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명한 사람은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을 살릴 줄 안다고 하지요. <은하수 통신>에서는 이연숙 선생님께서 각지를 다니며 만나신 아름다운 인연들을 소개합니다. 선생님은 일본 동경의 히토츠바시대학 사회언어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고, 문자 이면의 이데올로기와 그 권력을 다양한 소수자의 관점에서 해체하고자 하셨습니다. 구술의 신체성과 생기를 강조하시는 선생님께서 쓰시고 번역된 책으로는 『「国語」という思想―近代日本の言語認識』, 『異邦の記憶―故郷・国家・自由』, 『국어라는 사상』, 『언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말이라는 환영』, 『이방의 언어』 등이 있습니다.
양귀비의 욕조
양귀비의 욕조
은하정 이연숙 선생님
지난 5월 중국 서안에 다녀왔다. 서안의 옛 이름은 장안으로, 진나라 한나라를 비롯해 기원전부터 무려 13개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유서 깊은 고도다. 또한 유라시아 대륙의 교역 루트였던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문물이 만났던 경계 넘기(Border-crossing)의 주요 무대였다. 그런 만큼 장안에는 늘 각종 화제가 끊이질 않았고, 인간의 오욕칠정 에너지가 가득 찬 공간이기도 했다.
장안의 화제 중에 양귀비(719-756)와 현종(685-762)의 스토리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당의 역사서인 <당서(唐史)>에도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백거이(772-846)는 현종이 타계한 반세기 후 장편시 <장한가(長恨歌>를 지어,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 이야기를 감미롭고 애절하게 읊었다. <장한가(長恨歌>의 에로틱한 울림은 일본에 건너가 궁정 연애소설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탄생시킨 산실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 많은 관련 작품들이 있다.
작품들의 무대로는 화청궁이 자주 등장한다. 화청궁은 현종과 양귀비가 만나 첫 성애(性愛)를 나누었던 장소이자, 둘도 없는 온천지로도 알려져 있다. 화청궁 안에는 양귀비가 사용했다는 욕조 즉 해당탕(해당화의 욕조)이 있다. 꽃잎 모양을 한 그리 크지 않은 옥색 천연석의 욕조는 일반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고, 설명문이 부착되어 있다. 설명문 끝자락에 <서안 사건>으로 서안에 감금되었던 장개석도 이 욕조에서 목욕했다는 한 줄의 글자들이 눈길을 끈다.
화청궁을 둘러본 후 나는 양귀비와 현종에 대해 이런저런 궁금증이 생겼다. 장안에서 돌아온 후, 양귀비와 현종에 대한 책들을 뒤적이고,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1898-1956) 감독이 1955년에 제작한 영화 <양귀비>와 중국의 장예모 감독의 2015년 작품 <왕조의 여인 양귀비>를 흥미를 갖고 봤다.
그때까지 나는 현종과 양귀비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도 호기심도 없었고, 현종에 대해서는 그저 색에 빠졌다 나라를 위태롭게 했던 황당한 황제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역사가들은 현종은 백성들을 위하고, 문화를 융성시킨 유능한 군주라고 평가한다. 이백(701-762)과 두보(712-770)는 현종과 동시대 시인들이다. 두보는 현종의 치세를 그의 시 <억석(憶昔)>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개원(현종의 연호)의 전성시대를 회상하니
작은 고을에도 만호집이 차 있고
벼와 쌀은 기름지고 좁살은 깨끗하니
나라나 개인이나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찼네
<화청궁>
대외적으로도 현종은 다양한 문화권과 교류하고, 여러 민족들과 소통하는 넉넉하고 개방적인 황제였다.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회족은 현종의 시기 아라비아에서 온 이슬람교도의 후예들로, 최초의 이슬람 사원인 청진사도 현종 때 세워졌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의 아들 수왕의 부인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로부터 며느리를 빼앗은 셈이다. 지금의 상식으로 보면 상상이 안가는 패륜의 극치이다. 장예모 감독의 영화는 이 삼각관계를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양귀비의 이름은 양옥환으로 그녀는 외모가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춤과 비파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현종은 양옥환의 재색에 반해, 그녀를 탐한다. 이런 상황에서 양옥환은 남편이던 수왕에게 우리들의 사랑은 세상이 반쪽 나도 지키자고 울면서 맹세한다. 수왕도 이해할 수 없는 황제 아버지에 대해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그러나 절대 권력 앞에서 누구도 대항할 힘이 없었다. 옥환은 자신을 탐하는 현종에게 항변하며 버티지만 그녀 또한 무너지고 만다.
양옥환은 사천성 출신으로 부친은 지방 하급 관리였는데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가세가 기울어 장안의 숙부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된다. 숙부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중 안록산에 발탁되어 면밀한 계획 아래 입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양귀비의 등장이지만, 안록산은 후에는 양귀비를 죽음으로 몰아갔고, 나아가 당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양귀비의 극적인 삶 앞뒤에는 안록산이 있다.
<양귀비>
역사서는 양옥환이 현종의 아들 수왕과 16세에 혼인을 했고, 22세에 현종의 귀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현종의 귀비가 된 양귀비는 이왕지사 이렇게 되어버린 것, 현종의 총애나 독차지하자고 내닫게 된다. 그런 현종과 양귀비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 화청궁이다. 백거이는 이 장면을 <장한가>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싸늘한 봄날에 화청의 못에서 목욕을 하니
온천수가 부드럽게 윤택한 살결을 씻어 내리네
시녀들 어여쁜 그녀 부축해 일으키자
그때부터 성은을 입기 시작했도다.
현종의 후궁이 되자, 양귀비는 몸이 달아올라 현종을 적극적으로 사랑했다고 한다. 현종에 대한 독점욕이 강해지면서 다른 여성들이 현종에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서약을 강요했다. 황제의 의무 중에 하나가 많은 여성들을 상대로 많은 자손을 번성시키는 것이었다. 양귀비의 독점욕은 이러한 황제의 성스런 의무에 반하는 것으로, 황제의 열린 사랑을 부추기던 무리들에게 반감을 샀다.
현종이 양귀비를 만난 것은 현종 56세, 양귀비 22세였다. 당시 56세의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뒷자락을 돌아볼 나이였지만, 현종은 달랐다. 인륜을 차버리고 봄날을 꿈꾸었다. 봄날이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누가 무어라 하건 현종과 양귀비는 그런 사랑을 15년간 이어갔다.
그러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다. 다 그녀 때문이라고 몰아 부치는 친위대의 강요로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양귀비의 처형을 허락하고 말았다. 현종 72세,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 아끼던 양귀비가 처형당한 후, 현종은 양귀비를 그리워하다가 78세에 자신마저 세상을 뒤로 했다.
양귀비는 온천욕을 매우 즐겼다고 전해진다. 이것을 어떤 사가는 양귀비가 겨드랑이 냄새가 강해 자주 몸을 씻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양귀비가 현종의 침실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씻었던 욕조, 거기에 들어 앉아 1100여년 후에는 장개석이 몸을 담갔다. 그 욕조는 권력의 여러 얼굴을 간직하고 있다.
<양귀비의 욕조>
사랑과 에로스는 인간에게 생명력과 활력을 주고, 인류의 역사를 이어주는 중요한 에너지다. 그래서 고귀하고 소중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과 에로스에 권력이 들어와 분탕질을 치면 이상하게 변해간다. 사랑이 권력을 동경하게 되면 그 사랑은 일그러지고 만다. 폭력으로 화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에로스와 사랑은 논리와 언어로 설명하기도 어렵거니와 표상하기도 쉽지 않다. 그 틈을 타 현종과 양귀비 이야기도 이야기꾼들의 입맛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만들어져 왔다. 현종과 양귀비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고 창작될 것이다.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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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현종과 양귀비의 로멘스를 이제야 쫘악 알게 됩니다. 화청궁도 엄청 화려해 보입니다. 게다가 권력의 욕조도!!
에로스가 권력을 만나면 폭력의 블랙홀이 열리는군요. 나이 든 현종에게 새 삶의 활력을 준 여인이었건만, 결국 파국의 문을 열다니. . . 치세의 왕을 난세의 왕으로 만든 에로스이니 난세를 치세로 몰아갈 힘도 에로스에 있을 수 있을지도. .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한 편의 영화처럼 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같은 이야기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전해지고 해석될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의 말씀처럼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네요. 네버엔딩스토리~~~~
여행, 답사의 묘미 또한 그런 것인가 봅니다. 그때의 인상과 감상이 돌아와서도 계속 남으며, 공부와 생각을 열어주니까요.
세기의 러브스토리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