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사람은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을 살릴 줄 안다고 하지요. <은하수 통신>에서는 이연숙 선생님께서 각지를 다니며 만나신 아름다운 인연들을 소개합니다. 선생님은 일본 동경의 히토츠바시대학 사회언어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고, 문자 이면의 이데올로기와 그 권력을 다양한 소수자의 관점에서 해체하고자 하셨습니다. 구술의 신체성과 생기를 강조하시는 선생님께서 쓰시고 번역된 책으로는 『「国語」という思想―近代日本の言語認識』, 『異邦の記憶―故郷・国家・自由』, 『국어라는 사상』, 『언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말이라는 환영』, 『이방의 언어』 등이 있습니다.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이연숙 선생님
난 그녀를 2019년 겨울에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 1962년 폴란드 태생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다.
물론 그녀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난 토카르추크를 “그녀”라 부르고 서슴없이 “만났다”고 이야기한다. 토카르추크가 2019년 스웨덴 한림원에서 한 노벨상 수상소감 강연록을 읽고, 마치 오랜 지기 같은 친숙함과 다정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난 철이 들면서 “창조적 비판력”, “논리적 실증”, “보편적 진리” 등의 깃발 밑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지성을 갈고 닦고, 이에 따른 사고의 틀을 키우려고 힘써 왔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난 사회와 역사를 보는 나름의 안목을 키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엄습해 왔고, 때로는 피곤함이 밀려왔다. 잘 정돈된 옷을 입고 있지만 바람이 잘 통하지 않고 훈훈함이 부족한 그런 답답한 느낌이었다.
어디에선가 발원해서 점차 퍼지고 있다는 감염병의 불길한 소식이 세상에 전해지기 시작할 즈음, 나는 우연히 올가 토카르추크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인 <다정한 서술자>를 읽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자유롭고 그리고 희망이 묻어 났다.
<다정한 서술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의식이 기억하는 첫 번째 사진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엄마가 처녀 시절에 찍은 사진입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그런데 엄마의 표정은 왠지 슬퍼 보였고, 마치 그 공간에 없는 사람처럼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였습니다.”
토카르추크는 나중에 엄마에게 여러 번 그 슬픔의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같은 대답을 했다. “엄마는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그리워하느라 슬펐던 것”이라고 했다. 어린 토카르추크는 그리움이란 누군가를 잃었을 때 솟아나는 감정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내가 아직 세상에 있지도 않은 데 어떻게 날 그리워할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이에 엄마는 대답했다. “때로는 순서가 바뀔 수도 있단다. 우리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그 사람이 거기 존재하게 되는 것이란다.” 하고 다정하게 대답했다.
엄마와 나누었던 그 대화는 토카르추크에게 세상의 평범한 물질적 속성이나 인과 관계, 확률의 법칙으로는 닿을 수 없는 더 넓고 자유로운 세계의 지평을 열어 주었다. 토카르추크는 엄마의 그 말이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고 했다.
토카르추크가 어머니와 나눈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데 우리는 다양한 인연과 문맥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토카루추크와 그녀의 어머니 같을 수는 없다. 세상은 흔히 말한다. 어머니와 관계는 절대적이고 신성 불가침한 영역이라고. 어떤 의미에서는 맞지만, 서로 다른 여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다양하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토카르추크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만든 그녀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이다. 그녀의 작품들에는 “삶의 한 형태로서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을 해박한 열정으로 그려 낸 서사적 상상력”이 녹아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녀의 엄마는 “아직 있지도 않은 나”를 “있는 나”로, 존재 그 자체의 순서마저도 전복시키는 생명력과 다정함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전폭적이지만 모험적이기도 한 토카루추크의 경계 넘기는 어떤 불변의 것으로 묶어버리는 안온한 모녀 관계를 넘어서는 무언가의 더 큰 축복이 있다. 어떤 때는 엄마가 딸이 될 수 있고, 때로는 아들이 엄마가 되며, 친구가 딸이 되고, 학우가 엄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존재의 경계를 넘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다정한 서술자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가짜 뉴스와 제멋대로의 인터넷 뉴스가 판을 치는 지금, 창조적 비판력, 이성적 판단력과 논리는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일상이 너무 삭막하고 재미가 없다. 이런 세상에서 경계를 넘고 넘어, 우주와 은하계에까지 자유롭게 유영하고, 이웃과 다정함을 나눌 수 있다면 우린 지금 보다 더 많이 웃게 되지 않을까? 우리들의 친구 토카르추크도 그렇다고 미소를 지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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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카르추크의 글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다정함’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연숙 선생님의 글 문맥상 ‘이성과 논리’와는 대비되는 개념 같은데요.
어머니가 처녀 때라고 하니, 임신을 한 상황도 아닌데, 언젠가 자신의 몸에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며 골똘히 슬픈듯한 표정을 짓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그 사람이 거기 존재하게 되는 것이란다”
‘다정함’이란 일상적, 세속적 단어 같으면서도 동시에 뭔지 모를 울림이 있는 정서, 감각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글 자주 올려주세요 ^^ 선생님의 지인들을 빨리 만나고 싶네요.
이성적 판단력과 논리를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안다, 알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많은 오류를 만드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잘 정돈되었지만 통풍이 안되고 답답하고 훈훈함이 부족한 세상의 경계 넘어가는, 전폭적이고 모험적인 토카르추크! 이연숙 선생님의 친구인 그녀를 꼭 직접 만나보고 싶네요.
다정함과 그림움은 동의어였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너무 마음이 떨려와, 주신 다음 문장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존재의 경계를 넘을 때, 그것은 바로 다정할 때!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올가 토카르추크를 만나신 이야기를 읽고 그녀와 엄마의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이고 이 글로 되돌아오고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께서 일본철학 시간에 사라져간다고 말씀주신 여운, 침묵, 기다림의 세계가 떠올랐습니다.
제게는 머리 속으로 그려지지도 상상도 되지 않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면서 제가 얼마나 눈 앞의 세계, 이성과 논리의 세계에 익숙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저도 이 경계의 넘어섬을 경험해볼 수 있길 기대하며 공부해보겠습니다.
다정한 글 감사합니다. 선생님~^^