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미야자와 겐지] 배움을 통해 강인해지는 존재들
<미야자와 겐지 동화읽기(1)>
2024.7.30. 최수정
배움을 통해 강인해지는 존재들
애니미즘 세계에서 만물은 ‘영’이 있다. 영들은 인격적 존재다. 영들은 말을 하고 감각하며 감정과 지각능력이 있다. <미야자와 겐지> 동화는 애니미즘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동물과 식물들도 ‘영’이 있고, ‘인격’이 있는 존재로 자신들의 ‘관점’을 갖고 있다. 동·식물의 물질적 조건, 신체는 바로 이 ‘관점’들의 결합체이다.
만물은 자기 신체의 관점 안에서만 사고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관점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은 아주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강인해’질 수 있다. 배우려는 호기심만 있으면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관점을 넘어 다른 관점으로 건너갔다 올 수 있다.
<첼리스트 고슈>
고슈는 첼로를 켜는 첼리스트다. 낮 동안 마을 극장에서 단원들과 열심히 연습하지만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는 밤마다 동물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세계로 ‘건너갔다’ 온다. 밤이란 낮 동안 소외됐던 자연의 세계다. 배움이란 언제나 내가 있던 곳에서 떠난 곳에서만 가능하다. 낮의 세계에 사는 인간이 밤의 세계 없이 그것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인간이 아는 것은 모두 자연에서 낮과 밤이 포함된 모든 시간에서 ‘내가 새가 되어버릴 것 같은’ 몰입과 관찰력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고슈는 매일 밤, 밤의 시간으로 건너가 동물들을 만난다. 그곳은 낮에는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자정이 넘으면서 낮과는 다른 시간이 펼쳐진다. 밤에 고슈를 찾아오는 동물들은 모두 그에게 ‘부탁한다.’ 음악을 들려주고, 가르쳐주고, 함께하고, 치유해주길 부탁한다. 그러나 밤, 저편의 세계는 낮, 이편의 세계와 관점이 교차하는 곳이다. 고슈가 낮 연주에서 누군가에게 배웠다면, 밤 연주는 누군가에 가르치는 형식이 된다. 그렇지만 자연에게 낮과 밤은 모두 동동한 시간이다. 그래서 사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같은 일이다. 고슈는 가르치는 형식을 통해 배운다.
우리는 모두 이편과 저편을 오가며 산다. 그러나 간혹 저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건너간다’는 ‘관찰하다’, ‘배우다’, ‘여행하다’와 동의어다. 알고 있던 세계의 바깥으로 걸어가 다른 세상 속으로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몰랐던 것을 배운다. 저편에는 이편에서 볼 수 없었던 다른 존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동물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첫날 밤 고양이가 가져온 토마토를 보며 고양이가 가져온 것을 내가 먹을 리 없다고 큰소리치던 고슈는 마지막 날 들쥐에게 자기 빵을 나눠주는 사람이 돼 있다. 매일 밤의 여행을 통해 다른 존재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긋던 고슈가 고양이에게서 배운 대로 누군가와 먹을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면서 연주의 성공을 암시한다.
<바라우미 초등학교>
내가 ‘여우초등학교’를 볼 수 없다고 해서 ‘여우초등학교’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미야자와 겐지가 본 ‘여우초등학교’를 내가 볼 수 없을 뿐 그것은 어딘가에 있다. 내가 미야자와 겐지처럼 여우의 관점을 취할 수 없을 뿐이다.
사냥꾼은 사냥감을 얻기 위해 덫을 놓을 때, 사냥감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 사냥감의 습관과 좋아하는 먹이 등 그가 사물을 어떻게 보고 느끼고 행동하는지를 알아야 그 습성에 맞게 덫의 형태를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또 사냥감은 자신을 유혹하는 덫을 피하기 위해 다시 덫을 놓은 자의 관점을 배운다. 포획해 먹기 위해, 포획을 피해 먹히지 않기 위해, 서로의 관점을 배워 가는 곳이 이 세계다. 서로의 관점을 빨리 배워야 먹거나 먹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여우에게 ‘덫’은 인간의 관점을 배우는 도구이고, 인간의 관점을 배운 여우의 관점이 달라지면서 다시 인간은 ‘덫’의 형태를 바꾼다. 인간과 여우는 ‘덫’을 통해 서로의 세계를 본다. 그러나 ‘덫’을 보나, 그것과 통하는 그들의 세계를 볼 수 없는 존재에게 다른 세계는 없는 것과 같다.
만물은 서로의 관점을 배우고 취하면서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자기 생명을 유지한다. 자연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학교다. 자연의 동물들이야말로 진짜 ‘관점주의자’들이다. 자기 서 있는 자리(=신체)에 따른 관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다른 존재들의 관점을 배우며 산다.
<고양이 사무소>
고양이 사무소에는 검은고양이, 흰고양이, 얼룩고양이, 삼색고양이, 부뚜막고양이가 있다. 앞의 네 고양이들은 색에 따라 구분되는 이름을 갖고 있고, ‘부뚜막고양이’는 살아가는 곳에 따라 이름이 붙여져 있다. ‘부뚜막고양이’는 ‘타고난 모습’에 따라 불리지 않는다. 부뚜막 재의 상태에 따라, 고양이가 잠이 드는 모습에 따라, 매일 매일 몸의 얼룩이 달라진다.
세 고양이들은 매일 매일 형태를 바꾸는 듯한 ‘부뚜막고양이’를 이해할 수 없어서 싫어한다. 특히 이곳은 고양이의 역사와 지리를 조사하는 곳인데, 고양이가 고양이처럼 보이지 않고 ‘너구리’처럼 보이는 것에 더욱 참을 수 없다.
<고양이 사무소>이야기는 고양이의 특정적 제스처–다리를 힘껏 뻗어 하품을 하며 도시락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주우려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는–를 보여준다. 고양이가 일어서는 것을 귀찮아한다는 것과 고양이의 앞발, 즉 손이 짧은 신체적 특징이 일으키는 사건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미야자와 겐지는 고양이의 신체적 특징을 부각하면서 ‘부뚜막고양이’의 신체적 변용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네 고양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것을 싫어한다. 고양이이면서 너구리처럼 보이고, ‘재빨리 일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부뚜막고양이’는 ‘평범한 고양이’가 되려고 부뚜막이 아닌 곳에서 잠을 청해보았지만, 피부가 얇게 태어나 추워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부뚜막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나 자기 태어난 조건이 있고,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네 마리의 고양이가 태어날 때부터 있던 몸에 있던 그들의 색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부뚜막고양이’도 얇은 피부의 신체적 조건을 벗어나기 힘들었을 뿐이다.
다른 존재를 자기와 같은 잣대로 재단하기 위해 역사와 지리를 알 필요는 없다. 고양이의 역사와 지리를 알아야 할 이유는 그 지식으로 더 넓고 다양한 관점을 배워 삶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그런데 다른 존재를 부정하면서 무시하고 따돌리고 있다면 공부가 무슨 소용인가. 갑자기 나타난 사자의 말처럼 다 필요 없고 다 그만둬야 한다.
<주문이 많은 요리점>
사냥을 위한 도구를 직접 만드는 일은 사냥감에 대해 알아야 가능하다. 그의 습성과 마음을 이해하며 스스로 사냥감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자신을 변용해야 사냥에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과정 없이 총을 갖고 사냥감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일은 어떤 관점의 변용을 일으키지 않는다.
두 명의 사냥꾼은 자신들의 관점만 갖고 있다. 배고픈 자기가 있다면, 배고픈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나 외에 어떤 다른 존재의 관점을 경유하지 못한 사냥꾼들은 <주문이 많은 요리점>의 요구 사항들을 자신들의 관점대로 해석하고 스스로 요리재료가 되어 먹힐 위험에 처한다. 자연에서는 조건에 따라 유연하게 자기 관점을 이동할 수 있는 존재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나메토코산의 곰>
곰 사냥꾼 고주로는 엄마 곰과 새끼 곰이 희미한 달빛 아래 사람처럼 서서 이야기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행여 자신이 그들을 방해할까봐 가만가만 뒷걸음치며 물러난다. 행여 바람이 그들 쪽으로 불어 자기 냄새를 실어날라 그들이 놀라기라도 할까봐 조심조심 자리를 피한다. 미야자와 겐지는 사냥꾼으로서의 고주로보다 다른 존재의 마음을 이해하는 고주로의 모습을 ‘강인하다’고 말한다. 곰의 관점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그가 강인한 존재라는 것이다.
애니미즘 세계에서 만물은 ‘영’으로 인해 연결되어 있고, ‘고기’란 ‘영’이 들어있었던 생명이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언제나 ‘영’을 먹는다는 딜레마와 함께 한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고기’로 인해 인간과 동물이 연속되어 있다. 내가 먹는 ‘고기’가 ‘영’이라는 딜레마를 겪으며 위험과 부담을 인지하는 것부터가 자연과 인간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그리고 그 딜레마와 함께 생명을 존중하고 경외하는 것이 그의 마음을 강인하게 한다. 미야자와 겐지가 말하는 ‘강인함’이란 삶과 죽음의 동시성을 직시할 수 있는 일이다.
내게 보이지 않는다고, 그것이 없을 리 없다. . . 내 관점의 한계를 인식하라는 동화의 윤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