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명한 사람은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을 살릴 줄 안다고 하지요. <은하수 통신>에서는 이연숙 선생님께서 각지를 다니며 만나신 아름다운 인연들을 소개합니다. 선생님은 일본 동경의 히토츠바시대학 사회언어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고, 문자 이면의 이데올로기와 그 권력을 다양한 소수자의 관점에서 해체하고자 하셨습니다. 구술의 신체성과 생기를 강조하시는 선생님께서 쓰시고 번역된 책으로는 『「国語」という思想―近代日本の言語認識』, 『異邦の記憶―故郷・国家・自由』, 『국어라는 사상』, 『언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말이라는 환영』, 『이방의 언어』 등이 있습니다.
튀빙겐에서 본 <서울의 봄> : ‘나는 누구인가’
튀빙겐에서 본 <서울의 봄>: ‘나는 누구인가’
이연숙 선생님
가을이 한창 깊어 가던 2024년 10월 말, 난 로사리오(묵주)와 영성가 토마스 머튼 (Thomas Merton 1915-1968)의 책 한권을 달랑 들고 길을 떠났다. 튀빙겐대학에서 개최하는 <5.18과 디아스포라>의 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일 년 전에 튀빙겐대학으로부터 발표제안을 받은 터였다. 이 주제는 내 연구영역을 넘는 것이었지만, 무언가 선물 같은,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계시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선뜻 발표제안에 응했다.
발표 준비과정부터 좀 달랐다. 보통 학술대회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해당 테마에 관한 연구논문과 자료를 찾아 읽고, 논고를 심화시켜 나간다. 그러나 <5.18과 디아스포라>라는 주제는 내가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깊은 상처와 기억에 직면하는 여정이었다. 난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의 12년간을 광주에서 보냈다. 나의 감성, 삶에 대한 꿈과 희망의 많은 부분이 이때 형성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는 내 삶의 전경 (前景 foreground)이자 내 성장의 산실이었다.
고등학생 때 우리 가족은 광주를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살벌한 상황에서 편집된 5.18 소식에 접할 뿐, 광주로부터 오는 소식을 직접 들을 수는 없었다. 계엄 군부는 광주를 철저하게 차단했고, 신문 방송은 국가 폭력의 개가 되어, 기만과 거짓 뉴스만을 알렸다. 그런데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절망적인 광주 실상을 전해주었다. 그 소식들은 너무나 참혹해서 음습한 지하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처럼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자유로운 <나의 삶>을 찾아 아나키스트적 전략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 탈출을 은밀히 기도하고 있었다. 광주 민주항쟁이 일어난 몇 년 후 유학을 떠나면서 무사히 한국 탈출에 성공했다. 유학생활 동안 난 광주를 내 기억의 아주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
튀빙겐대학 학술대회를 계기로 봉인되었던 광주 민주항쟁 뚜껑이 열리게 되었다. 꽁꽁 숨겨 두었던 광주의 기억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나>라는 존재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 동안 유보해 왔던 공동체와 타자, 역사와의 관계가 큰 물음으로 다가왔다. 난 이 물음들이 무거워 딴청을 부렸다. 그러나 마음은 더욱더 무거워져 갔다. 한참을 끙끙대다가 굳어 있던 <나>를 무장해제 시키고, <나>의 균열과 마주하는 용기를 내자 하고 마음먹으니 한결 가벼워지고 머리도 맑아졌다.
튀빙겐대학은 조선 성종 때인 1477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대학이다. 학술대회는 대학캠퍼스 안에 있는 한 왕족의 성에서 열렸다.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참석했는데, 몇 분 선생님들의 발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미국에서 참석하신 재미교포 선생님은 5.18당시 미국에서 대학 3학년 학생이었다고 한다. 5.18은 그분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약속된 직장을 버리고 젊음을 오롯이 한국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데 헌신했다. 지금도 여전히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길을 걷고 있다. 독일에 계신 두 분 선생님 발표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두 분 모두 독일로 유학 오신 분이었는데 5.18소식을 접한 후부터는 유학생활을 조국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신 분들이었다. 지나온 시간을 말해 주는 듯 이 분들은 한결같이 맑고 품위가 있었다. 이 분들과의 만남은 나를 정화시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튀빙겐은 인구 9만 명 남짓한, 숲이 우거지고 꽃향기 가득한 곳이다. 한 가운데는 라인강 지류인 네카강이 흐르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동화 같은 마을이다. 풍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지적 분위기도 넘친다. 독일을 대표하는 대학인 튀빙겐대학이 자리 잡고 있고, 헤르만 헤세는 튀빙겐의 한 서점에서 일하면서 문학수업을 했으며, 알츠하이머병을 발견한 정신과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가 튀빙겐대학에서 연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튀빙겐은 나치시대의 아픈 역사도 갖고 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언덕은 나치시대엔 히틀러를 찬양하는 깃발로 가득 채워졌고, <하이 히틀러!>를 외치는 함성이 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튀빙겐은 흑역사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힘썼고, 그 노력은 친환경 진보적 도시로 거듭났다.
이틀간의 학술대회 후 놀라운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튀빙겐의 한 극장에서 <서울의 봄>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그리 크지 않은 극장이었지만, 좌석은 튀빙겐 시민들로 가득 찼다. 히틀러 시대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거듭난 관람객들은 무시무시한 권력욕과 국가폭력의 장면에 손에 땀을 쥐었다. 나는 1979년 12월 12일로 돌아갔다. 한밤중에 들려오는 계엄군의 생생한 탱크 소리, 공포스런 사회분위기에 가슴이 미어졌다. 영화가 끝난 후, 나는 나에게 되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아름다운 대학도시 튀빙겐에서 나는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을 선물로 받았다. <나만의 삶>을 위해 아직도 아나키스트적 전략을 지고 다니는가? 한국 탈출은 성공했는가? 자유로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에 대한 물음은 물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물음들에 언제 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니 답을 쓰지 못하고 빈 답안지를 제출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확고한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밀려오는 파도처럼 타자들과의 공감을 통해 형성되었다가 해체되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삶의 큰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여유와 인내가 필요하리라. 이를 위해서는 긴 호흡이 필요하고, 경쾌한 몸과 마음이 필요하다. 이러한 생각들을 하며 학술대회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은 갈 때 보다 가벼웠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맛있는 프레첼과 허브티를 마시며, 조금은 경쾌한 모습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되물었다.
<튀빙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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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숙 선생님의 강의날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디아스포라의 삶을 이야기하고 소수자에 대해 질문했던 그 날. 국가에 비폭력으로 저항하고자 했던 김석출 선생님과 타자의 언어로 광주를 토해낸 김시종 선생님 그리고 종추월 선생님의 예술 작품으로 감동과 먹먹함이 채 사라지지 않았던 그 날. 저는 아직 국가와 국민의 존재에 대해 풀리지 않는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믿기지 않는 사건이 일어 났었지요. 선생님 글을 읽으니 영화 <서울의 봄>이 보고 싶어집니다. 선물 같은 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선생님
<서울의 봄>을 튀빙겐에서 보셨군요. 뭉클해집니다.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 나도 내 주변도 예외일 수 없는 그 현장에 대한 공감, 분노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긴 호흡, 경쾌한 몸과 마음을 준비해보겠습니다.
‘재일하다’라는 주제로 튀빙겐의 감동을 저희와 함께 공유해주신 그날의 세미나가 다시금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있었던 계엄선포, 너무나도 안타깝고 비통한 마음으로 그 사건을 바라보셨던 선생님의 시선이 위의 이야기들과 연결되어 먹먹해집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답하는 여정에는 나 뿐만 아니라 주변, 타자들, 공동체, 사회에 대한 끊임없이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 그 길에는 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요. 좋은 생각거리 감사합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