의 극한 경험과 자신들을 도와주려 다시 나타난 개들과 안내자의 선의를 경험하고 달라졌을까? 도쿄로 돌아가는 길에 10엔어치 산새를 사갔다는 점에서 그들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추측해볼 수 있다. 다만 너무 두려운 나머지 휴짓조각처럼 변했던 그들의 얼굴이 도쿄에 돌아가서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변화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든다. 적어도 자신에게 보이는 대로 판단하던 성급함은 내려놓게 되지 않았을까?
– 백곰같은 : 띄어쓰기 확인
– 숲에 들어갔다 나온 이들은 달라졌을까? 좋은 질문이군요. 숲에 다녀오면 얼굴이 휴짓조각이 된다. . 이것이 겐지가 동화를 쓰는 이유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